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27화
연합의 중추가 된 올드 타운으로 돌아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미 바깥의 상황을 전해들은 것은 연합도 마찬가지인지, 그들은 멀리서 날아오는 유현을 알아보고 곧바로 자리를 마련해 줬다.
“휘유. 이거 참. 성령들은 출입하기 힘들다는 연합에 내가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는걸.”
미카엘을 등에 업은 메피스토는 연합의 올드 타운 풍경을 보며 과장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연합은 성령들이 지배하는 성군에 가지 못한 자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다. 그것이 어느덧 커지고 커져서 연합의 형태를 이루었고 일반적인 성군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게 됐지만, 그들의 설립 이념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것이다.
인간을 위한, 정확히는 하계의 존재들을 위한 나라.
그곳에 성령이니 뭐니 하는 존재들은 오히려 불편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래서 연합 내에 성령들의 출입은 엄중히 금지되어 있다. 물론 사절단의 조건으로 찾아오는 자들에 한해서는 환영식을 열어 주지만, 그 만한 일 자체도 거의 없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니까요. 무분별하게 적을 늘릴 필요는 없다는 거겠죠.”
“하긴. 그리고 내가 여기에서 날뛰어 봤자, 오히려 나만 더 위험할 테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올드 타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강자의 기운.
저것이 인간이 맞는지 의심부터 가는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의 기척이 피부를 타고 느껴진다.
‘일단 숫자만 최소 셋이고, 그에 준하는 자들은 훨씬 더 많은 건가.’
게다가 이쪽이 알아차린 것처럼, 저들 또한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서로 동시에 느꼈다는 것은 적어도 이렇게 타인의 수준을 감지하는 능력은 동급이라는 소리.
‘인간이라 해서 마냥 우습게 보면 안 되겠군. 지금까지 무시받던 연합의 전력이 이 정도라니, 거의 대성군에 필적하잖아.’
메피스토는 유현을 슬쩍 곁눈질했다. 아마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꼽으라면 바로 이 남자의 이름이 나올 것이다. 원래도 강했지만, 사탄이 죽기 전에 자신이 지닌 모든 이야기를 유현에게 전부 넘겼으니까.
우주의 탄생과 함께 살아온 1세대 성령, 사탄이 최후의 최후에 선택한 것은 인간이었다.
‘인간이 이 모든 것의 해답이었나.’
한때는 자신도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던 만큼, 메피스토로서는 지금의 현실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제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흐릿해서, 모래 한 줌의 정도도 남아 있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막연히 떠오르는 그 흐릿함만큼은 어찌할 줄 모를 정도로 그리워서, 그때 만약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헛된 망상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내려라.”
“이런, 일어났어?”
기절한 미카엘이 깨어난 것을 느끼기도 전에 미카엘이 그의 등에서 내렸다.
미카엘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더니 이윽고 한 쌍밖에 남지 않은 날개에 눈을 들였다.
찬란했던 12장의 날개 중 남은 것은 이제 단둘. 볼품없고 초라하며, 빛조차 잘 나지 않는 날개를 본 그녀는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이것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구나’ 하고.
그 모습을 본 메피스토는 그녀가 깨어나면 하려고 했던 말들을 집어넣었다.
지금 미카엘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서가 아니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괜찮았기 때문이다.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들어가죠.”
유현은 미카엘과 메피스토를 이끌고 회담이 열리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기사들이 곧바로 옆에 길을 터 주며 경례를 건넸다.
이미 안쪽에는 군주들이 모여서 진지한 얼굴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유현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뒤이어 그를 따라 들어온 두 성령을 알아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라.”
일어서거나 혹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사람은 총 넷.
최도윤과 서수민, 권지아, 그리고 유영민이었다.
최도윤은 싸늘한 시선으로 군주들의 행동을 일거에 제압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군주들이 다시 엉거주춤하게 앉자 최도윤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늦었군.”
“최대한 빨리 온 거야.”
무신경한 최도윤과 달리 유현은 반개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듯 답했다.
이제는 굳이 싸울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지만 케케묵은 감정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최도윤도 사정을 알고 있기에 그러려니 하고 자연스럽게 넘겼다. 그런 여유로운 태도가 또 유현의 심기를 거슬렀지만, 당장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최도윤이 아니었다.
“다들, 소식은 들었을 거라고 압니다.”
유현의 말에 모두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탄이 사용한 시화는 단순히 성령들만 본 것이 아니었다.
혼성계에 머물고 있는 모두가 그것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연합도 현상을 인지하고 있으며,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싸우는 건 미친 짓입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미들랜드 출신의 수인족 군주였다.
“재단이 얼마나 강한지 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찬탈자들? 그들에게 역할을 부여한 로고스라고요? 1세대 성령보다 훨씬 더 대단한, 진짜 신을 상대로 어떻게 싸운다는 겁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그가 지닌 일개 재단의 힘이 살리오 제국과 카멜롯을 지웠습니다. 1세대 성령인 사탄은 진실을 알린 것만으로 힘이 다해 사라졌죠. 솔직히 싸우는 건 개죽음입니다.”
“맞습니다.”
그 말에 다른 군주들이 반박했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고 고개를 숙이잔 말이오? 어디 그렇게 항복을 한다고 합시다. 다들 알고 있지 않소. 다음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죽는다고.”
“정말 극악의 확률로 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어차피 이미 찬탈자라 불린 1세대 성령들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려고 들 거예요. 이럴수록 더욱 맞서 싸워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싸움을 피해야 하자는 쪽과 그래도 싸워야 한다는 쪽.
항복하자는 쪽의 반응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그들도 보지 않았던가. 재단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그런 재단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도.
한낱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거역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러다 보니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모했다.
주먹다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언성이 절로 높아지는 꼴이 이미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점점 싸늘하게 굳어지는 서수민과 최도윤의 표정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유현은 이쯤에서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유현보다 먼저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자자. 다들 이야기 좀 들어주겠습니까?”
“당신은…….”
대성군 판데모니엄의 일곱 군주 중 하나인 교만의 메피스토.
그자가 나서자 회의장이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벌써부터 경청할 준비를 보이다니, 좋은 자세입니다. 아무래도 연합 여러분들은 지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시는 것 같은데, 제가 의견 하나를 내 볼까 합니다.”
“당신도, 사탄이 말했던 그 찬탈자 중 하나입니까?”
“네, 맞습니다.”
메피스토는 자신의 정체를 구태여 감추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게 인정하는 그 모습에 질문을 한 군주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그래서요?”
“네?”
“제가 찬탈자니까, 다음 세상에 가기 위해서 여기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줄 알았습니까?”
“그건…….”
“꿈 깨십시오. 평화와 타협을 주장하는 다른 여러분들도, 모두 정신 차리세요. 지금 연합이, 그것을 넘어서 우리 피조물들이…… 감히 창조주에게 평화를 주장할 처지라고 생각합니까?”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로고스의 목적은, 다음 시대를 위해 지금의 우주를 지우는 것이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꿈꾼다면, 그거야말로 잘못된 판단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 100명도 되지 않는 소수만 살아남는 거다.
“물론, 저는 운이 따랐기에 죽지 않고 이렇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 살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저희조차도, 다음 우주로 갈 수 있냐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우주가 몇 번이고 반복되면서, 찬탈자들 또한 계속 새롭게 갱신되어 왔다.
지금의 그 또한, 전대 메피스토를 쓰러뜨렸기에 이 역할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로고스는 기존 찬탈자들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란 듯이 다른 자들에게 자격과 힘을 불어넣어 기존 찬탈자들과 싸움을 일으켰죠. 당연히 자리를 두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승자만이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죠.”
요약하자면 이거다.
이쪽이 숙이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미 1세대 성령이라는 직위를 가진 주신들은 절대로 이쪽을 곱게 보지 않을 거라는 것.
결국, 어느 방향으로 가나 싸워야 하는 미래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그 종착지가 똑같은 것이라면…… 결국 가야 할 방향은 정해진 거 아니야?”
그러니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고.
당대 찬탈자가 직접 그런 경고를 날렸다.
“그런…….”
싸움에 반대하던 파벌은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이 되었다. 굳이 말하면 틀린 표현도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진짜 세상이 무너질 예정이니까.
“그러지 않아도 다른 대성군에서 이쪽에 연락을 취하던 참이었어요.”
회의를 주관하던 백서련이 그렇게 말했다.
연합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전과 유현의 활약 때문에 다른 대성군의 시선을 잔뜩 모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번 사탄의 방송이 직격타를 날렸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대성군 마비노기온이었다. 그들은 카멜롯이 사라진 이후로 이미 결정을 내렸는지, 곧바로 연합에 연락을 취해 왔다.
그다음으로 움직인 것은 바로 대성군 드래고니카였다. 용종들의 왕 중, 백린족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샤루리엘이 가장 먼저 연합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다음으로 반응한 것은 놀랍게도 대성군 극락정토였다. 석가모니의 죽음 이후로, 문을 걸어 잠그다시피 한 극락정토는 이번 싸움에서 연합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다.
“하나둘,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죠.”
백서련의 그 말에 모두가 작금의 현실을 인식하게 됐다.
대성군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힘을 합치기 위해 오고 있는 것이다.
마비노기온, 드래고니카, 극락정토뿐만이 아니었다.
“군주님들! 바깥을, 바깥을 보십시오!”
회의장 문을 박차고 경비대원 하나가 들어오며 그렇게 소리쳤다. 회의 도중에 갑자기 들어온 그의 행동은 분명 무례한 것이고 군법 회의에 넘기기 충분한 것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회의장의 거대한 창밖 너머, 경악하기 충분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으니까.
올드 타운의 바깥에서 거대한 군세가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연합과 싸우려는 것이 아닌, 연합과 공투하여 살아남기 위한 동맹을 제안하러 오는 것이다.
“저, 저건……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시선들이 보인다는 건, 천계삼십육천?”
“붉은 깃발과 황금 의자. 저건 분명 대성군 환인제국의 것일 텐데?”
“에덴! 에덴도 있다! 에덴의 천년왕국이 찾아왔어!”
단지 그들뿐이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아니, 지금도 놀라기엔 충분했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자들은 그런 생각을 더욱 무산되게 만들었다.
쿠르릉.
허공에서 번개가 번쩍인다 싶더니 황금빛이 회의장을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이윽고 외벽 유리창을 물처럼 가볍게 통과하더니 회의장의 중심에 우뚝 멈춰 섰다.
“오우. 다들 여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군.”
“제, 제천대성?”
한때는 천계의 악동, 지금은 하나의 부처가 된 손오공.
그의 등장에 다른 군주들도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시종일관 쿨한 스탠스를 취하던 유영민도 손오공을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유현은 자연스럽게 손오공을 환대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왔다. 그러는 너는 못 보던 사이에 더 강해졌군, 그래? 어때. 내가 갈피는 잡아 줬는데, 급화는 터득했냐?”
“어느 정도는.”
“그렇군.”
손오공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는 최도윤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주시했다.
“뭐야. 하나 더 있었잖아? 급화를 터득한 게.”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알아 알아. 나도 그냥 딱 알아본 거니까. 이거 재미있게 됐는걸.”
손오공도 이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았는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손오공님도 저희와 함께 싸우기 위해 오신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물어? 당연한 소리지. 나 투전승불 손오공을 포함해서, 나의 의형제들인 나머지 육대성 또한 이번 전쟁에 참전하러 왔다.”
“유, 육대성이 전부?!”
“마왕연합까지 나서다니!”
메피스토가 재밌다는 듯 나섰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제는 일곱 군주가 아니라 여섯 군주가 되었지만, 우리 판데모니엄도 함께 싸우도록 하죠.”
대성군 판데모니엄의 참전 선언.
그 외에도 온갖 지역의 성군과 군주들이 연합으로 몰려드는 추세였다.
로고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지금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