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426화 (426/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426화

사탄의 죽음과 동시에 시화는 종료됐다.

그러나 아쉬워 할 것은 없었다. 그가 죽기 전까지의 모든 광경은 서재를 통해 혼성계 전역으로 퍼졌다. 심지어 사탄이 죽는 순간의 모습까지도.

미카엘이 유현의 옆에 내려왔다. 그녀는 정말로 사탄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지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괜찮습니까?”

“…….”

유현이 물어도 미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녀의 감정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사탄님이 마지막에 떠나면서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미안했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올려 유현을 응시했다. 사탄이 죽기 전에 모였던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유현은 곧바로 미카엘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역시, 당신은…….”

“……난 미카엘이야.”

미카엘은 유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듯.

“이전의 이름은 잊었어. 아니, 그럴 자격이 없지.”

사랑했던 사람마저 잊은 채, 이 이름이 매몰되어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됐다.

어리석고 바보같이도, 스스로가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별들이 사라지고 새롭게 생겨나며, 인간이 문명을 건축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걸 떠올리는 순간이 하필 지금이라니, 이 얼마나 잔혹한 운명의 농간일까.

“난 이제, 진짜 미카엘이 될 수밖에 없어.”

그 남자는 죽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인간이었던 시절을 함께 하던 소중한 사람은 추억과 함께 가루가 됐다.

자신에게 인간이었던 시절을 칭할 자격은 없다.

“……괜찮습니까?”

“녀석은, 마지막에 어땠지?”

“늘 그랬듯이, 똑같았습니다.”

“그래. 똑같았구나.”

그 말에 위안이라도 된 것일까. 미카엘은 슬픔을 털어 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엘로힘은 사탄이 사라졌지만, 진실을 안 존재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주위를 배회하며 목숨을 끊을 기회만 노렸다.

“너는 도망쳐라. 엘로힘은 멈추지 않을 거다. 이미 대부분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이 근방 자체를 장악해서 전부 죽여 버릴 거야.”

“미카엘님은…….”

“우리도 일단 대피할 거다. 나는 시간을 벌 테니, 어서!”

어느덧 하늘에 거대한 소음이 드리더니, 일전에 카멜롯의 상공에서 보았던 집정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그때는 고작 하나였지만, 이번에 나타난 집정관의 숫자는 무려 열둘.

재단에 존재하는 모든 집정관이 전부 다 나타났다.

“미카엘님!”

“다들 대피해라!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쳐!”

미카엘은 자신을 따라온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미카엘을 두고 갈 수 없다는 듯 행동을 망설였다. 그 순간 엘로힘이 움직였다.

손이 쥔 창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오더니 에덴의 군단을 향해 쏘아졌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붉은 빛줄기들. 너무 많아서 눈으로 숫자를 헤아리기도 힘들다. 공간 자체가 전부 빨갛게 물들었다.

에덴의 천사 중 일부는 방어를 하거나 회피에 들어갔지만, 반응하지 못한 자들은 거기에 적중당해 저 아래로 추락했다.

엘로힘의 공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키이이잉.

집정관의 외눈이 타오르듯 빛나더니 이윽고 거대한 광선이 쏘아져 에덴 군단을 휩쓸었다.

아아악!

크아악!

집정관의 공격에 휩쓸린 천사들은 비명과 함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닿기만 해도 존재의 이야기가 완전히 분해되어, 재생도 회복도 할 수 없는 확실한 죽음을 선고받았다.

미카엘은 곧바로 6쌍의 날개를 펼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멈춰라!”

우렁찬 호통과 함께 각 날개에서 강렬한 빛이 폭사했다. 한계까지 압축된 빛은 이윽고 거대한 칼날로 변했다. 미카엘은 그 상태로 엘로힘의 군단 사이를 가로질렀다.

퍼버버버벙.

6쌍의 칼날. 총 12개의 날개가 내뿜는 압축된 빛에 잘려나간 엘로힘이 새하얀 폭발에 휩쓸리며 사라졌다. 단 일격에 수천이 넘는 엘로힘 대군이 사라졌다.

그러나, 재단에서 쏟아져 나오는 엘로힘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수만. 아니, 오히려 그 이상. 이대로 놔두면 엘로힘의 숫자는 억 단위를 가볍게 넘어갈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엘로힘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곧바로 미카엘이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리고,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손에 쥔 붉은 창이 미카엘을 향했다.

단 0.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시작되는 투척.

허공을 빽빽하게 채우는 붉은 빛줄기에 미카엘은 이를 악물며 날개를 몸에 휘감았다.

날개가 크게 부풀어 오르며 미카엘의 전신을 보호했다. 그 위로 엘로힘의 공격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미카엘에게 한 방 한 방의 위력은 별거 아니었지만, 그 숫자가 수천 수만을 넘어가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크윽!”

어떻게든 회피 기동에 들어가며 공격을 흘려내 보지만, 공간을 가득 채운 붉은 비를 전부 피하는 것은 미카엘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집정관의 존재가 너무 컸다. 놈들은 영악하게도 빛을 두르고 고속으로 이동하는 미카엘이 아닌,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에덴의 천사들을 노렸다.

“안 돼!”

허공을 가르는 붉은 광선.

조금 전에도 저것 하나에 수백이 넘는 천사들이 죽었다. 미카엘은 접었던 날개를 활짝 펼치며 집정관의 공격을 방어했다.

집정관의 힘은 엘로힘과 차원을 달리했다. 괜히 12개체 밖에 없는 상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일격 하나하나가 나라를 지우기 충분했고, 그것은 1세대 성령이며 전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카엘이라도 방어를 고집하는 것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것이었다.

하나, 둘, 셋.

광선의 숫자가 늘어나 어느덧 5개가 넘었을 때.

미카엘의 한 쌍의 날개가 검게 그을리더니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직!”

미카엘의 날개는 6쌍으로 총 12개.

이제야 그 중 두 개가 사라졌을 뿐, 아직 그녀에게는 10개나 되는 날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에게 집중되는 집정관의 공격은 그보다 훨씬 더 거셌다. 격류처럼 흘러들어오는 붉은 빛을, 미카엘은 단신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치이이익!

그녀가 지닌 날개가, 대천사로서의 상징이 점점 무너졌다.

하나씩, 그녀의 날개가 사라졌다. 어느덧 미카엘에게 남은 것은 단 한 쌍의 날개.

미카엘은 초조해졌다.

‘이 날개는 안 돼…….’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한 쌍의 날개. 소멸한 다른 날개보다 초라하고 크기가 작았지만, 모든 기억을 떠올린 그녀에게는 이 마지막 한 쌍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왜냐면 이건, 내가 가장 먼저 그에게 선물 받은 날개니까…….’

그러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날개마저 사라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녀를 지켜주던 새하얀 방벽이 점점 붉은 기운에 잠식된다.

어느덧 그녀의 시야를 물들이는 것은 집정관이 쏘아 내는 붉은 격류.

‘아.’

미카엘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애초에 방어는 그녀에게 별로 맞지도 않는 싸움 방법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선두에 서서 불타는 창과 검을 휘둘러 적들을 쓰러뜨렸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따라온 에덴의 천사들이 죽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그게 대천사 미카엘이 보여야 할 행동이자 마음가짐이니까.

어느덧 순백의 벽이 무너지고, 그 틈새를 비집고 집정관의 공격이 그녀를 향했다.

그 순간 유현이 나섰다.

“다윈. 부탁한다.”

[네.]

미카엘의 코앞에 선 유현의 등 뒤로 거대한 덩치의 다윈이 나타나 주먹을 뻗었다.

동시에 유현 또한 이쪽을 향해 짓쳐 드는 격류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궁극의 육체, 그것도 둘이서 만들어 내는 합격권(合格拳).

그것은 정확히 격류의 중심, 가장 취약한 부분을 타격하는 것도 모자라 그 너머까지 꿰뚫었다.

파아아악!

집정관이 쏘아 낸 붉은 빛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거기에 휩쓸린 엘로힘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적들의 진형에 큰 구멍이 났다.

“괜찮으십니까?”

“아…….”

“제가 돕겠습니다.”

미카엘의 상태는 유현이 보기에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녀가 지닌 아름다운 날개는 거의 다 타 버렸고, 찬란한 금발은 빛을 잃어 퇴색했으니까.

하지만, 회복의 여지는 있다. 지금이라도 이 장소를 벗어난다면 말이다.

‘그런데,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어느덧 주위를 포위한 엘로힘과 집정관들.

카멜롯 때에는 멀린이 모든 마력을 쥐어짜서 전이 마법을 발동했기에 벗어날 수 있었다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그런 도움을 바랄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카엘이 시간을 버는 사이 에덴의 천사들이 안전한 곳까지 물러났다는 것 정도.

남은 것은 유현과 미카엘, 단둘뿐이었다.

‘이대로 뚫고 가야 하는가.’

그러자니 부상 당한 미카엘의 상태가 걸렸다. 고민의 시간은 많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유현은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일단 이대로 뚫고 간다.’

데카르트의 힘을 사용하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겠지.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멀리서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지하라.]

그것은 유현과 미카엘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뚝. 대차 창을 던지려던 엘로힘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그것은 집정관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유현이 의아해하는 순간, 허공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수직으로 뚝 떨어지며 유현의 곁에 멈췄다.

멋진 수염을 기른 중년의 미남자였다. 검은 코트의 옷에, 어깨 위로는 검은 망토까지 두른 그는 그야말로 중세 시대 귀족에 어울리는 외모였다.

“내 이름은 메피스토펠레스. 도우러 왔다.”

“판데모니엄의 군주……?”

“자세한 건 나중에. 지금 시간을 멈췄지만, 그렇게 오래 붙들지 못해.”

당장에 집정관 중 일부가 끼긱 거리며 몸을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카엘은 내가 부축하지.”

“…….”

“이봐. 그렇게 못 믿는 눈빛을 보내는 것도 이해는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내가 판데모니엄이니 에덴이니 그런 걸 따질 거 같아?”

하긴.

그런 걸 따지려고 했으면 메피스토펠레스가 지금 나섰을 리가 없다.

유현은 결국 둘러업은 미카엘을 메피스토에게 넘겼다. 메피스토는 미카엘을 등에 업으며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메피스……토?”

“형이나 누님이나. 왜 바보같이 미련을 못 버려서 이런 꼴을 겪는 겁니까.”

“네가 왜…….”

“왜겠습니까. 수확의 시기가 다가옵니다. 이미 재단은 움직였고, 저희는 다시 선택을 내려야 해요. 형이 그런 바보 같은 짓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앞으로 몇 번은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었는데.”

이젠 죽어 사라진 사탄에게 푸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메피스토펠레스의 얼굴은 오히려 가볍고 경쾌하기까지 했다.

그의 눈동자는 앞서 나가는 유현의 등을 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뭐 어쩌겠습니까. 시원하게 갈아엎어야죠.”

“…….”

미카엘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사르르 감았다.

힘을 너무 소모한 나머지 차마 대답할 기력조차 없어 기절한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럴 줄 알았다며 그대로 미카엘을 업은 채 유현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 * *

사탄과 에덴의 영역에서 벗어난 유현과 메피스토는 그대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정했다.

“연합으로 갑시다.”

“1세대 성령이 둘이나 있는데, 가도 되는 건가?”

“지금 상황에서 성령이고 인간이고 따질 때로 보입니까?”

“하긴. 곧 전쟁이 나게 생겼는데, 그런 거 따지는 것도 웃기겠군.”

유현은 메피스토를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일면식도 없는 저희를 도와준 겁니까?”

“내가? 뭐, 여기 미카엘이랑은 나름 안면을 트긴 했는데.”

“말 그대로의 의미를 묻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흠.”

메피스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떤 바보 녀석이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미친 짓을 저질렀거든.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그렇다는 건 역시 당신도…….”

“그만. 나는 더 이상 옛날 인간 시절이었던 내가 아니야. 지금은 대성군 판데모니엄의 일곱 군주 중 하나인 메피스토펠레스다. 그거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저길 봐.”

메피스토가 가리킨 방향은 조금 전 그들이 겨우 벗어났던 곳이었다.

백과 흑의 대지가 메마르더니 점점 사막처럼 변하고 있었다.

“저건…….”

“로고스가 본격적으로 수확의 시기를 앞당긴 거야. 아니, 딱 지금이 타이밍이었는데 사탄이 고춧가루를 뿌린 셈이려나.”

“저게 그 준비 단계라는 말입니까?”

“‘나는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악령이 나온 것을 보았다.’ 유명한 구절이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당연히 정해진 수순이고.”

“묵시록의 구절이군요.”

“그래. 그리고 저곳이 바로 그 묵시록에서 나오는, 메기도 언덕이 될 거다.”

메기도 언덕.

다른 이름으로는 하르 메기도, 후대에서는 하르마게돈 혹은 아마겟돈이라 불리는 장소.

그곳에서 세상의 선과 악이 전부 맞붙는 대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예언이 있었고, 그것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아마겟돈이 벌어질 거다. 선과 악의 싸움. 놈들은 필사적으로 우릴 죽이려고 들겠지.”

“살아남으려는 우리가 악인 겁니까.”

“그렇게 해야, 후대의 우주에서 선이 승리했다고 떠벌릴 수 있거든.”

세계의 모든 군주가 군대를 모아 전쟁을 벌인다.

권지아가 오래전에 말했던, 별이 떨어지며 세상이 사라지는 멸망은 이것을 뜻했던 것이다.

“그러니 준비해야지. 이쪽도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랬죠.”

한 사람과 두 성령은 빠르게 연합의 영토로 이동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