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44화
하늘에 무수한 낙뢰가 떨어진다.
그냥 평범한 번개도 아닌 제우스의 진심이 담긴 공격. 강혜림이라 하더라도 이건 피할 수 없었다.
‘그래. 피하는 거라면 말이지.’
그녀의 등을 받쳐 주는 온기가 느껴진다. 동시에 시야가 빠르게 회전했다.
몸을 강하게 당기는 느낌과 함께 그녀의 위치가 변한다.
미카엘의 날개가 그녀를 지켜 주며, 제우스가 내리는 천벌이라는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곳까지 움직이게 해 줬다.
‘빨라.’
시야가 휙휙 바뀌고 하늘과 땅이 수차례 뒤집힌다.
그녀가 이카루스의 날개를 썼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고속 비행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어떻게든 위험한 번개들만 검으로 쳐내는 것이 고작.
뇌신지화를 사용했을 때 이보다 더 빨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 있었구나.
“정신 차리세요. 당신이 기절하면 여기서 전부 끝입니다.”
“알고, 있어요.”
울렁거리는 속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답했다.
그녀도 안다. 미카엘의 도움을 받고 있는 지금이, 겨우 제우스와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했다는 것을.
기동력과 방어는 미카엘에게 맞기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검을 휘두르는 것뿐.
고작 그런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야, 무슨 면목으로 유현을 다시 보란 말인가.
“아.”
한계까지 내몰린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 강혜림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유현 씨 보고 싶다.”
“그 남자를, 그렇게 보고 싶어요?”
“네. 보고 싶어요.”
솔직한 심정으로, 보고 싶다는 것에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만나면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에게 만나서 기뻤다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그 남자와 손을 잡고 싶고, 그 남자와 함께 살고 싶었다.
예전처럼, 장난도 치고 싶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약속했으니까.
이 싸움이 끝나면, 다시 예전처럼 어디 놀러 가자고.
굳이 간다면, 이번에는 멋진 바다가 보이는 곳이 좋을 거라고.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겠죠?”
“……아니요. 그러지 않습니다.”
미카엘은 어딘가 착 감긴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은, 분명 다시 나아질 수 있는 미래가 있어요.”
“그럴까요?”
“네. 물론이죠. 저는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진짜 행복이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지만…… 적어도 당신은 다르니까요.”
“저도 다시, 유현 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미카엘과 다르게 강혜림은 자신이 뭘 소중히 여기는지 잘 알았다.
그것을 잊지도 않고, 소중한 것을 위해 싸우고자 검을 들었다. 죽음은 이미 각오했다.
미카엘은 그런 강혜림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위해 싸우자. 죽은 사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자.
이제는 사라진 세계의 잔재인 자신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한 불꽃이 되는 거다.
“그러니 오직 눈앞의 적을 베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미카엘님은…….”
“저는 괜찮으니까요.”
강혜림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미카엘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은 진작 꿰차고 있었다.
그래도 묻지 못한 것은 상황이 그럴 시간을 주지 않을 정도로 긴박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카엘이 그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이서 무슨 수다를 떨고 있는 거지?”
번개를 휘감은 제우스가 무수한 번개의 창을 날렸다.
전후좌우 할 것 없이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며, 회피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날아오는 거대한 압박감.
미카엘은 남은 한 쌍의 날개에 힘을 실어 제우스의 공격을 방어했다.
“하하. 대천사 미카엘. 자랑스럽던 12장의 날개는 어디로 가고, 이제 고작 한 쌍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 가련하구나. 고작 그 정도의 힘으로 내 번개를 막을 수 있다고 보나?”
제우스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미카엘은 이를 악물고 최대 속도로 날아올랐다. 목표는 당연히 제우스의 지근거리.
거리를 벌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아스트라페를 사용하는 제우스는 수천 킬로미터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상대의 정수리에 번개를 떨어뜨릴 수 있다.
승부를 내려면 검이 닿을 때까지 거리를 좁혀야 했다.
‘기회는, 제우스가 방심을 하고 있는 지금.’
제우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이쪽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공격은 하고 있지 않았다.
아마 강혜림이 죽는 것은 원치 않은 거겠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손대중은 하겠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만용이었지만, 그게 또 가장 제우스답다면 제우스다웠다.
덕분에 이쪽은 삶의 유예를 얻게 됐다.
적의 저급한 욕망으로 인해 받게 된 자비라니. 정말 곧 죽어도 싫은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이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갑니다. 꽉 잡으세요. 이번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를 겁니다.”
“네.”
경고와 함께 미카엘의 두 날개가 한계를 넘어 찬란하게 빛났다.
제우스가 내뿜는 뇌전의 창들보다도 훨씬 더 밝게.
“무슨…… 미치기라도 한 거냐?”
제우스는 지금 미카엘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미카엘은 지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연료로 삼아 가며 생명을 불태우고 있었다.
1세대 성령이, 고작 인간 하나를 지원해 주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기이한 상황.
제우스조차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현실에, 미카엘은 작게 웃었다.
“미카엘 씨.”
“쉿.”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는 강혜림에게 미카엘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당신은 실패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녀는 곧 빛으로 화해 자신의 날개와 동화됐다.
미래를 열기 위해서, 과거의 것인 자신은 이제 사라지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 마지막의 모든 것을 불태워서 미래를 여는 초석이 되기로 다짐했다.
태우자. 내 모든 이야기를. 내 삶을. 그리고 내 영혼을.
뜨겁게 타오르자.
재조차 남기지 말고.
촤아악!
새하얀 천사의 날개를 넘어, 무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강혜림의 등에 자리 잡는다.
미카엘은 사라져 가는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며 강혜림의 등을 떠밀었다.
“가세요.”
내 역할은 이제 이걸로 끝이야.
한 줄기 섬광으로 변해 쏘아지는 강혜림의 뒷모습을 보며, 미카엘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저도 이제 따라갈게요. 사탄.”
아니, 내 사랑.
* * *
강혜림은 검을 뻗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빛. 어쩌면 다른 무언가.
인지를 초월한 속도 때문에 오감으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상태로, 제대로 된 검을 내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검을 휘두른다.
오감이 아닌, 단 하나의 제 육감에 의존해서.
‘그렇구나.’
강혜림은 어디에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았다.
새하얀 세계의 저 너머, 보란 듯이 찍혀 있는 저 검은 점.
무인이 극한까지 집중력을 끌어 올리고 자신의 벽을 넘었을 때, 언뜻 볼 수 있다는 ‘인지 너머의 세계.’
강혜림은 그 세상을 엿보고, 그 세상을 통해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무슨……!”
제우스는 황급히 번개의 창을 쏘아 냈지만, 강혜림의 움직임은 빠르다. 미카엘이 자신의 목숨을 태워 가며 만들어 준 빛의 날개. 그것이 펼쳐지며 내지르는 속도는, 번개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강혜림을 막기 위해 손을 뻗어 본다. 위기감 때문에 자세도 뭣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본능적인 움직임.
동시에 시야에 보이던 강혜림이 사라졌다.
따끔.
제우스는 자신의 목에 묘한 이질감이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내가…… 졌다고?”
시야가 뒤집어진다.
떨어지는 머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검을 휘두른 자세에서 멈춘 강혜림의 뒷모습.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는 그 뒷모습조차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제우스는 죽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제우스의 의식은 거기서 끝났다.
* * *
권지아와 싸우던 오딘은 제우스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제우스? 설마…… 이 멍청한 녀석. 고작 인간에게 죽은 건가?”
녀석이 여자만 밝히는 무뢰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그 실력만큼은 대성군의 주신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죽었다는 것은, 인간을 상대로 패배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도 나름 급은 맞는 찬탈자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그뿐이었다는 건가.”
실력이 뒷받침되더라도 인성이 그러니 결국 인간 따위에게 죽는 거다.
“제우스가 죽었군.”
권지아가 오딘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짐승의 귀와 꼬리를 달았지만, 포악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뇌쇄적인 미소가 오딘을 향한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결국 이런 꼴이네. 거 봐. 제우스도 그랬으니 너도 다를 것 없어.”
“……나는 다르다. 그런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과 비교하지 마.”
“애써 아닌 척은 해도, 솔직히 오딘도 신화 속에서 나름 쫌생이인 걸로 유명하잖아?”
“웃기지 마라!”
오딘이 창을 휘두르자 권지아는 뒤로 크게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제우스가 죽은 것이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 도발이 제대로 먹혀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진심으로, 올 생각이로군.”
권지아는 괜히 도발을 했나 하고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숨기고 있던 패를 모두 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진짜. 이거 사용하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은데.
“그렇다고 진짜 죽을 수는 없겠지.”
각오를 끝마친 권지아는 펜릴의 힘과 짐승의 힘을 모두 개방했다.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며 전신의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송곳니가 길어지며 이빨이 더욱 날카롭게 솟았고, 두 손과 발은 짐승의 그것처럼 발톱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자세도 낮아져서 이제는 두 다리로 서지도 않고 네 발로 납작 엎드렸다.
“숨겨 둔 패라는 것이 그거냐? 짐승이 되어 네 발로 기는 것이? 우습구나!”
오딘의 왼쪽 눈의 안개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이윽고 오딘의 머리 위에 거대한 마법진으로 변했다. 오른손에 쥐어진 신창 궁니르가 마법진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간다.
궁니르는 던지는 순간 상대를 반드시 꿰뚫는 인지를 초월한 무기.
그것을 마법진의 중심에 장착해, 거대한 대포처럼 만들었다.
번쩍!
오딘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마법진에서 십자가 형태의 섬광이 시곗바늘처럼 회전했다.
권지아는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직후 그녀가 웅크리고 있던 자리에 궁니르가 날아와 박혔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지면에 동그랗게 터널이 뻥 뚫렸다. 얼마나 위력이 강했는지 지면에 뚫린 구멍의 단면이 매끈하게 녹아내려 있었다.
‘이것이, 신창 궁니르. 한 번만 맞아도 끝이다.’
하지만, 궁니르는 목표를 맞추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 지하 수십 킬로미터까지 뚫린 구멍 속에서 다시 붉은 섬광이 튀어나왔다.
권지아는 허공에서 재차 몸을 틀었다. 몸을 받쳐 줄 땅도 없는데, 그녀는 마치 허공에 발판이 있기라도 한 듯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런 권지아의 뒤를 궁니르가 집요하게 쫓았다. 오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인지를 초월한 속도의 창을 피하고 있다? 빨라서 그런 것이 아니야. 동물적인 직감으로 미리 궤도를 읽고 피하고 있는 거다.’
과연. 괜히 짐승처럼 변했다는 건 아니라 이건가.
그래도 상관없다.
“내 창은 심장이 꿰뚫리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과연 언제까지 이 공격을 피할 수 있을까?”
오딘의 조롱에도 권지아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를 빠르게 오딘의 위치를 쫓았다.
그녀의 몸이 스프링처럼 탄력을 받으며 오딘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런 권지아의 뒤를 궁니르가 빠르게 뒤쫓았다.
“설마, 내 창을 이용해서 나를 대신 요격하겠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한 거라면 큰 착각이다.
오딘이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려 가볍게 까닥였다. 권지아의 뒤를 쫓던 궁니르가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재차 오딘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던진 창을 회수하는 것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
권지아가 지척까지 접근해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궁니르가 재차 쏘아진다.
이번에는 절대 피하지 못하고 검으로 막을 수도 없다. 직감으로 느낀다 해도, 이미 한참 늦었다.
“꿰뚫려, 죽어라.”
푸욱!
쏘아진 궁니르가 권지아의 몸에 적중했다. 동시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오딘은 그 모습을 보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으려다,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분명 미간을 뚫었다고 생각했는데, 궁니르가 뚫은 것은 권지아의 양 팔뚝이었다.
그 때문에 방향이 틀어진 궁니르는 권지아의 미간이 아닌, 양 팔뚝과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죽음을 피했나? 아니. 상관없다. 바로 죽이지 못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어차피 두 팔이 저런 꼴이어서야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 리가…….’
이쪽이 할 일은 그저 상처 입은 짐승을 정성 들여 사냥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오딘의 예상을 뛰어넘듯, 권지아의 움직임은 궁니르에 꿰뚫리고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온다고?’
이미 치명상을 입었는데,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하려고.
이쪽을 향해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권지아의 모습을 본 오딘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손에 검을 들고 있지 않아.’
피를 흘리며 X자로 교차한 두 손의 어디에도 그녀가 사용하던 검은 들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검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 순간, 권지아의 양팔이 풀어지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을…… 입으로!’
오딘의 생각은 거기까지 이어졌다.
입으로 검을 물고 있던 권지아가 그대로 오딘의 나머지 한쪽 눈을 베어 버렸으니까.
시야가 사라지고 격통이 내달린다. 오딘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감히! 감히 인간 따위가!”
“보이지 않으면, 그 잘난 창으로도 나를 노릴 수 없겠지.”
입에 문 검을 뱉은 권지아는 지상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오딘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득!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오딘의 목을 물어뜯었다.
“크르륵. 이, 이 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발버둥 치던 오딘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권지아에게 그 목숨을 내주고 말았다.
새하얀 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이윽고 오딘은 피와 함께 시체가 텍스트로 변해 흩어졌다.
“퉤.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맛도 없는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