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36화
‘전쟁이 시작되면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거 일 났군.
유현은 이쪽을 지루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두 1세대 성령을 보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 대성군의 주신들이야 강력한 힘을 지녔다지만, 이 둘은 그중에서 특히나 거대한 ‘이야기’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존재들.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성령의 격이 높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한 축을 담당했던 저 둘은, 필시 1세대 성령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논할 만했다.
특히 제우스. 헤라클레스로 인해 올림포스 최강이라는 자리에 이름을 올리기에 무색해졌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티폰을 쓰러뜨리고 하늘의 왕좌를 지켜 낸 강자다.
그런 제우스가 이쪽을, 특히 여성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처자로군.”
특히 제우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이쪽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는 강혜림이었다.
“전장 속에서도 빛나는 눈부신 미모, 아름다운 흑발과 끝없이 반짝이는 총기 어린 눈빛.”
제우스의 시선이 강혜림의 특정 부위를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나의 여자에 잘 어울리는 아이로다.”
“또 그놈의 병이 도진 거냐?”
보다 못한 오딘이 제우스에게 핀잔을 날렸다.
“적당히 해. 놈들은 우리가 죽여야 하는 적이다.”
“꼭 죽여야만 하는가. 이런 전쟁터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날 수 있는 법이지.”
“네놈이 지긋지긋하게 말하는 그 사랑은 늘 깃털보다 가볍지 않았던가?”
“깃털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실 된 법이야.”
오딘은 순수하게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제우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혜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떠냐. 어차피 이대로 가면 패배해서 소멸할 운명. 하지만 여기서 내 아내가 되겠다고 한다면 너 하나 정도는 다음 우주로 데려가 줄 수 있다. 네가 다음 우주의 헤라가 될 영예를 누리게 해 주마.”
너무나도 오만하고 경박한 말이지만, 그걸 제우스라는 성령이 했다고 하니 이보다 더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제우스라는 이야기에 집어삼켜지기 전부터 여자를 밝히는, 오히려 그랬기에 찬탈자로서 지금의 제우스가 된 걸지도 모른다.
“……완전 싫어.”
강혜림은 그런 제우스를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혐오스럽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허허. 튕기는 것도 매력적인 여자로다.”
“……유현 씨. 여긴 제게 맡겨 주세요.”
“혜림 씨.”
유현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바로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결국 싸우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그 의지를, 긍지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예. 부탁합니다. 그리고 지아 씨도.”
“그래. 나도 말 안 해도 알고 있었어.”
눈앞의 적에게 적개심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권지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녀의 시선은 방금 전부터 오딘에게 못 박혀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그녀의 꼬리가 옷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와 격하게 흔들거렸다.
“음?”
익숙한 기운을 느낀 것은 오딘도 마찬가지인지,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그가 홀리듯 권지아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의 한쪽 눈이 찢어져라 커지고.
히죽.
이 지루한 전쟁에 의미를 느끼지 못한 듯 다물린 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이거 이거,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여기에 있었던 건가?”
의미가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모두, 로고스의 앞에 무릎을 꿇을 거라고, 다음 우주로 가는 존재들은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한 세계니까.
지금까지 로고스에게 저항하던 자들이 과연 지난 우주의 역사에서 없었을까? 아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을 거다. 그리고 계속 같은 수순을 반복했겠지.
결국, 그런 것이다. 오딘인 그가, 전 우주의 오딘 역할을 찬탈한 그이기에, 가망 없는 싸움 자체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은 거다.
어차피 승자는 로고스가 될 테니까.
그저 이 쓸데없이 크기만 한 무대 위에 펼쳐진 지루한 연극을 지켜보는 것.
그저 그것이 짜증이 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루하다는 말은 취소다.”
주인의 의지에 호응하듯 명마 슬레이프니르가 투레질을 했다.
“드디어 의미가 있는 싸움을 하게 됐으니.”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싸움이 시작됐다.
유현이 먼저 지면을 박차고 내달렸다.
가로지르는 길은 오딘과 제우스의 사이.
“감히!”
“우리를 뚫고 가려하는가!”
고작 인간 따위가 1세대 성령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제우스와 오딘이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
제우스에게 강혜림의 검이, 오딘에게 권지아의 주먹이 내질러졌다.
두 주신은 혀를 차며 유현에게 가하는 공격을 회수, 방어로 전환했다.
무시하고 유현을 공격하자니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제우스는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했고, 오딘은 궁니르를 가로로 세워 공격을 막았다.
“오딘!”
권지아의 분노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에 뒤집어쓴 후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지금까지 숨겨 왔던 늑대귀가 바깥으로 드러났다.
그 광경을 본 오딘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펜릴! 내게 패배한 이후로 대체 어디를 갔나 했더니, 고작 인간 계집애 하나한테 힘을 넘겨주고 붙어먹은 건가!”
권지아의 주먹에서 뻗어 나온 보랏빛 늑대의 주둥이가 궁그닐의 창대를 물었다.
가벼운 공격의 교환.
상대가 펜릴이라고 생각했던 오딘의 눈매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펜릴, 아니…… 그 힘을 다루는 여인. 이제는 펜릴이라 부르기도 뭣해졌군. 멍청한 놈.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인간 하나에게 넘기다니. 전대 오딘이라는 이름이 울겠어.”
“그 이름을 빼앗은 찬탈자 주제에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인간의 여인이여. 펜릴의 이야기를 이어받아서 이 내게 대신 분노를 해 주는 거냐? 그거 참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구나.”
권지아가 사용하는 기술 설천신류는 하늘을 물어뜯는다는 이름으로, 당연히 그 기술의 모티프는 세계를 삼킨 늑대 펜릴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권지아는 오래 전부터 그 기술을 사용하고 능력을 익혔다.
끝없는 회귀로 반복되어 기억과 능력마저 마모되는 순간에서도, 그녀는 이 설천신류 하나만큼은 절대 잊지 않고 계속 사용해 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유현이 행방불명이 되고 유현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혼성계를 찾아 떠돌던 어느 날.
권지아는 지하 깊은 유적 속에서 한 늑대를 마주하게 됐다.
[그 힘. 분명 나의 것과 비슷한 건데, 신기한 일이군. 나는 누군가에게 그 힘을 준 적이 없는데.]
늑대는 세계를 삼켰다는 이름과 다르게 매우 진중하고 현명한 눈빛으로 권지아를 바라봤다.
[그런가. 결국 너 또한, 이 반복되는 우주의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아이였구나. 그 힘은 그저 자신이 자신임을 잃지 않기 위한 이정표였고.]
펜릴은 기분이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권지아에게 넘겼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자 받아라. 내 모든 것을. 그것으로 이 세상을, 어디 한번 집어삼켜 보거라.]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가 절로 갈린다.
그 힘을 받아들인 이후로 머리에 짐승의 귀가 자라고, 엉덩이 부근에 꼬리가 자랐으니까.
멋대로 이 꼴로 만든 그 늑대에게 짜증이 나는 것도 있지만, 그의 이야기를 계승하고 지니게 된 상황에서 오딘을 마주하니 덩달아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권지아와 오딘이 수차례 충돌하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거대한 전쟁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펼쳐진 고공, 사막의 언덕 너머에서 빛이 십자가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을 배경으로 삼아 한 마리의 짐승과 한 신이 맞붙었다.
“물어뜯어 주마!”
“해 보거라. 짐승.”
* * *
“오딘 녀석. 가장 재미가 없다는 듯 말을 해 놓고, 본인이 제일 흥이 올라 버렸군.”
권지아와 함께 먼 곳까지 떨어진 오딘을 곁눈질 하며, 제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강혜림은 그런 제우스를 여전히 경계 어린 시선으로 노려봤다.
“날 너무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라고. 어차피 여기서 싸워 봤자 남는 것도 없는데.”
“……무슨 속셈이죠?”
“속셈? 그런 건 없다. 순수하게 내 아내가 될 여인에게 손찌검을 하고 싶지 않을 뿐.”
“누구 맘대로 당신의 아내라는 거죠…….”
“나니까. 나 제우스이기에 가능하다. 희대의 로맨티스트, 누구보다도 사랑에 잘 빠지는 남자. 그런 나는 내가 원하는 어떤 여자도 품을 수 있다. 나는 그래도 되니까.”
“당신은…… 정말로 역겨워요.”
자신의 자리에, 그리고 이야기에 취해서 시대착오적인 말만 내뱉는 성령.
그러면서도 가진 힘은 진짜라, 지금까지 누구의 심판도 받지 않아 더욱 비대해진 자아를 가지게 된 시대의 괴물.
“제가 당신을 죽이겠어요.”
강혜림이 천뢰검을 발동해서 휘두르려는 순간.
제우스가 손끝을 움직였다.
“아이야. 너무 우습구나.”
검에 머금은 청아한 뇌기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강혜림은 일순 당황했다.
“천뢰검의 뇌기를…… 대체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 잊었느냐? 나는 하늘의 신 제우스. 그리고 내가 다루는 것은 이 우주에서 그 무엇보다도 순수한 뇌정(雷精)인 아스트라페다. 그런 내 앞에서, 감히 번개를 다루는 것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느냐?”
세상의 모든 번개와 관련된 힘은 그의 앞에 무력하다.
제우스의 앞에서 전기를 다루고자 한다면 적어도 아스가르드의 토르나, 트리슈라를 쥔 시바 정도밖에 없었으니.
“대단한 능력을 지녔지만, 상성이 나빴다.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길 수 없어.”
“그건…….”
강혜림은 자신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힘을 다루지 못하게 됐음에도, 검을 들어올렸다.
“해 봐야 알죠.”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로다.”
시종일관 신사처럼 인자했던 제우스의 얼굴이 소름 끼치게 일그러졌다.
“강제로 취하고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 참고 또 참고 있었지만, 강혜림을 보는 순간부터 제우스는 그녀를 취할 생각만 가득했다.
겉모습을 세련되게 꾸미고,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며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그의 천성이란 결국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가만히 앉아서 견딜 수가 없는 난봉꾼이었다.
“자. 어디 한번 보여 봐라. 나의 귀여운 아이야.”
“어디 혀가 잘려도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조.”
강혜림은 검을 쥐고 제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뇌기가 없더라도 순수한 검 한 자루만 있다면, 계속 싸울 수 있다.
그녀의 본질이란, 결국에 검후였으니까.
* * *
“하. 이거 참 끼어들 수도 없는 싸움이잖아.”
권지아와 강혜림이 벌이는 대결을 본 유영민은 혀를 찼다. 저렇게 서로 엉키고 치고받는 싸움에서는 이쪽이 저격으로 원호사격을 해 주기 힘들다.
수준이 너무 높아서, 감히 끼어들 수가 없다.
유영민은 일단 원래의 목적을 떠올리기로 했다.
연합군의 최우선 목표는 유현을 재단이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유현의 백업이었다.
‘어차피 탐지도 되지 않는 사거리 바깥에서 쏘는 공격.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이쪽에서는 일방적으로 치명적인 공격을 몇 발이고 계속 먹여 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유영민의 머리 위의 하늘이 밝게 빛났다.
‘빛? 갑자기 밝아졌다고?’
그런 의문이 이어지는 것도 동시에, [위험감지] 스킬로 인한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대체, 뭐가 다가오는지 모른다. 심지어 그는 지금 부하들이 펼친 안전한 방어진의 중심에 있기까지 하다.
[진지구축] 스킬까지 발동했기에 설사 지구의 미사일 폭격이 떨어져도 멀쩡할 수 있는 곳일 진데도 이 정도의 위기감이라니.
“너희들!”
“대장? 갑자기 무슨 일이요?”
“다들 피……!”
유영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빛의 무리가, 그대로 유영민과 그 용병단을 휩쓸어 버렸으니까.
찰나의 순간에 이어진 빛의 폭격에, 용병단원 중 7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난도질이 되어 사망했다.
시체가, 육체의 조각이, 빛에 찢겨 나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무슨……!’
살아남은 자들도 대부분 중상으로,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유일하게 전신에 방어 스킬을 덕지덕지 두른 유영민만, 가벼운 상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너희들! 다들 괜찮냐?! 대답해!”
폭발의 매연 속에서 그렇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유영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단 일격에 몸에 두른 모든 방어 스킬이 지워졌다. 그것을 날린 것은 지금 빛의 창들을 등진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성령 하나.
“아후라……마즈다.”
페르시아 신화의 원류,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신 아후라 마즈다.
그가 직접 유영민을 없애기 위해 나선 것이다.
왜 저 정도의 존재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런 먼 후방까지 몸소 행차했는지 이유를 찾았지만, 이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닌 척해도 지휘관만 저격해서 사냥하는 자신이 저쪽 입장에서도 어지간히 거슬렸던 것이겠지.
이곳은 전쟁터. 적을 마주친 순간 긴말은 필요 없었다.
‘지금 내 수준으로 승산은 없어.’
유영민은 패배할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주의다. 그렇기에 저격수라는 안전한 위치를 택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일선에 서서 다치고 상처 입어 가면서 싸우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저격수로서 자리가 들통이 난 이상 물러나는 게 우선이었지만.
‘못하겠군.’
유영민은 연기가 가라앉은 참상을 보았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부하들. 당장에 어젯밤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녀석들이 지금 싸늘한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5년 동안, 용병왕으로 불리며 함께 활동해 온 동료들의 시체가 이윽고 텍스트로 변해 사라진다.
이런 꼴을 보고,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내릴 수가 있을까.
“……그래. 예전부터 궁금하기는 했어.”
유영민은 저격총을 쥐어 들고 아후라마즈다를 살기 어린 시선으로 노려봤다.
“과연 그 잘난 신들도, 미간에 총알이 박히면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