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40화
유현은 백련에 머금은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개방했다.
단 3할의 위력으로 물경 수백이 넘는 성령들을 일시에 쓰러뜨렸다. 이제 남은 7할의 힘을 모두 쏟아 낸다.
단순한 수치만 따지면 위력은 그때의 2.3배 이상.
동시에 수백을 상대로 펼쳤을 때와 다르게, 오직 한 존재만을 죽이기 위해 한계까지 압축됐기 때문에 힘의 밀집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어디 네가 그토록 무시했던 피조물에게 죽어 봐.”
백련의 전력 개방으로는 부족하다. 로고스가 고작 이런 것에 쓰러질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유현의 얼굴 위로 아포리아의 가면이 씌워졌다. 네 개의 눈동자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오며 네 악마의 힘이 백련에 실렸다.
신화급 무구를 하나로 모은 압축된 이야기와, 거기에 덧씌워진 아포리아의 악마의 이야기.
‘하나 더.’
전쟁이 시작하기 전 성령들은 무기만 넘겨준 것이 아니었다.
각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것들만 유현에게 건네주었다.
[숙명통] [화안금정] [지권인] [옥경산의 제신] [은팔의 광휘] [서방의 예소드] [기계장치의 사랑] [만마전의 건설자] [천둔검법] 등등.
이 외에 다수의 성령이 건네준 이야기.
도합 268개.
그 모든 것이 백련 하나에 모인다.
드드드드드.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흐름이 백련이라는 작은 검 하나에 모인다는 기적에 가까운 풍경.
살리오 제국의 정수가 담긴 무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재단이 나서서 살리오 제국을 지워 버린 이유, 그 천칭을 기울게 만든 결정적인 신화급 무구.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로고스의 목에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들이밀려 하고 있었다.
[호오?]
로고스는 유현이 기를 모으는 동안에도 아무런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해 볼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그의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보기까지 했다.
[그런가. 전부 없앴다고 생각했던 그 무구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백련을 보는 순간, 로고스는 저 검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읽어 냈다.
저 검은 지금 우주의 것이 아니다. 자신이 몇 번이고 폐기하고 없앴던 이전 우주, 거기로부터 쭈욱 남아서 이어져 온 부산물이었다.
파괴불가 때문이었나. 설마하니 우주의 소멸과 창세의 속에서도 검 한 자루 따위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저 검에 담겨 있는 미약한 흔적. 인간의 영혼이라도 박아 넣었던 건가?’
흥미롭다.
그렇다면 검안에 담겼던 영혼이 유현에게 검을 인도한 것인가.
게다가 유현이 사용하는 이야기 중 일부는, 전대 찬탈자이자 현재 신화급 책벌레로 불리는 존재들의 것도 몇 개 남아 있었다.
대부분 이야기 자체를 소멸시키는 책벌레의 특성상,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역이었을 터.
그 인고의 시간 끝에 대신 전달받은 것이 인간이라니.
‘지금의 우주뿐만이 아닌, 지난 스러진 우주의 존재들로부터 건네받은 업까지.’
그것이 자신의 목숨 줄을 노리려 하고 있다.
이런 위기감은 분명 초창기 코덱스를 집필하려 했을 때에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
‘즐겁군.’
자못 지루하기까지 한 이 과정에서 유현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 심심했던 삶에 뿌려지는 조미료였다.
그러니 지금도 저렇게 전력을 다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인간으로서 이 자리에 처음으로 도달한 존재가 어디까지 보여 줄 수 있는지.
자. 어서 보여라. 나를 더 즐겁게 만들어 봐라.
그런 기세가, 공간을 넘어 유현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여유가 네 목숨을 앗아 가는 거야.”
저쪽이 보란 듯이 공격을 허용해 주니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유현은 고마움을 느꼈다.
실전에서는 거의 선보일 수 없는 최강의 일격을, 가장 중요한 지금 이 순간에 펼칠 수 있게 됐으니까.
이야기의 응집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하나 된 힘을 단 하나의 목표에게 격발시키는 것.
극한까지 모여서 압축된 이야기는, 빛이 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로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는 빛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어떠한 때도 타지 않은 순백의 검.
유현은 그것을 들어, 로고스를 향해 찔러 넣었다.
[하하하! 와라!]
로고스는 기뻐하며 그것을 맞이했다.
모두의 염원이 담긴 일격이 로고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압축된 이야기가 폭발하듯 확장하며 검이 박혀 든 로고스의 내부를 갉아먹으며 집어삼켰다.
활자로 이루어진 새하얀 불길이 로고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유현은 그 힘의 폭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의 위력, 자신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하다.
[오오오. 이것이, 내게 소외당하고 버려진 자들이 하나로 모여서 만들어진 힘!]
로고스는 새하얀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다는 듯 몸을 뒤틀었다.
흔들거리는 그의 신형은 어쩌면 춤을 추는 것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저 일격으로 로고스는 죽을 테니…….
[정말 하잘것없구나.]
불꽃이 사라진다.
세상을 불태워도 이상할 게 없는 불꽃 속에서, 로고스는 어떠한 상처도 없이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
[이게 너희들이 말한 ‘모든 것’이 담긴 일격이냐?]
“어, 떻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로군. 그래. 그런 것도 당연하겠지. 너희들은 내가, 고작 너희들이 두렵기로서니 주기적으로 우주를 재시작했다고 생각하나? 진심으로?]
로고스는 분명 피조물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자리까지 올라오려고 하는 특이점이 도달했을 때마다 우주를 리셋 했다.
코덱스의 파편이 다 모이면 우주를 재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애초에 코덱스의 파편이 다 모이게 되는 순간은, 특이점에 도달했을 때에 맞춰 ‘로고스’가 직접 조정한 거였으니까.
[나는 단지 귀찮은 일을 처리하기 싫어서 그랬을 뿐. 고작 피조물 따위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런 과정을 반복한 게 아니야.]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네가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이 그걸 증명하거든. 나를 봐. 내가 다쳤다고 생각하나? 정말 그런 공격에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천만에!
로고스는 유현을 보란 듯이 비웃었다.
[이 세계는 내가 쓴 코덱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코덱스를 집필한 건 나다.]
그 손가락의 끝이 유현을 향한다.
[너는 한 자루의 검으로, 세계를 베어 버릴 수 있나? 단 일격으로 이 우주를 두 쪽 낼 수 있나?]
그것은 어떠한 비유적인 표현도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세상을 일격에 베어 낼 수 있는가.
세상이란 곧 우주다. 아무리 1세대 성령들이 힘을 합쳤다고 해도, 이 광활한 우주를 한 번에 일소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곧 세계다.]
거대한 세계를 상대로, 한 명의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그가 대단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이룩할 수 없는 업적을 지녔다 해도.
결국, 그것은 인간의 관점. 좋게 쳐도 성령들이 보는 관점이다.
세계의 시선으로 보면, 결국 그의 존재는 너무나도 미약하고 보잘것없었다.
[세계란 그런 것이다. 매정하고 잔혹하며 자비가 없지. 바라는 것은 오직 더 나은 안정된 세계를 위함일 뿐. 거기에 스러져 가는 존재들의 비명과 죽음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되는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오롯이 세계로서, 제 일을 할 뿐이니까.
[그러니 이번에 내가 너에게 진짜 힘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진짜 절망을.
* * *
“모두 버텨라! 버티면서 싸워라!”
“구세주가 재단의 안쪽으로 향했다! 로고스만 쓰러지면 이 전쟁도 이제 끝이다!”
“다들 함께 살아서 다음 미래로 나아가자!”
유현이 재단의 안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연합군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상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성공했으니, 작전의 과정으로 치면 거의 8할 가까이 완수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성령들로부터 힘을 이어받은 유현이 로고스를 쓰러뜨리는 것이 전부.
‘가능성이 있어.’
메피스토펠레스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로고스는 지금까지 우주를 몇 번이고 없애고 창조하며 시뮬레이션을 실행해 왔다.
그런 로고스가 우주를 끝내는 순간은 항상 비슷하게 정해져 있었다.
하계와 혼성계가 충돌하여 서로의 경계가 사라지고, 어느덧 하나가 되는 순간.
로고스는 그 순간을 반기지 않는 듯 편집증적으로 우주를 없애 왔다.
‘녀석은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혹시라도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과민 반응하는 걸 보면, 분명 그들이 인지하지 못한 먼 과거의 우주에 로고스의 자리를 위협한 존재가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로고스는 전능하지 않다. 그에게도 분명히 허점은 존재한다.
혼자 나서서 싸우려 하지 않고 찬탈자들을 이용하는 것도, 재단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앞잡이로 내세운 것도 전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일 터.
‘그러니 여기서 조금만 더 버티면…….’
메피스토의 생각은 거기까지만 이어졌다.
전쟁을 벌이는 연합군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갑자기 어두워졌어.”
“뭐지? 그림자? 하지만 재단은 아직도 저쪽에 있는데.”
문득 모두의 뇌리에 불안한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재단이 만약, 하나가 아니라면?
만약 그 불안한 가능성이 사실이라면.
지금 하늘을 가리며 그림자를 드리운 저 거대한 기물이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덜컹!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를 드리운 구조물의 중앙이 좌우로 열리며 빛을 쏟아 냈다.
분명 그 빛은 성스럽고 아름답지만, 그 빛을 등진 채 내려오는 존재들은 그러지 않았다.
엘로힘.
로고스의 충직한 수하이자 자아가 없는 저주받은 천사들.
놈들이 내려오는 걸 본 연합군의 1세대 성령들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재단이, 하나 더 있었다고?”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허공에 균열이 가며 아공간으로의 통로가 열리더니, 곧이어 하나둘 재단의 요새가 속속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만 무려 5개.
기존의 재단과 합치면 총 6개의 재단이 하르마게돈 전장 위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재단들도 문을 열어 엘로힘을 쏟아 냈다.
물에 새하얀 잉크를 들이붓는 것처럼, 엘로힘이 순식간에 하늘을 장악했다.
“안 돼…….”
누군가의 애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붉은 비가 떨어져 내렸다.
마치 그들을 조롱하듯이.
* * *
[보았느냐?]
붉은 비가 쏟아져 내리는 전장의 위로 생명들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이어 떨어지는 붉은 창의 폭발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게 너희 하찮은 피조물들에게 내리는 세계의 벌이다.]
화면의 속에서, 점점 수세에 몰리는 연합군의 모습이 비쳤다.
다른 성령들과 싸우고 있는 유현의 일행들도 하나둘 상처를 입어 가고 있었다.
[네가 소중하게 여기던 그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라.]
“너……!”
로고스를 막아야 한다.
그 생각으로 달려드는 순간 로고스가 유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덜컥! 유현의 움직임이 자리에서 정지했다.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지? 이곳은 나의 책. 나의 세계다.]
유현은 그제야 자신이 딛고 있는 이 바닥이,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종이다.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리고 무엇이든 적을 수 있는.
새하얀 종이.
[내가 집필하는 책의 위에서, 한낱 인물 따위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스멀스멀.
새하얀 종이 위로 검은 잉크가 기포처럼 올라왔다.
그것은 살아 있는 점액질 생명체처럼 꾸물거리며 유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유현은 이를 악물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코덱스의 권능을 사용하려 했다.
[어리석기는.]
얼굴에 쓰고 있던 아포리아의 가면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코덱스의 진짜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포리아의 악마를 구성하는 네 악마의 힘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회수해 온 모든 파편이 전부 몸에서 빠져나가 로고스의 손으로 돌아갔다.
강렬한 탈력감이 느껴져 유현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꾸물거리는 잉크들이 유현을 점차 집어삼켰다.
[잠자코 코덱스에 잠겨, 내 궁극의 이야기를 위한 거름이 돼라. 내 코덱스에 너 같은 불온인자를 넣는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그마한 양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네놈의 그 의외성만큼은 높게 쳐줄 만하니 완전히 분해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말이야.]
뭐,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일 터.
로고스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에게서 등을 보였다.
유현은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잉크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잉크는 강한 점성이라도 지닌 것처럼 유현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이 자식! 웃기지 마!”
늪에 잠긴 사람이 발버둥을 칠수록 빨리 잠기는 것처럼.
잉크는 유현의 몸을 더욱 빠르게 빨아들였다.
발부터 해서 허리를 넘어 가슴까지.
이윽고 유현은 전신이 전부 잉크에 잠겨 어두운 나락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