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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448화 (448/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448화

“누구지?”

“그러게. 내가 누구일까. 어디 한번 맞춰 봐.”

고개를 들어올린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했는데, 유난히도 내게 말을 건 사람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녀석은 나를 닮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는 말 그대로 나였다.

하지만 놈은 내가 아니었다.

“뭐야. 넌, 누구야.”

“섭섭한걸. 지금까지 계속 함께 있었으면서 아직도 나를 몰라?”

“계속 함께 있었다고?”

“떠올려 봐. 네가 죽고 나서 텔러로 다시 시작했을 때. 그리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단 한 번도 너와 떨어진 적이 없던 게 과연 누가 있는지.”

멈춰 버린 사고를 가동한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굴리며, 눈앞의 나와 닮은 녀석의 정체가 무엇인지 유추한다.

녀석은 이미 힌트를 충분히 줬다. 텔러로 시작 했을 때부터 함께했다고 했으니, 선택지의 폭은 엄청나게 좁혀졌다.

사실상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너, 설마 코덱스의 파편이냐?”

“정답이다.”

녀석은 나를 보며 웃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로. 그 모습에 은근 재수 없음을 느끼면서도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코덱스의 파편이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이게 대체 어쩐 일이지? 설마 로고스가 일부러 녀석을 보낸 건가?

어쩌면 미처 회수를 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에게 남아 있던 녀석이, 내 생명이 끝을 알리니까 모습을 드러낸 것이겠지.

약간의 놀라움은 느꼈지만, 그 이상까지 감정이 동요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이미 다 끝났는데.”

“끝이라고?”

“그래. 끝.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렇다면 여간 실망이 아닌데. 너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지?”

내 폐부에 비수를 꽂는 것 같은 그 질문이, 순간이지만 내게 짜증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시끄러워. 어차피 너는 로고스가 만든 책의 파편이잖아. 잠자코 네 주인에게 돌아가. 아니면, 날 놀리려고 찾아온 거냐? 같잖은 것이 자신의 옛 주인 행세를 한 것이 꼴사나워서?”

“주인이라.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너도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이런 곳에서 네 앞에 나타났는지.”

“관심 없어.”

“상당히 꼬인 대답이네. 그래도 궁금하잖아?”

녀석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파편은 나를 끝까지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았다.

마치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너는 누구보다도 탐구심이 깊고 호기심이 강한 녀석이니까.”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거야.”

“많이 알지.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한 비운의 엑스트라. 모두가 바라보는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의 위. 그곳에서 진짜 네 자신을 보여 주고 싶어 한 몽상가.”

“……!”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전부 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구원자. 명계의 해방자. 무한회귀자의 마음을 이해해 준 남자.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승진한 텔러. 바다의 악마를 쓰러뜨린 작살잡이.”

“너…….”

내가 아는 나.

나조차도 모르는 나.

그 모든 이야기가, 이제는 어둠에 흡수되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위대한 기사의 종자. 그리고 그의 의지를 이어받은 마지막 기사. 얼어붙은 행성에 봄을 가져다 준 구원자. 군주의 압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 책더미 군주.”

“…….”

“전부 너잖아.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고스에게 맞서기 위한 세계의 구세주까지.”

“나는, 구세주 따위가 아니야.”

이 꼴을 봐.

나는 로고스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이런 비참한 모습의 어디가 구세주라는 거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로고스가 만든 이 검은 세계 하나 벗어나지 못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애초에 이 세상에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는 건가?

사실 지금 내가 겪는 이 과정조차도, 로고스가 집필하는 책의 내용이라면.

내가 해 온 모든 노력은 대체 뭐가 되는 거지?

나는 이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래서 포기한다고?”

“안 되는 일을 안 된다고 할 뿐이야.”

“과연 안 되는 일일까?”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그저 진짜 현실을 보라는 거지.”

파편의 말에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지만, 녀석은 겉모습만 나와 같지 성격은 정반대인 것처럼 사람 좋게 웃었다.

뚜벅 뚜벅.

녀석이 내 주위를 걸을 때마다 구두 소리가 났다.

“나는 분명 코덱스의 파편에 지나지 않아. 로고스가 집필한 한 권의 책, 그중 한 페이지에서 떨어져 나온 자그마한 조각에 불과하지. 책의 주인인 로고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어쩌면 네 말마따나 당장 로고스에게 돌아가게 될지도 몰라.”

지금도 로고스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녀석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래도 나는 네 앞에 왔어. 로고스가 시켜서도 아닌, 내 자신의 의지로.”

“…….”

“눈빛으로 묻고 있군. 왜냐고? 글쎄. 왜일까. 나는 왜 나를 만든 주인인 로고스를 버리고, 이런 곳에서 다 죽어 가는 너를 만나러 온 걸까.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인데.”

아니,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닌가.

녀석은 자신의 처지가 웃기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 유현. 나는 네 이야기가 좋았어.”

파편으로서, 만들어진 존재로서 허락되지 않은 말들을.

“우리 파편들의 목표는 자신에게 걸맞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선하고 악하고는 따지지 않아. 그게 당연하니까. 우리에겐 좋은 걸 좋다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거든.”

모든 파편은 이야기를 모으고 만들고, 결국에 다시 코덱스에 귀의되기 위해 존재한다.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가 되어 사라지길 위해 태어난다.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게 만들어졌으니까.

파편에 존재하는 의지란 결국 이야기를 찾는 것이 전부였다.

“난 말이지. 네 이야기를 보면서 ‘좋다’라고 생각해 버렸어. 네가 보여 주는 이야기가 멋있다고, 또 그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보여 줄지 기대했지. 보통은 허락되지 않아야 할 오류가, 나한테 발생한 거야.”

당장에 회수돼서 폐기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너에게 그런 영향을 받게 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나는, 아니 어쩌면 우리는…… 너 같은 사람을 만나길 원했던 걸지도 몰라.”

“나 같은…… 사람?”

“어떤 위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그런 바보 같은 사람.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았어. 그래서 로고스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네가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뭔지 보고 싶거든.”

“뭐야 그게.”

바보 같잖아.

나 보고 바보 같다면서, 정작 본인이 제일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잖아.

“그런가? 어쩌면 너의 그 바보 같은 용기에 내가 감화된 걸지도 모르지.”

시끄러워. 뭘 멋대로 떠드는 거야.

도우러 와 봤자, 너 혼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너 혼자서 어떻게 나를 돕겠다는 건데.

“아니. 혼자가 아니야.”

혼자가 아니라고?

“잊었어? 나는 지금까지 네가 겪어 온 모든 이야기를 봐 왔어.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있지. 나는 책. 네가 모두를 볼 수 있는 책이고, 너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책이야. 그리고 책의 안쪽에는, 여러 이야기가 적혀 있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말하자면 이런 거야.”

파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누군가 한 걸음, 내게 다가온다.

“산초. 이런 곳에서 쭈그리고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기사님?”

나에게 마지막 기사의 이야기를 건네주었던, 누구보다 꿈을 안고 나아가던 기사 돈키호테.

그 촌스러운 갑옷도, 그리고 길게 기른 새하얀 수염까지도.

똑같다. 내 기억 속에 있던 남자와.

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어떻게라니. 산초. 그대는 나와의 약속을 잊은 건가? 내가 말해 준 로만세를, 벌써 잊어버리고 만 건가?”

“저는, 그게…….”

“산초. 너는 마지막 기사다. 이 세계에 남겨진 최후의 기사인 것이야. 내 너에게 모든 것을 맡겼거늘, 이 무슨 실망스러운 모습이란 말이냐.”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힌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해야겠지.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고, 그것을 고치려 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 최대의 미덕이니까. 그러니 말이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겠느냐?”

“기사님……?”

“널 보러 온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내 주위로 하나둘, 누군가가 다가온다.

그들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입니다. 구원자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마지막 황제, 드라가시스.

“허. 그때의 멋진 바다의 남자는 어딜 가고 여기 쭈그려 앉은 패배자만 있는 거냐?”

“시끄럽다, 야만적인 놈. 사람은 누구나 지치면 앉아서 쉴 때가 있는 법이야.”

바다의 낭만가 에이허브 선장과 노틸러스의 네모 함장님.

“하하하! 그 가녀린 여자의 몸속에 이런 모습이 있었다는 건가? 이거 재밌군!”

얼어붙은 행성 글라칼리스의 마지막 황제인 프리첸.

“오빠.”

“서하……야?”

마지막으로 강서하까지.

모두, 대체 여기에 어떻게…….

“전부 널 보러 온 거야.”

그 중심에서, 파편이 내게 손을 내민다.

“네가 이들을 구원했듯이, 여기 있는 모두가 널 돕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어.”

“나를, 도우러 왔다고……?”

“그래.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어서 일어나.”

가슴이 복받친다. 모두가 내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켜 준다.

손끝에 닿는 그 따스한 온기가, 그들이 환각 따위가 아닌 진짜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따스함이 느껴진다.

어둠에 빼앗겨 버린 이야기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왜 이제야 떠올린 걸까.

잃고 싶지 않았던 것. 하지만 결국에 잊어버렸던 것.

누군가의 이야기란, 이렇게나 가슴이 따뜻해진다는 걸, 나는 이 먼 길을 돌아와서 다시 깨닫게 된 거다.

파편이 나를 보며 말한다.

“이제 떠날 시간이야.”

“…….”

대답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발을 내디뎠다.

“가거라 산초! 네 손으로 별을 거머쥐어라!”

기사님의 손이 내 등을 밀어 준다.

“하하! 사나이답게 가라고! 너는 누가 뭐래도, 그 모비딕을 쓰러뜨린 바다의 사나이니까!”

“내 손주와의 만남을 이뤄 줘서 고마웠다.”

에이허브 선장님과 네모 함장님의 목소리가 다리에 힘을 실어 준다.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모두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봐. 언제까지 미적대고 있을 거야? 목표가 코앞이잖아? 그러니까 어서 가라고.”

드라가시스가 응원을 해 주고, 프리첸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게 격려를 건넨다.

그리고.

“가세요. 오빠.”

서하가. 내 손에 죽었던 그 가여운 아이가.

내 손을 잡아 끌어 주고 있었다.

“오빠가 바라는 것을 꼭 이루세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을 놓아 주었다.

몸이 저절로 앞으로 향한다. 내 의지에 상관없이,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듯.

그렇게 나는 달렸다.

두 팔을 휘저으며, 숨을 헐떡이며, 멈추었던 몸을 움직였다.

하나둘.

소중했던 기억들의 사람들이 나의 뒤로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둘 어둠 너머로 사라진다.

“힘내. 내 오랜 친구여.”

마지막에 들리는 것은 파편의 작별 인사.

그저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던 파편은, 나와 함께하고 내 이야기를 보며,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 줬던 걸까.

타악.

달린다. 근육에 억지로 힘을 짜내고, 팔을 휘두르며 달린다.

모두 어떻게 됐을까.

문득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른다.

돌아보면 안 된다. 멈추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순간이지만 쉬고 싶다고 생각했고, 반쯤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다.

지쳤다고. 그래서 쉬고 싶다고.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라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하아. 하아.”

어둠 속을 달린다. 한 번 멈춰 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인다.

이제 멈출 수 없다.

멈추고 싶어도 멈춰선 안 된다.

내가 걸어왔던 모든 길이.

내가 만나 왔던 그 많은 인연이.

지금도 계속 내 등을 밀어 주고 있으니까.

“하아. 하아.”

이 끝없는 어둠조차도, 단지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두려움을 버리고 이런 세계조차 받아들인다.

세상의 빛이 아닌, 어둠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것을 내치지 않는다.

그러자 변화가 생겼다.

뼈를 얼릴 것 같은 냉기가 가라앉고, 대신하는 것은 따스한 온기.

‘이곳은 누군가를 잡아먹기 위한 세계가 아니야.’

달리는 걸 멈추지 않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라 생각했던 공간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름답다.’

그것은 세계를 가득 메우는 별무리였다.

광활한 우주에 새겨진 은빛.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항성의 잔해들.

모래처럼 작은 가루가 수만 수억 개가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명화였다

무사히 이어진 별들의 흔적은 하나의 흐름을 그렸다.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현재부터 미래까지.

모든 별은 미래로 나아갔다.

‘그렇구나.’

이곳은 지난 모든 세월, 모든 우주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세상의 흐름 속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늘 우리와 함께했던 것이다.

어둡고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눈동자를 수놓은 수많은 별처럼

그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거다.

이 모든 별이 오랜 역사와 세월이 차곡차곡 쌓아 놓은,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였다.

그러니까 가자.

내겐 아직 보여 줘야 할 이야기가 있다.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나와 함께하지 못하고 저 뒤에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새롭게 만나게 될 사람들까지.

그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아가자.

이 이야기의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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