# 나만 아는 주인공들 449화
“이럴, 수가.”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가슴팍에 가로지르듯 난 상처를 내려다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갈라진 상처로부터 신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온다.
죽음에 가까운 상처. 다른 평범한 상처였다면 이 정도도 거뜬히 재생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상처는 급화를 터득한 상대에게 당한 거라 그마저도 되지 않는다.
‘저승의 신 하데스마저도 협박하고, 케르베로스를 생포해 온 이 내가, 죽는다고?’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둘을 바라본다.
최도윤과 로믈락시스.
곳곳에 옷이 찢어지고 상처투성이에, 당장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녀석들.
분명 싸움 자체는 헤라클레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시종일관 공격을 몰아친 것도 그였고, 압도적인 힘으로 수세에 몰아넣은 것도 그였다.
하지만 싸움은, 결국 헤라클레스의 패배로 끝났다.
“대체, 어떻게…….”
왜 자신이 진 거냐고, 어떻게 이길 수 있던 거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헤라클레스는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는지 자조의 미소를 흘렸다.
“그런가. 확실히, 나는 잊고 있었군. 강하다는 것과 이긴다는 것은 얼마나 다른지.”
그가 영웅으로 불렸던 시절.
분명, 그는 헤라의 시련을 받으며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력한 힘으로 적들을 쓰러뜨려 왔다.
하지만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했냐고 물으면, 그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헤라클레스에게도 분명 위기는 있었다. 순수하게 정면에서 승부하는 것으로 이쪽의 힘이 모자란 상대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승리했다.
그가 적보다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강함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결국 달랐다.
“그 중요한 사실을 지금까지 까먹고 있었다니.”
기간토마키아 이후, 신의 자리에 오른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강함에 취해 더욱 강해지는 것에만 집착했다.
진정한 힘은 상대가 누구라도 전부 박살 내 줄 수 있다는, 그런 편협한 사고에서 비롯된 행동.
그 최후의 결과가 바로 지금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여태까지 자만했던 헤라클레스에게 내리는 신의 벌일지도 몰랐다.
“축하한다. 너희들의 승리다.”
천천히 사라지는 자신의 몸을 보며, 헤라클레스는 진심을 담아 최도윤을 칭찬했다.
패배에 대한 분함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난 뒤의 체념, 그리고 중요한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자신을 향한 자책만이 담겨 있을 뿐.
정작 최도윤은 헤라클레스를 쓰러뜨린 것 자체에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아직 우리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승리를 자축하기엔 일러.”
“이 나를 쓰러뜨리고도 자만하지 않겠다는 건가. 퍽이나 자존심 상하는 말이지만, 여기까지 온 녀석에 어울리는 답변이로군.”
그렇다면 어디 끝까지 가 봐라.
육신이 텍스트의 조각으로 분해되는 헤라클레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강적이었던 헤라클레스가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최도윤은 고개를 들어 유현이 향한 재단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쪽의 싸움은 끝났다. 너는 아직이냐?’
* * *
으드득!
인자해 보이는 태양신 라가 거대한 드래곤에게 물어 뜯겼다. 그는 경악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죽이는 백룡왕을 바라봤다.
“이, 내가, 지다니…….”
콰직!
백룡왕은 더는 그 말을 들어줄 가치가 없다는 듯 라의 머리를 깨물었다.
육신이 짜부라진 라는 신혈을 사방으로 뿌리며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대성군 드래고니카와 대성군 헤르모폴리스의 싸움은 드래고니카의 승리로 끝맺었다.
[전력 손실은?]
[적룡왕과 흑룡왕, 자룡왕이 죽었다. 그리고 청룡왕과 녹룡왕이 중상이로군.]
[남은 것은 황룡왕인 당신과 저뿐이군요.]
[그래. 헤르모폴리스는 전부 쓰러뜨렸지만, 아직 재단이 남아 있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소기의 목적은 이뤘습니다. 지금은 잠시 후퇴해서 전열을 재정비하죠.]
부상당한 다른 용왕들을 부축하며 백룡왕은 드래고니카 성령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알겠다고 답변하는 대답의 숫자가 적다.
대부분, 이 전장 위에서 죽은 것이다.
‘동포들이…….’
전쟁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가득 채우던 용 군단은, 이제는 확연히 그 규모가 보일 정도로 줄어 있었다.
자못 드래고니카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다른 대성군의 병사들도 숫자가 줄어 있었고, 살아 있는 자들도 대부분 지쳐서 가까스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는다. 혼성계에서의 전쟁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으니까.
죽어 버린 그들은 어디로 가고 또 어디로 향하는가.
하늘을 나는 백룡왕 샤루리엘의 눈동자가 재단으로 향했다.
이제는 6개까지 늘어나 버린 재단은 지금도 계속 엘로힘을 아래로 내보내고 있었다.
‘끝이 없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어.’
각 군단의 정예 병력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끼리의 싸움은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이 로고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격렬한 싸움으로 이쪽의 힘과 전력은 상당수 소모됐지만, 엘로힘은 계속 추가된다.
그렇다고 이쪽이 이렇다 할 조취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이 이 현실의 잔혹함이 아닐까.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열쇠는, 오로지 강유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니 제발. 어서 이 싸움을 끝내 주라고.
샤루리엘을 비롯한 연합군의 모두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 * *
[뭐지?]
로고스는 하르마게돈을 내려다보며 자꾸 드는 이상한 기분에 의문을 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불안감.
세상의 절대자, 이 세계의 창조주인 그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로고스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모든 것이 그의 통제하에 흘러가는 세상에서, 그가 절대로 불안해하는 일은 벌어질 리가 없다.
그랬어야 하는데.
‘뭐지? 상황은 분명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저 아래의 반역자 놈들은 전부 이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그들이 자신의 뜻에 거역하는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 불안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번 우주가 끝나고 새 우주를 창조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손을 봐야겠어.’
이번 우주의 의외성이 너무 컸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이런 의외성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에 필요한 요소이기에 그것을 차용했을 뿐.
하지만 스스로가 의외성이나 오류를 다루는 법을 모르기에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 힘을 자신에게 쓰라고.
결국은 거부당하고, 어쩔 수 없이 유현을 직접 코덱스에 집어넣어 분해했다.
녀석의 의외성은 분명 필요한 것이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좋지 않았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코덱스에, 유현의 의외성은 이른바 불량 식품 같은 거다.
그것을 코덱스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크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고작 인간 하나가 지닌 가능성일 뿐이라고 가볍게 일축했다. 코덱스에 쌓여 온 온 우주의 역사의 앞에서 유현 하나의 이야기는 태양 앞의 반딧불이조차 되지 못한다.
분명, 녀석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코덱스의 일부가 됐을 거다.
그래. 그랬어야 했다.
“놀랐나?”
로고스의 앞.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백지의 위에 검은 글자들이 모이더니 유현이 밑에서 솟아났다.
그 믿기지 않는 현실이, 로고스를 처음으로 당혹게 만들었다.
[너…….]
“신기하지? 내가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왔는지, 왜 내가 멀쩡한 건지.”
[대체, 뭘 한 거냐. 너는 분명 코덱스에 분해돼서 사라졌어야 할 텐데.]
“그러게. 나는 대체 뭘 했을까.”
그저 앞만 보고 계속 달렸다.
모두의 염원을, 바람을 등에 업고. 자신이 정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다.
계속. 계속.
달렸던 것이다.
“로고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구나.”
[감정의 동요라고? 지금, 피조물인 네가 날 도발하려는 거냐?]
“숨겨도 소용없어. 너, 지금 엄청 놀라고 있잖아.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왜냐고?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거든.”
예상하지 못한 일.
이 세상의 창조주인 로고스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래.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너는 분명 세상을 창조하고, 성령들도 제멋대로 주무르는 절대자인데, 그런 것치고는 정말 뭐든지 할 수는 없었단 말이지.”
그가 정말로 전능하거나 전지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것도 알고 있었어야 했고 그것을 미연에 막을 수 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코덱스를 이용해서 궁극의 이야기를 만드는 이런 거창한 과정을 겪을 필요도 없었다.
분명 로고스는 강하지만, 그가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었다.
[뭘 멋대로 떠드는 거지? 고작 거기서 한 번 빠져나왔다고 자기가 뭐라도 된 것마냥 기고만장해진 건가?]
로고스가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죽어.
살의를 담은 그 한마디가, 이윽고 세계를 흔들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새하얀 도화지 위를 내달리며 유현의 목을 향했다.
하지만 유현은 그걸 알면서도 자리에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촤아악───!!!
기운이 흩어진다.
유현의 목숨을 노리던 로고스의 공격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서 사라졌다.
[방금 뭘 한 거지?]
로고스는 보았다. 유현이 조금 전 자신과 ‘같은’ 힘을 사용한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은 그의 세계다. 이 새하얀 종이 위가, 그가 모든 것을 적어 나가는 세계였다.
이곳에선 그는 이 우주의 작가이며 창조주였다.
그런데 고작 인간이, 엑스트라밖에 되지 못한 녀석이 자신과 같은 힘을 사용하다니.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현의 발아래로, 검은 잉크가 거미줄처럼 퍼졌다.
점점 세력을 넓혀 가는 잉크가 닿을 때마다, 새하얀 종이가 가뭄의 논밭처럼 쩍쩍 갈라지더니 이윽고 허공으로 하나둘 떠올랐다.
거대한 종이에서 갈라져 나온 파편은 이윽고 무수한 책들이 됐다.
[지금 뭘 하는 거야!]
“원래부터 이랬어야 하는 일.”
로고스가 그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며 다시 공격을 날렸지만, 유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무수한 책들은 오히려 로고스의 기운을 튕겨 냈다.
[웃기지 마! 여긴 내 세상이다! 이건 전부 나의 것이라고! 오직 나만, 코덱스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단 말이야!]
“궁극의 이야기를 만들려는 녀석이 그것도 몰랐어?”
[뭐라고?]
“너는 말로만 완벽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거기에 매몰돼서 지나치게 완벽함만 추구했지.”
억지로 세상을 정해진 순간마다 되돌려서 리셋시키는 것은, 로고스가 그 이후의 것을 감당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는, 그렇기에 완벽함에 걸맞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로고스는 자신을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것을 불완전한 것으로 놓고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로고스는 세상에 완벽함은 존재할 거라고, 이런 것을 수천, 수만, 수억 번을 반복하면 찾게 될 거라고 믿었다.
멍청하게도.
“이 세상은 너 하나가 집필하는 한 권의 책이 아니야.”
새하얀 종이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무수한 책이 대신한다.
이 거대한 종이를 구성하고 있던 것들은 전부 누군가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책들이었다.
지금까지의 우주, 그곳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이고 뭉치며, 하나둘 쌓이고 쌓이며 만들어진 것이 바로 코덱스다.
로고스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
유현이 벌인 짓은 정말 별것 없었다.
그저 로고스의 억압에서 하나 된 이야기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뿐.
[아니야! 그런 건, 절대로 내 궁극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너는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세상에 정말 완벽한 이야기라는 건 없어.”
로고스라는 이름은 결국 하늘의 이치다.
진리는 절대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다. 풀 수 없는 문제, 각종 모순들, 불가능한 이론들. 그것은 절대 ‘완벽’한 것이 아니니까.
그가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진리란 언제나 완벽하고, 아주 약간의 흠결도 용납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틀렸던 거야.”
점점 세력을 넓혀 가는 책은 어느덧 로고스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로고스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주위로 책들이 넘실거린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궁극의 이야기는, 네가 가장 싫어하던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거라고.”
[…….]
로고스는 점점 사라지는 자신의 양 손끝을 바라봤다.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었던 그의 존재가, 가루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군.]
완벽함이라는 순백만 추구하던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오류가 스며든다.
그것이 마치 바이러스처럼 육신을 좀먹으며 없애 버리고 있었다.
본질이 뒤틀린 그의 존재가 점차 사라져만 간다.
[내가 그토록 찾던 완벽함이, 이 불완전함에 있었다니.]
그가 추구하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그렇기에 그토록 없애고자 했던 것.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가.
로고스는 유현이 파편의 힘으로 사용하던 가면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포리아(Aporia).
모든 난제와 모순을 뜻하는 단어.
그것은 자신(Logos)을 죽이는 독이었으며. 자신의 모든 비원을 해결해 주는 마지막 단서이기도 했다.
[이렇게 죽는 것도 결국 자업자득이겠지. 그러니, 다음의 이야기는 네가 이어 나가라. 내 모든 자격을, 네가 이어받는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로고스는 완전히 소멸했다.
거대한 생물을 죽이는 것은 그에 걸맞은 덩치를 지닌 생물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자그마한 독.
그것이야말로 포식자를 죽이는 가장 최강의 무기였다.
완벽을 추구했던 로고스에게, 세상의 모든 모순과 오류는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극독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이제 이 싸움은 끝났다.
유현은 팔을 뻗어, 허공에 떠다니는 모든 책을 움직였다.
* * *
“버텨라! 필사적으로 버텨!”
“방어선을 유지해라. 우리의 목적은 놈들을 막는 것이다!”
지휘관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재단에서 내려오는 엘로힘과, 재단 자체가 쏘아 내는 무수한 포격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지만.
아직도 연합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고 있었다.
흘리는 피는 모두 텍스트가 되어 사라지고, 땀범벅에 모래투성이가 되면서도.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어 싸우는 것은 강혜림, 권지아, 서수민, 유영민도 마찬가지였다.
“힘내!”
권지아가 비틀거리는 강혜림의 어깨를 부축해 준다.
그들의 뒤에서 기습을 가하는 엘로힘을, 유영민의 총이 요격한다.
유영민을 노리는 붉은 창을 서수민이 튕겨 냈다.
서로 한 몸처럼 움직이며 싸우는 그들.
이렇게 함께 싸우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유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모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어, 어어? 저기 봐!”
전쟁이 점점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순간, 누군가 재단의 이상 현상을 발견했다.
“재단이, 멈췄다?”
“재단만 멈춘 게 아니야. 엘로힘까지, 전부 멈췄어.”
끝없는 공세를 쏟아붓던 엘로힘들이 전지가 다한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파스스.
엘로힘이 순식간에 활자로 변해 사라졌다.
연합군 모두가 눈을 멍하니 뜬 채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엘로힘도, 제단도, 집정관도 모두 사라졌다.
재단이 드리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하르마게돈을 이루던 사막의 모래마저 사라지며.
주위로 새하얀 글자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새까맣던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며 따스한 빛이 내려왔다.
마치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듯이.
“이, 이겼다!”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소음은 바람을 타고, 또 글자를 타고 퍼져 나갔다.
“이겼어? 진짜?”
“이런 제길! 살았다! 우린 살았어!”
“해냈어! 구세주가 해냈다고!”
와아아아아!
뒤이은 승리를 축하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눈물의 갈채가 퍼지고 모두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많은 희생이 있었고, 셀 수도 없는 전우들이 죽었다. 분명 그것은 슬퍼할 일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축하하고 있었다.
“유현 씨가, 유현 씨가 정말로 해냈어.”
백화 매니지먼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났다.
기적적으로 그들 중 누구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냈어! 정말로 해냈다고!”
권지아도 느꼈다. 자신의 안쪽에 자리 잡은 책갈피의 저주가 사라진 것을. 그것은 책갈피의 주인인 로고스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토록 바라던 굴레로부터의 해방. 권지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니 이제 순수하게 승리를 축하해도 됐다.
모두가 다시 모일 수 있었다.
“유현 씨는?”
강혜림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강유현의 행방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그 날.
신화급 대전쟁이자 창조주에게 항거하고자 한 독립 투쟁.
그 싸움이 승리로 끝난 날.
유현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