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32화
오엘로는 자신이 오래 살아온 만큼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우주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으며, 엉덩이가 무거운 다른 이야기의 왕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우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한 최고의 해결사였다.
남들이 모르는 것에 대한 경험의 범위가 다양했고, 그만큼 미지의 사건을 마주했을 때도 받아들이는 것이 빨랐다.
그것이 자신의 장점이라고, 혼자 몇 번이고 자화자찬한 적도 없잖아 있었는데.
“미……친. 이만한 대군이라니.”
그런 오엘로마저도 반사적으로 경악성을 흘리게 만드는 것이 지금의 광경.
과거 신대 시절, 1세대 성령들과 싸웠다고 알려진 신화 대전의 괴물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신화급 책벌레 32. 상급 책벌레 351마리. 중급 및 하급 책벌레 약 3만.”
혼성계에 남아 있는. 아니, 전 우주에 숨어든 모든 책벌레가 한자리에 모였다.
어지간한 대성군을 아득히 뛰어넘는 물량과 힘.
지금은 찬탈자들에게 역할을 빼앗겨, 전성기의 힘과 격을 상당수 소실한 상태라 들리는 소문만큼의 강함은 없겠지만.
이야기를 분쇄시키는 책벌레의 특성 하나만으로, 이들의 위험성은 극에 달할 정도다.
그걸 알기에 신화급 책벌레를 제외한 나머지는 허공에 머물며 대기 중이었고.
“전부 이번 대전쟁에 참전할 생각입니다.”
“……대체, 어디서 이만한 녀석들을 다 모은 거야.”
“지금은 이성의 일부도 무너져서 영락했지만, 이들은 전대 우주의 성령들이었습니다.”
로고스에게 맞서서 패배하거나, 혹은 찬탈자에게 자신의 역할을 빼앗겼던 존재들.
왜곡된 신화 속에서는 결국 주신에게 대항하려다 제압당하거나 죽거나, 혹은 봉인당했다고 알려진 신대의 괴물들은 상고(上古)의 세월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 왔다.
“그들이 지닌 증오의 방향은 너무나도 명확했지만, 적은 너무 멀어서 닿지 않았죠.”
책벌레라고 멸시받던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다른 대성군의 심판자에 의해서 죽을 게 뻔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재단이 움직인다면, 그들로서는 맞서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었다.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 힘, 세계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능력, 서로 뭉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책벌레들은 세상의 어둠 속,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아주 깊은 곳까지 숨어들었다.
그런 그들에게 접촉한 것이 바로 프라이티온이었다.
오엘로의 눈을 피해, 로고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향하던 프라이티온은 세계의 심연에서 책벌레들과 마주하게 됐고.
그들과 뜻을 함께하게 됐다.
로고스에게 복수의 칼날을 찌르기 위해.
“이제는 닿습니다.”
책벌레들에게 프라이티온은 훌륭한 동료였지만, 안타까운 점은 프라이티온도 구심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고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코덱스의 파편이 선택한 존재여야만 했다.
파편을 모아 조각을 이루고, 조각을 모아 페이지를 완성한 자만이 로고스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으니까.
세계의 구원자가 될지 모르는 그들의 구심점.
그게 바로 강유현이었다.
“로고스에 맞서기 위해 많은 대성군과 성군, 군주들이 모였습니다. 혼성계의 절반 이상이 되는 전력이 한자리에 모였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전 우주에서 패배했던 옛 성령들까지 합세했죠.”
이로써 모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모였다.
완벽은 아닐지라도 이 이상 바라는 것은 사치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자. 갑시다. 마지막 싸움을 하러.”
유현의 뜻에 동조하듯, 검은 안개에 휩싸인 책벌레들이 모두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복수를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 * *
“세상에. 대체 여기에 얼마나 모인 거야?”
오엘로 해결사에 소속된 아리샤는 광야 위에 끝없이 펼쳐진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막사를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의 위기에 함께 맞서 싸우는 겁니다. 이 정도 모이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요?”
셀린이 너무 호들갑 떨지 말라고 나무라듯 말했지만, 사실 그녀도 내심 놀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딱 잘라서 말해 세계의 절반 이상이 이 자리에 모인 거다.
이 정도 규모의 군대라면, 정말 과장 한 줄 안 보태고 세계 정복도 노릴 법했다.
하필 상대해야 하는 적이 세계를 창조한,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음 놓지 마.”
오엘로의 오른팔이자 두 사람의 책임자인 셀레스티나가 둘의 기대감을 단칼에 끊어 냈다.
이 정도의 병력을 보고 안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대편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쪽에 필적하는 대성군, 그것도 대성군 중에서도 상당히 발언권이 강한 놈들이 로고스의 편에 붙었다.
이대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군주들이나 여타 세력까지 합류했기에, 적들도 마냥 무시할 수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 카멜롯에서 보았던 재단까지.’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내리던 엘로힘과 파괴적인 광선을 쏘아 내던 집정관까지.
재단이 지닌 순수한 전력만 생각해도 이번 싸움은 절대 녹록지 않을 터.
전쟁이 벌어지면 또 거기에 여러 가지 변수가 있겠지만, 적어도 셀레스티나가 판단컨대 싸움 자체는 반반도 가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야?’
셀레스티나의 시선이 강유현을 찾기 위해 분주히 막사 주변을 누볐다.
듣기로는 연합의 대표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습은커녕 그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병영의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저기 무슨 일 생겼나?”
“갑자기 시끄러워졌네요.”
아리샤와 셀린도 그 미묘한 흐름을 읽었다.
설마 재단에서 벌써 손을 써서 기습을 가한 건가 싶었지만, 그렇기에는 싸움의 파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엉? 저기서 뭔가 오는 거 같은데?”
확인 차 높이 날아오른 아리샤가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일련의 무리를 발견했다.
아니, 무리가 맞나? 뭔가 규모가 남다른 거 같은데.
아리샤는 눈에 힘을 주며 새롭게 추가되는 무리를 확인하고자 애를 썼다.
“엥?”
그렇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것은 당황에 찬 경악성.
무리의 선두에서 다가오는 것은 이제는 자신의 직장 상사인 오엘로와, 자신이 반드시 넘고자 했던 라이벌인 강유현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가 함께 있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뒤에 있는 것들은 또 뭐야?’
아리샤는 해결사의 일을 하면서 책벌레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책벌레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하급을 넘어 중급 책벌레까지 퇴치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녀조차도 ‘저걸’보고 순간 책벌레가 맞는지 의문을 품었다.
‘무슨 기운이…….’
거대하다를 넘어 초월적일 정도. 분명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을 두른 그것은 책벌레와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덩치가 더 크고, 무엇보다 힘의 총량이 남달랐다.
설마 저게 상급 책벌레? 아니다. 저 정도의 녀석들에겐 상급조차 ‘고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저것은 오히려 상급 책벌레를 훨씬 넘어서는…….
“신화급 책벌레로군.”
“으앗?!”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저쪽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팔린 나머지, 셀레스티나와 셀린이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이상한 소리를 낸 것에 대한 쪽팔림보다도, 셀레스티나가 한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신화급 책벌레요?”
“아, 아직 너희들은 모르겠구나. 신화급 책벌레. 이제는 전부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과거 신화 대전에서 1세대 성령들과 맞서 싸우던 신대의 괴물들이야. 사실 나도 듣기만 했지 직접 본 적은 처음이지만.”
“지, 지금 오고 있는 게 그런 괴물들이라고요? 그러면 지금 당장 싸워야……!”
“진정하세요.”
“켁!”
의욕만 나서려는 아리샤의 뒷덜미를 덜컥 붙잡은 것은 셀린이었다.
“야 임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뒷덜미를 잡냐!”
“안 그랬으면 사고를 칠 거 같아서요.”
“너 혹시 나 싫어하니?”
“싫지는 않은데요.”
“뭐?”
“둘 다 그만하고 저기나 봐라.”
셀레스티나가 가리키는 방향, 병영의 막사에서 하나둘 나타난 병사들과 일부 성령들은 책벌레들을 알아보고 전투태세를 취했다가, 이내 힘을 거두었다.
책벌레를 만나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은 혼성계의 상식이다. 하지만 성령들은 그들을 보고 공격을 멈췄다.
더욱 이상한 것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책벌레마저도.
성령들을 보며 어떠한 적대적인 행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떠오르는 가능성은 단 하나.
“저거…… 설마 지원군이야?”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세계의 괴물들마저도 아군으로 들인 것이다.
* * *
각 집단의 최고위 존재들이 모인 거대한 간이 홀.
대성군의 1세대 성령과 더불어 신화 속 책벌레, 이야기의 왕, 회귀자, 군주 연합 집행자까지.
정말 온갖 존재들이 모인 이 자리의 분위기는 곧 있을 전쟁 때문에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렇다 해도 놀랍군.”
먼저 운을 뗀 것은, 분위기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손오공이었다.
천계삼십육천 출신에, 그런 손오공과 싸웠던 적이 있는 나타가 괜한 소리 하지 말라고 시선으로 경고를 날렸지만, 손오공은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며 제 할 말을 했다.
“설마하니 책벌레들까지 아군으로 들여왔을 줄이야.”
“이들이 진짜 책벌레가 아니라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알아. 나도 겨우 최근에 듣게 된 거니까.”
혼성계에서 책벌레라 불리던 괴물들이, 사실은 이전 멸망해 버린 우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니.
하지만 그 모습마저 변하고, 이 세계에 거부된 탓에 외형까지 기이하게 변질되어 결국에는 척살의 대상이 돼 버린, 불우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살아남아서 다음 우주에 가게 된다면 우리도 저런 꼴이 되는 건가.”
손오공의 말에 일부 성령은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손오공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성령이라는 존재를 저런 모습으로 영락시킨 로고스를 향한 분노였다.
“물론, 이 자리에서 옛 성령들과 마주하는 것에 불편해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으실 겁니다.”
유현의 말에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는 존재가 몇 있었다.
그것도 전부 어중간한 존재가 아닌, 1세대 성령이라 불리는 강자였다.
이전 시대 주역의 자리를 빼앗은 찬탈자들. 지금의 로고스의 행태를 놔둘 수 없어서 연합군의 편에 붙었지만, 그들은 마냥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부정할 수가 없겠군.”
그 말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수염을 길게 기른 도복의 노인이었다.
성명, 인과의 극점에 도달한 자.
다른 이름으로는 원시천존(元始天尊).
천계삼십육천의 주신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책벌레들 사이에서 익숙한 기운을 발견했다.
“나 또한, 찬탈자로서 이들의 입장을 모르지 않으니까.”
그에 호응하듯 유현의 뒤로 도열한 신화급 책벌레 중 하나가 원시천존을 응시했다.
원시천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가? 반고(盤古).”
반고라 불린 책벌레, 전 우주의 원시천존이었던 그는 지금의 원시천존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한다.]
반고는 지금 원시천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찬탈자라고 하지만, 실제로 반고는 자신의 역할을 빼앗겼기보다는 스스로 넘겨준 것에 가까웠다.
[나는 로고스와 싸우기로 다짐했고 너는 소중한 것을 지키겠다고 했지.]
“그때…… 함께 싸웠다면 달라졌을지도.”
[과거에 지나간 일을 되새기는 것만큼은 의미 없다. 중요한 건 지금이지.]
반고는 처음부터 원시천존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걸 감안해서 일부러 자신의 역할을 벗어던진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당장 이 자리에 모인 찬탈자 중에서 책벌레들과 사이가 나쁜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찬탈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원시천존부터 해서 일부 찬탈자들은 전대 주역의 이름을 빼앗은 것이 아닌 물려받은 것이었으니까.
억지로 찬탈한 것이 아닌 승계받은 자들.
로고스의 악행에 맞서려는 찬탈자들은 전부 그런 존재들이었다.
반면 책벌레들로부터 원망을 받고 있는 다른 찬탈자들은 로고스와 재단의 편에서 이쪽을 죽이고자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내분이 일어나는 일도 없이, 그들이 노려야 할 적은 뚜렷하고 명확했다.
“그래서 계획은 있어? 그냥 생각 없이 싸움질만 해 봤자 의미 없는 희생만 늘어날 텐데.”
모두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주적은 누가 뭐래도 로고스니까요.”
“그 로고스를 죽일 수는 있는 건가?”
“못 죽이면 안 할 생각이십니까?”
유현의 뼈 있는 질문에 손오공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로고스가 불사의 존재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녀석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거죠.”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재단의 최중심부. 녀석은 거기서 저를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지닌 코덱스의 페이지를 오른손 위에 띄웠다.
이제 코덱스에 대한 정보가 세계에 은폐되는 일이 없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 영롱하고 눈 부신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바로, 이 코덱스를 회수하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