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38화
“도우러 왔습니다.”
유현은 이쪽을 도우러 온 메피스토펠레스를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다른 성령과 싸우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저쪽의 일은 저희 판데모니엄의 군주들에게 맡겼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뒷일은 신경조차 쓰지 않겠다는 듯한 그 말은 너무 쿨하다 못해 전신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덕분에 뛰어난 원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고, 목숨을 구제받았다.
조금 전 메피스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제네시스 재단의 집중 사격으로 죽지는 않더라도 크게 다쳤을 거다.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아직도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빽빽하게 남아 있는 엘로힘의 숫자겠지.
“그야말로 움직이는 구름 같군.”
“오엘로님. 구름은 원래 움직이는 겁니다만.”
“시끄러!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거, 뚫고 갈 수는 있는 겁니까?”
메피스토의 물음에 오엘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현을 턱으로 가리켰다.
“이 녀석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저라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주위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적들도 슬슬 저희를 방해하러 움직이는 거 같고.”
백련에 내장된 이야기는 처음 때와 다르게 이제 7할 정도.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을 뽐낼 수 있겠지만, 로고스와 마주할 때를 대비해서 최소 이야기의 반 이상은 보존하고 싶은 것이 유현의 욕심이었다.
물론, 아끼다가 재단의 안쪽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그거대로 의미가 없는 짓이지만.
“메피스토님까지 가세했으니, 나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방어에 특화된 능력이라서요. 저런 득실대는 흰색 바퀴벌레 같은 녀석들을 일소에 쓸어 버릴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사용한 소형 블랙홀은 뭔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메피스토도 조금 전 공격을 막느라 크게 무리한 것도 사실이었다.
“길을 여는 것은 못 하지만, 한 번 연 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이지만.”
“그거면 충분합니다.”
어느덧 폭심지에서 벗어나 있던 로고스의 수하들이 이쪽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놈들도 본능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이쪽의 목을 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재단의 포격에서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꽤나 많은 체력과 힘을 소실했을 테니 지금이 쓰러뜨릴 수 있는 적기.
“지금이다! 놈들의 힘이 빠졌을 때 죽여!”
“자존심이고 눈치고 살피지 마라! 한꺼번에 달려들어!”
유현이 한번 휘두른 검격에 수백이 넘는 영웅과 데미갓들이 죽었다.
영웅들이야 3세대 성령들이니 그렇다 쳐도, 저들 중 사이에 2세대 성령까지 더러 섞여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유현이 보여 준 무력의 수준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죽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엘로힘도 그런데, 저놈들은 또 뭐가 좋다고 우르르 몰려오는지.”
“기회를 잡았으니 어떻게든 이쪽을 죽이려는 거겠죠.”
“그만큼 우리가 얕잡혀 보였다는 거겠지?”
오엘로는 퍽이나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포격을 막아 내느라 양손이 검게 타올라 만신창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다는 듯 주먹을 쾅 하고 부딪쳤다.
힘을 많이 소모한 것도 사실, 조금 지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런 녀석들이 몰려온다 해서,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건방진 놈들.”
1세대 성령들도 한 수 접어 주는 이야기의 왕, 그중에서 자신이 왜 편력왕이라 불리는지 알려 줄 차례였다.
“조금 진정하세요. 오엘로님.”
“뭐 임마? 저걸 어떻게 참아?”
“프라이티온님은 가만히 있는데, 왜 혼자만 그렇게 들뜨셔 가지고는…… 굳이 본인이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뭐?”
“대신 상대해 줄 녀석들을 불렀으니까요.”
멀리서부터.
우우우웅───!!!
귀를 거슬리게 만드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레의 날갯짓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입으로 무언가를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런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던 성령들의 얼굴이, 소리의 근원지를 발견하고는 새하얗게 질렸다.
“저, 저게 뭐야?”
“먹구름?”
처음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검은 구름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게 틀렸음을 깨달았다. 먹구름은 천둥을 머금어도 저런 끔찍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보기만 해도 피부에 소름이 돋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이 불길한 기운은.
“채…….”
눈이 좋은 누군가가 먹구름의 진짜 정체를 깨달았는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책벌레다!”
먹구름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전쟁이 시작하기에 앞서, 전열의 후방에 따로 빼놓았던 책벌레의 군단이었다.
연합군이 준비해 온 비장의 카드 중 하나.
유현은 이 순간 그것을 꺼내 들고, 책벌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부 휩쓸어라.”
선두에 선 것은 이지조차 얼마 남아 있지 않은 3만의 중급 및 하급 책벌레들.
마치 황충 무리처럼, 중·하급 책벌레들도 저렇게 뭉쳐서 움직이니 살아 움직이는 자연재해나 다를 바 없었다.
일부 책벌레들은 기회를 엿보던 성령 무리를 향해, 그 외 나머지 책벌레들은 하늘을 가득 채우는 엘로힘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은 책벌레와 새하얀 엘로힘이 허공에 서로 뒤엉키며 충돌했다.
서로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엘로힘은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고, 책벌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장관이로군.”
우주를 누비며 많은 것을 봐 온 오엘로 조차도 순간이지만 정신을 놓고 감탄하게 만드는 광경.
책벌레들의 등장으로 인해, 아주 극히 일부지만 그 빽빽하던 엘로힘의 전열에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엘로힘도 책벌레의 무리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니까.
평범한 적들이었다면 갑작스러운 책벌레의 등장에 당황해서 대응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테지만, 엘로힘은 그러지 않았다.
놈들은 공포도 두려움도 몰랐다. 적이 등장했다면 단지 그뿐. 있는 그 사실을 인지할 뿐이다.
하나의 정신으로 이어져 있는 엘로힘들은 재단에서 내려진 명령을 단 0.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하달받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숙청의 실행.
키에에엑!
키이익!
책벌레에게 달려든 엘로힘의 붉은 창이 책벌레의 검은 갑각을 뚫고 박힌다. 책벌레도 지지 않고 팔을 뻗어 엘로힘의 머리를 으깼다.
머리가 박살 난 엘로힘과 창에 꿰뚫린 책벌레가 서로 뒤엉킨 채 지상으로 떨어졌다. 중급 책벌레의 경우에는 엘로힘이 10기 이상 붙어서 함께 떨어졌다.
그런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말도 안 되는 교환비로 펼쳐지는 자살행위. 엘로힘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3만이나 되는 책벌레의 숫자는 절대로 적은 게 아니다. 당장 로고스 측의 성령들은 치가 떨린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까.
문제는 엘로힘의 숫자였다.
“3만으로도 부족한가.”
프라이티온은 자신과 함께했던 책벌레들이 엘로힘에게 밀리는 것을 보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초반에 밀어닥치면서 밀어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엘로힘이 대응에 나서는 순간 책벌레들의 군단이 뒤로 밀려났다.
엘로힘의 숫자는 책벌레보다 훨씬 더 많았다. 100만 대군이라는 말조차도 무색할 정도로 놈들의 숫자는 끝이 없었다.
반면 책벌레들의 숫자는 많다 하더라도 명백히 한계가 있었다.
하급 책벌레와 엘로힘이 하나씩 교환되고, 중급과 엘로힘이 10기와 교환이 되도 엘로힘이 더 유리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량.
그때 상급 책벌레가 나섰다. 일반적으로 곤충과 인간을 반쯤 섞어 놓은 것처럼 생긴 하급, 중급 책벌레와 다르게 상급 책벌레들은 그 덩치가 집채만 하거나 짐승의 모습도 더러 섞여 있었다.
크롸아아아!!
상급 책벌레들이 입을 벌리며 일시에 고함을 내뱉었다. 물리력을 가진 포효는 닿기만 하면 텍스트를 분해해 상대를 소멸시키는 책벌레의 특성이 담겨 있었다.
공간을 파고 퍼진 충격파에 수천이 넘는 엘로힘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유현이 노리던 기회가 바로 지금이었다.
“오엘로님! 프라이티온님!”
“오케이!”
“알겠다!”
두 이야기의 왕이 힘을 합쳐 격을 끌어올렸다.
오엘로가 주먹을 쥐고 프라이티온이 거기에 힘을 실었다. 오엘로의 황금빛과 프라이티온의 검은빛이 서로 한데 뒤엉키며 소용돌이쳤다.
“간다.”
오엘로가 주먹을 내질렀다. 황금과 검정의 기운이 이중 나선을 그리며 책벌레들이 열어 놓은 틈새를 비집고 꽂혔다.
퍼버버벙! 그 공격에 닿은 엘로힘이 와르르 터져 나갔다. 일직선으로 무수한 불꽃이 폭발해 눈을 어지럽혔다. 순식간에 재단으로 향하는 통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그 틈새를 넓히고자 상급 책벌레들이 추가 공격을 쏟아 넣었다.
“지금이야!”
오엘로가 외치는 그 순간, 집정관이 움직였다.
번쩍! 집정관의 붉은 눈동자에서 빛이 폭사하더니 붉은 광선이 지상을 휩쓸며 상급 책벌레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런 공격이 무려 12개.
순식간에 수백이 넘는 상급 책벌레의 8할 이상이 증발했다. 폭발의 충격과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집정관들은 강유현을 다음 목표로 잡았다.
‘빌어먹을 로고스. 어떻게든 나를 막겠다 이건가.’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리는 것을 보면 로고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어차피 지워지고 다시 새겨질 세상에서, 마지막 유희로 이쪽이 발악하는 것을 재밌게 구경하겠다는 생각이겠지.
짜증은 났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데카르트의 힘이 발동하며 유현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유현은 엘로힘 군단의 틈새로 뚫린 구멍을 향해 날아올랐다.
엘로힘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놈들은 곧바로 붉은 창을 쥐고 유현을 향해 겨누었다.
‘써야 하나?’
유현은 손에 쥔 백련의 감촉을 느끼며 고민했다.
책벌레의 군단까지 불러왔지만, 엘로힘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조직적이고 빨랐다.
이대로라면 백련이 머금었던 이야기 중 나머지 절반을 사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과 압박감 속에서.
유현은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믿는 거야.’
그의 뒤에는 누구보다 든든한 자들이 등을 받쳐 주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믿는 거다. 그러니 이쪽은 다른 생각은 어떤 것도 하지 말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신경 쓰자.
유현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활짝 열린 재단의 하부로 향했다.
그저 빛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치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문처럼 생긴 그것을.
뚫고 간다.
번쩍!
엘로힘의 손에 쥐어진 붉은 창이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유현을 향해 날아왔다.
수백만 개가 넘는 창이 동시에 유현을 노렸다. 마치 세상에 붉은 줄이 하나 그어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광경.
유현은 거기서 눈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믿기로 했으니까!
그때 자신의 마지막 기술을 펼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던 메피스토가 모든 준비를 끝냈다.
[시간이여 멈춰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악마가 내뱉는 광오한 선포가 세상을 향해 떨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
창을 던지는 엘로힘도, 눈에서 빛을 쏘아 려는 집정관도, 공간을 장악한 붉은 창도.
전장의 모든 것들이 정지했다.
유일하게.
강유현만 움직였다.
“가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메피스토의 말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는 거 답했다.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재단의 안쪽으로 향한다.
시간을 멈추느라 대부분 힘을 소진한 메피스토는 창백해진 얼굴로 재단의 빛 너머로 사라지는 유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동시에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이제는 흐릿해진 머나먼 과거의 풍경.
그래. 그때도 그 남자는, 모두에게 등을 보인 채 당당하게 앞서 나갔지.
그래놓고 멋대로 계약을 맺고, 멋대로 또 죽어 버리기까지 하다니.
이제는 떠나 버린 녀석이나 유현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 건 진짜 똑같다니까.”
스르륵.
세상을 멈춘 마법이 풀린다.
멈췄던 시간이 움직이며, 정지해 있던 엘로힘의 창들이 허공만을 수놓았다.
빛나간 붉은 창들이 허공을 누비는 것은 거대한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놈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단번에 깨닫고는, 그 원흉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어이쿠. 이제 내가 피해야 할 차롄가?”
이쪽도 바보는 아닌지라, 위험한 순간 몸을 뒤로 뺄 정도의 여력은 남겨 놓은 상태였다.
“두 분도 이쪽으로 붙으시죠.”
“……그래. 신세 지지.”
“고맙습니다.”
“무얼요.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메피스토는 허공을 열며 그렇게 말했다.
오엘로와 프라이티온은 메피스토가 연 통로로 몸을 날렸다.
* * *
유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공간을 계속 나아갔다.
처음 재단의 아래로 들어왔을 때, 마치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을 지나간 것 같은 이질감을 느낀 것도 잠시.
방향도 가늠이 되지 않는 백색의 공간 안에서 하염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우주가 생겨나기도 전 광경이 이러할까.
그런 감상을 느낄 틈도 없었다.
이곳은 오래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이 공간 자체가 지닌 기묘한 힘이 그의 몸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그 수준은 너무나도 미약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계속 이곳에만 머무른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 자체가 집어삼켜질 것이다.
‘저기다.’
유현은 본능적으로 이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어디인지 읽어 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코덱스의 페이지가, 원래 주인인 로고스가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진청운은 이곳까지 도달했지만, 이 새하얀 공간의 벽을 넘지 못했던 거로군.’
진청운이 왜 그런 만신창이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제대로 허락받지 못한 손님은, 이런 벽에 막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존재 자체가 소멸하고 만다.
오히려 목숨이라도 부지해서 돌아온 진청운이 대단한 거였다.
‘뭔가 보인다.’
먼 곳에 나무 같은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의 위에는 무수한 열매들이 맺혀 있었다.
‘열매? 아니야, 이건…….’
열매의 안쪽에는, 성령으로 추정되는 존재들이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 나무의 숫자가 수백이 넘었다.
소름이 끼쳐서,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건 또 뭐야…….”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한 새싹들이지.]
“……!”
유현은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바라보는 정면에, 나무들의 사이로 새하얀 존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던 거지? 아니, 그보다 녀석이 말을 걸기 전까지는 등장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올림포스나 아스가르드 같은 대성군이 내 아래로 들어와 싸우겠다고 해도, 거기에 반대하거나 불만을 품은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거든. 그런 녀석들은 바로 이렇게 잠을 자게 만드는 거야.]
로고스는 가까이에 매달린 열매 하나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 안에는,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여인이 있었다.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인 아테나라고 했던가. 강직한 성품과 올곧은 사상 때문에, 찬탈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지. 그녀를 대체할 존재가 찾기 힘들어서 나는 이렇게 열매에 가두고 기억의 일부를 소거하는 방법을 취해.]
다음 우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최후의 100인. 그것도 전부 찬탈자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로고스의 거짓말이었다.
찬탈자로 자리를 대체하기 힘든 성령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기존의 우주에 존재하는 성령을 그대로 다음 우주로 보내서 유지시킨다.
당연히 기억은 손본 채로 보낸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세상을 깨닫는다면, 의도치 않은 오류가 발생하게 될 테니까.
[원래라면 이번 대에서도 미카엘이나 사탄도 이 안으로 들어와야 했지만, 그 상태로 몇 번의 우주를 넘기더니 결국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지 뭐야. 이 짓도 불완전한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더군.]
“너…….”
[나의 정원에 잘 왔다. 이곳에 온 인간은 지금까지의 반복해 온 우주의 횟수 중에서 분명 네가 최초다.]
로고스는 새하얀 얼굴에 입을 드러냈다.
그 입은 이 순간이 기뻐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찢어져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그러면 궁극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