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34화
싸움의 날이 밝았다.
하르마게돈이라는 언덕은 황량한 모래로 가득 찬 끝없는 황야였다. 어느덧 범위를 넓힌 이 최후의 전장은 세계의 전력이 충돌하는 장소로 충분했다.
메기도 언덕을 향하는 선두에 선 것은 1세대 성령들과 그에 견줄 무력을 지닌 존재들.
그리고, 이 모든 연합군을 이끄는 유현이었다.
“이만한 전력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유례가 없군요.”
그런 유현의 곁에 다가오며 말을 거는 한 성령이 있었다.
다가오는 기척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던 유현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안님.”
한때는 얼음만이 가득해 이야기마저 얼어붙었다고 알려졌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행성이 된 가르디안의 수호자 레안.
그 또한 이 최후의 전쟁에서 유현에게 힘이 되기 위해 열쇠검을 들고 참전했다.
“링우그와 사람들은, 잘 지냅니까?”
“건강해서 탈이죠. 링우그도 이제 훌륭한 가르드 전사가 됐거든요.”
“나중에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만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이 싸움에 참전한 거니까요.”
옛 인연과 가벼운 해후를 끝내고,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사막의 중심, 하늘에 군림하듯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재단의 요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 포진해 있는 적들의 모습까지.
“저쪽도 싸울 수 있는 병력을 싹 다 끌어왔군.”
온갖 눈부신 무구와 이야기로 무장한 적들은 이쪽과 마찬가지로 대성군이 영혼까지 끌어모은 최강의 전력들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존재들이 더러 있었다.
“주신들이 다 모였어.”
구름 위에 선 채, 한 손에는 번개 아스트라페를 쥐고 있는 백색 정장 남자.
백발과 새하얀 수염마저 정갈하게 정리한 그 모습은 고풍스러운 귀족을 연상케 했다. 이쪽을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호리호리한 남성이 바로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였다.
‘그리고, 그 옆에 말을 타고 있는 건…….’
제우스의 곁에 있는 건 말 위에 타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그냥 말도 아닌, 다리가 8개나 달린 신화 속의 명마 슬레이프니르.
그 위에 올라탄 것은 한 손에 붉은 장창을 쥐고, 한쪽 눈에는 안대를 하고 있는 그는 아스가르드가 자랑하는 주신 오딘이었다.
그 외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것은 대성군 아눈나키의 주신 아누.
대성군 리그베다의 삼주신이라 할 수 있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대성군 아베스타의 주인 아후라 마즈다.
대성군 헤르모폴리스의 주신 라.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마왕 마라 파피야스까지.
연합군에 전혀 꿀리지 않는, 오히려 이쪽에 필히 견줄 만한 최강의 전력들.
그것을 마주하는 연합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뒤에 펼쳐진 거대한 요새에서, 먼지구름처럼 쏟아져 내리는 새하얀 그림자인 엘로힘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겁에 질려서 도망치거나 하지 않는다. 어차피 도망치면 모두 끝이다.
그들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가족, 사랑하는 사람, 친한 지인들이 사는 이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
처억.
양 진영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선두에 선 유현은 연합군의 진영을 돌아봤다. 이 대단한 군대의 최선두에서 이끄는 것이 고작 인간인 걸 알면서도, 그들은 모두 유현에게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대성군의 병사들을 제외한, 심지어 성령들마저도.
“한마디라도 해 주지 그래.”
옆에서 권지아가 팔뚝을 툭 쳤다.
말은 가볍게 해도 그녀 또한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수한 회귀 속에서도, 이 자리까지 온 적은 단언컨대 처음이었으니까.
“할 말이라.”
유현은 그 말에 반응하듯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모두가 귀를 곤두세운 채 유현의 말을 경청하고자 했다. 적어도 이런 것에 기대야 할 정도로 그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침묵이 가득한 전장 위에 맴도는 것은 모래를 머금은 바람의 소리가 전부.
유현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저길 보십시오.”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하늘 위에 떠 있는 재단의 본체.
정확히 그 너머, 안쪽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로고스를 향했다.
“우릴 마치 제 장난감인 것마냥 가지고 노는 상대가,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됐고, 이제 세상의 멸망을 놔두고 싸우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죠. 압니다. 우리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됐다는 걸.”
누군가는 진실에 분노하고.
또 누군가는 진실에 절망한다.
과연 피조물 따위가 창조주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뻔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런 것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마음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목숨을 바쳐 싸우라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단 하나만 떠올리세요. 여기서 우리가 물러나면,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래.
결국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이것이 옳다고 믿었기에, 그리고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있어서였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주시했다.
도망은 치지 않는다. 그 한계까지 몰린 마음이, 역설적이게도 끝없는 용기를 선사했다.
“그러니 보여 줍시다.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 지닌 긍지라는 것을.”
그리고 보여 주자. 저 간악한 로고스의 편에 붙은 배신자들에게,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미래를 위하여.”
그 마지막 한마디에, 모두가 손에 든 무기를 치켜들었다.
“미래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그래! 끝까지 싸우자!”
공간을 울리는 거센 함성에 유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이쪽을 주시하는 적들을 향한다.
“갑시다.”
대치 상태를 끝내고, 유현이 첫걸음을 내디뎠다.
* * *
“뚫어라!”
이제는 한 쌍의 날개밖에 남지 않은 미카엘이, 한 손에 빛으로 이루어진 검을 쥐고 에덴의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강유현이, 재단에 도달할 수 있게!”
로고스의 진영도 대응에 나섰다.
“막아라!”
리그베다의 3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가 여러 개의 팔로 수인을 맺으며 외쳤다.
“로고스님께 가게 놔두지 마라!”
모든 세계에서 모인 군대가, 서로 함성을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경 장관이기까지 한 광경이지만, 거기에 시선을 빼앗길 틈은 없었다.
이곳에서 방심은 곧 죽음을 뜻하니까.
꽈르릉!
공간이 좁혀지고 양 진영의 병사들이 충돌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과 비명.
피는 없었다. 죽어 가는 자들은 모두 활자로 변해 흩어져, 이윽고 재단에 흡수됐으니까.
“죽어!”
“로고스의 개들!”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연합군은 그 광경에 이를 악물면서, 눈앞의 싸움에 집중했다.
지구에서 벌어지던 전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규모. 온갖 이야기로 치장된 성령들이 허공에서 격돌하자 눈을 뜨기도 힘든 빛의 세례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미카엘! 어리석은 사탄의 곁으로 보내 주마!”
비슈누가 여러 개의 팔을 움직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개방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경전 바가바드의 구절.
그것을 읊는 순간 비슈누의 손에 쥐어진 차크람과 곤봉, 연꽃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하나가 핵폭탄 이상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닌 공격에, 미카엘은 입술을 깨물며 대응에 나섰다.
본래라면 온전한 12장의 날개로 비슈누의 공격을 막아 내거나 받아쳤을 일이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온전치 못한 힘으로 내게 맞서려 하다니!”
비슈누가 미카엘의 목숨을 끝장내려던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둘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비슈누는 처음에 그것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공격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공격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감히 내 싸움에 끼어들다니. 마몬!”
“전쟁에서 네 싸움 내 싸움이 어디 있어?”
“판데모니엄의 악마가 에덴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건가!”
판데모니엄의 일곱 군주 중 하나인 탐욕의 마몬.
혼성계의 모든 화폐를 가져야만 속이 풀리는 그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대부호였다.
판데모니엄의 만마전 신전을 건설한 것도 그였고, 황금만능주의라는 단어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유명한 대악마.
그가 미카엘을 도와 비슈누를 공격한 것이다.
“뭐, 나도 전직 천사였으니 굳이 함께 싸우지 못할 것도 없거든.”
무엇보다 마몬은 판데모니엄의 군주 중에서 가장 에덴과 양호한 관계를 지닌 악마로 유명했다.
그는 전쟁을 벌여서 누구를 파멸시키는 것보다도,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것을 더 좋아했으니까.
“게다가 여기서 이쪽이 지면, 내가 지금까지 모아 온 모든 재산이 다 사라지는 건데.”
마몬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안 되지 안 돼.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폭사했다.
* * *
“비켜!”
유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모두 밀어냈다. 그것을 넘어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들은 엄청난 무력으로 분쇄하기까지 했다.
그런 유현을 필두로, 그를 보좌하듯 동료들이 도움을 줬다. 후방에서 지원을 해 주는 유영민을 포함해, 함께 선두에서 달리는 강혜림, 권지아, 서수민까지.
그리고 아포리아의 악마의 힘으로 형상화된 네 악마도 모습을 드러내며 적들을 휩쓸었다.
대성군의 병사들과 엘로힘의 파도는 거대했지만, 그 이상으로 유현 일행 또한 강력했다.
“누가 놈들을 좀 막아 봐!”
일부 지휘관이 외쳤지만, 유현의 기세는 노도와도 같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현은 그야말로 전장 위에 강림한 악마였다.
아포리아의 가면을 쓴 채, 흉흉한 4개의 안광을 뿌리며, 검에 닿는 모든 적을 급화를 이용해 텍스트로 분쇄했다.
그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떨어지며 유현의 앞을 막았다.
“그때 못 낸 결판을 내주마!”
올림포스의 최종 병기 헤라클레스.
그가 유현의 앞을 막아섰다. 헤라클레스는 존재감 하나만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괴물이었다.
당장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반대로 찬탈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헤라클레스는 흉흉한 시선으로 유현을 노려봤다.
이전, 손오공의 방해 때문에 죽이지 못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힘 일부를 빼앗긴 것은 두고두고 치욕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다음에 만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마음속으로 유현을 수백 수천 번을 찢어 죽였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널 죽여 주마.”
“나도 마음 같아서는 서련 씨에게 상처를 준 너를 죽이고 싶지만.”
유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헤라클레스를 도발했다.
“미안한데, 이번엔 네 상대는 내가 아니야.”
“뭐?”
헤라클레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것보다 먼저, 허공에서 거대한 검 한 자루가 그를 향해 대포처럼 쏘아졌다.
음속을 돌파한 100m가 넘는 거검은 정확히 헤라클레스의 미간을 노렸다.
헤라클레스는 코웃음을 치며 손에 쥔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칭! 검이 산산조각이 나며 주위로 무수한 파편을 흩뿌렸다.
“그때의 그 검사인가!”
“그래.”
동시에 최도윤이 헤라클레스의 지척에 나타나며, 양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헤라클레스는 최도윤을 비웃었다. 급화를 터득한 이쪽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어떤 공격도 이야기를 뒤틀어서 무효화시킬 수 있다.
집행자가 가하는 공격이라고 해 봤자, 금방 재생할 수 있는 자잘한 상처가 전부.
최도윤이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찔러도, 이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일 따위는…….
푸슉!
“어……?”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최도윤의 검이 정확히 헤라클레스의 가슴을 사선으로 갈랐다.
급화를 사용하며 그가 내지르는 검의 위력을 최대한 낮췄음에도, 갈라진 근육과 살의 틈새로 피가 흐르며 이윽고 텍스트로 변해 흩어졌다.
헤라클레스의 부릅뜬 눈이 최도윤을 향했다.
“너……! 급화를 터득했구나!”
최도윤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곧바로 공세를 이어 나갔다. 헤라클레스는 황급히 공격을 막았다.
상대가 급화를 터득했다면, 무분별하게 몸으로 막아서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래. 이쪽도 전력을 다해 주마!”
헤라클레스는 곧바로 사자 가죽을 머리에 두르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다른 손에는 활을 꺼내 쥐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뤄온 모든 시련을 한데 모어 꺼내 든 전력 무장에, 최도윤은 무수한 검을 뽑아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먼저 가라. 저 근육 덩어리는 내가 맡겠다.”
“……그래. 고맙다.”
유현은 최도윤에게 헤라클레스를 맡겼다. 그때의 패배 이후로 절치부심한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음.”
함께 나아가던 도중 서수민이 침음성을 흘렸다.
“수민 씨.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아.”
서수민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마라 파피야스. 녀석이다.”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거라. 금방 결판을 낼 터니.”
서수민은 그 말을 끝으로 마라 파피야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지 않아도 마라 파피야스 또한, 그때의 패배를 마음에 담아 놓고 있었기에 대놓고 그녀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도발을 날리던 중이었다.
허공 높이 뛰어오른 서수민은, 멀지 않은 곳에 검은 그림자로 뒤덮인 마라 파피야스를 발견했다.
“거기 있었구나! 마왕!”
“키힛. 기다리고 있었어! 천마!”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서수민과 마라 파피야스가 곧바로 허공에서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