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22화
유현에겐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아니, 과연 이걸 기회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내가 가야 할 길은 이것 하나뿐인데.’
이 파편의 힘을 지닌 채로 로고스의 편에 붙어 다음 우주를 대비하기 위한 찬탈자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된 삶을, 다음 우주에서 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오직 나야. 인간 강유현은, 그 어떤 존재도 대신할 수 없고, 그 어떤 존재도 대신 될 수 없어.’
거짓된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로 살아가면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리고, 다음 우주에서 살아남는다고 쳐도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얼마나 거짓된 삶을 살며, 스스로를 거짓말로 우롱하며 로고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유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싸웁시다. 함께.”
그 말이 떨어지자.
프라이티온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고, 책장 틈새의 책벌레들은 전율에 몸을 떨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다만, 이전처럼 구린 일을 뒤에서 꾸미거나 절 멋대로 이용하려고 들지는 마시죠.”
“이제는 안 그래. 그럴 생각도 없고.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내렸을 뿐이니까.”
프라이티온도 사실 누구보다도 유현에게 먼저 접근해서 이 세상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유현은 하계에 머물고 있었고, 자신은 숨어 지내는 처지라서 함부로 접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진청운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고 유현에게 그걸 전해 달라고 하기에는, 하계와 상계가 지닌 벽이 너무나도 두꺼웠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모든 진실을 전해 준 것에 다행이라 여기며 프라이티온은 하나의 비원을 이뤘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겁니까?”
“전쟁을 대비해야겠지. 제단이 움직이는 지금, 수확의 시기가 머지않았어.”
“전대 우주에서도 그랬습니까?”
“그때의 일은 자세히 몰라. 나도 코덱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프라이티온은 자신이 태어나게 된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번이 몇 번째 우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덱스에 적혀 있는 일부 내용으로 짐작건대 로고스는 초기 우주에선 자기 혼자서 직접 모든 이야기를 모으고 수집하고 만드는 것을 수행했어. 그러다 점차 시간이 흐르며 자신의 일을 도울 녀석들을 만든 거지.”
“그게 이야기의 왕이라는 거로군요.”
“우리가 태어나게 된 배경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회차로 따져도 1,000번 이상은 넘어가지 않았지.”
“……이야기의 왕들조차도 만들어지는 것과 사라지는 걸 반복했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프라이티온은 자신의 전대 프라이티온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았다.
그들은 결국 아버지의 뜻에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다음 세상의 거름이 되기 위한 길을, 그저 묵묵히 수행한 것이다.
프라이티온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누군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삶을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지녔다.
누군가 죽으라고 한다고, 그것에 쉽게 굴복해서 고개를 숙이는 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삶을 이어 나가는 것. 그것이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의 숙명이자 이유였으니까.
그렇기에.
전대의 죽음을 코덱스를 통해 알아낸 지금의 그는,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고자 했다.
로고스에게 반역을 들고, 그저 이야기를 수집하고 모으는 도구로써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나의 모든 것도 로고스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지.’
분명, 그런 불안감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이 로고스일지라도, 그것을 스스로 느끼고 창조주에게 반기를 드는 선택을 내린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기에 프라이티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외에 궁금한 것이 더 있나?”
“책갈피는 뭡니까?”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책갈피 소유자와 함께 지내고 있었지.”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코덱스의 마지막 파편의 소유자지만, 권지아는 코덱스와 함께했던 책갈피의 소유자였다.
“책갈피는…… 모든 우주가 끝과 시작을 반복하는 사이에 유일하게 한 지점을 고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존재지.”
“로고스는 왜 이걸 만들었죠?”
“시대의 변화를 관측하기 위해서.”
“변화를?”
“너도 알다시피 이 우주는 몇 번인지 모를 회차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이 반복되는 우주의 흐름이, 이 전과 똑같이 흘러간다고 생각해?”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큰 흐름이라면 분명 비슷하게 가겠지만, 세세한 부분은 절대로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자그마한 변화로부터 비롯되는 이후의 연쇄적인 작용까지도.
“책갈피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살피기 위해 존재한다.”
수확의 시기로부터 약 10년 전.
책갈피가 새롭게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로부터 5년 뒤에 종말이 벌어졌고, 또 5년 뒤에 마지막 시련이 끝났다.
“그렇게 해서, 변화를 확인해서 뭘 할 속셈이었던 거죠?”
“모른다. 단지 로고스는 책갈피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어. 애초에 책갈피를 지니는 것은 아주 사소한 변화를 가장 크게 받아들이는 인간이었으니까.”
대대적으로 책갈피는 인간에게만 주어졌다.
왜?
인간이야말로, 격동하는 세상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존재니까.
성령들은 무시하고 넘기게 되는 사소한 사건마저도, 인간에게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결국, 이 무수히 반복되는 회차야말로 로고스가 하계의 수준을 짐작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그마한 실험실이었던 것이다.
권지아는, 그런 책갈피를 새롭게 이어받은 실험체였고.
“…….”
책갈피가 그런 것이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된 유현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권지아가 자신의 삶을 저주하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뭐였는가.
누구보다도 그것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고작 한 존재의 실험에 의한 결과였다니.
노력해서 반복하는 삶의 끝에 구원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지만.
과연, 그게 사실일까?
“표정이 좋지 않군.”
유현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알게 된 그는 권지아의 삶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바라던 구원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책갈피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책갈피를? 책갈피는 코덱스와 한 몸이야.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없어. 양도를 하면 모를까…….”
“그렇게 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고요.”
“그런 셈이지. 바꾸려면, 책갈피의 사용처를 다르게 할 수밖에 없어. 본래 책갈피의 주인은 로고스고, 그런 로고스는 책갈피를 실험의 용도로 활용했지. 지금은 거의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지만, 일단은 그래.”
“……로고스를 없애기만 하면.”
“그래. 돌고 돌아 목적은 하나라는 셈이야.”
방법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창조주나 마찬가지인 로고스의 죽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로군요.”
“그래. 절대 혼자서는 힘든 일이지. 지금의 전력으로도 부족하고.”
책더미 사이에 모여 있는 책벌레들. 한때는 신화의 주역이었지만, 지금은 찬탈자들에게 밀려나 세계의 어둠 속에 숨어 지내는 존재들.
그 자체가 지닌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프라이티온은 그래서 다른 성령들에게도 반역의 씨앗을 뿌렸다.
“아서에게 진실을 알려 준 것도 그쪽이었죠.”
“아서 뿐만이 아니야. 대성군의 존재들에겐 전부 다 씨앗을 뿌렸다.”
“그들이 뭐라고 답하던가요?”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
이 올곧지 못한 세상을 향한 분노를 품은 성령도 있었고, 그저 자신의 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진실을 외면하는 성령도 있었다.
“이미 제단에 붙은 녀석들도 있었어.”
“그곳이 어디죠?”
“올림포스, 아스가르드, 아눈나키, 아베스타 그리고 리그베다와 헤르모폴리스.”
“대성군이…… 무려 여섯이나.”
대성군이 하나만 있어도 눈앞이 막막해지는데,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숫자였다.
“다들 남의 것을 찬탈하며 살아남았고, 다음 우주에서도 이번처럼 살아남을 거라고 기대하는 욕심쟁이들이지.”
“그렇다면 나머지 대성군들은…… 제단에 맞서려는 쪽입니까?”
“아니. 그들은 아직 선택을 보류했다. 제대로 내리지 못했지. 이번 카멜롯 사태로 인해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지만, 아직 부족해.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하다.”
“그걸 어떻게……?”
“나도 모르지. 나는 씨앗을 뿌렸지만, 씨앗을 뿌린 토양에서 새싹이 자랄지 자라지 않을지는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니까.”
“제단의 만행을 알리는 건요?”
“그것도 생각은 해 봤지만.”
프라이티온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혼성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에 이 진실을 알릴 방법이 없어.”
“네?”
“잊었어? 모든 성령이 하나로 된 이야기를 전해 받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통한 시화뿐이었다는 걸. 하지만 이제 그런 시화를 선보일 수 있는 3개의 조직은 문을 걸어 잠갔지.”
“……정보 통제.”
“맞아.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소식이 멀리 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늘리는 결정적인 역할은 하겠지. 카멜롯 사태에 가까이 영역을 맞댄 대성군은 이미 사태를 분석했겠지만, 바깥은 어떨까.”
이 세상은 단순히 대성군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성군보다 자그마한 조직인 일반 성군도 있으며, 그런 성군들의 틈바구니에서 강자라 일컬어지는 군주가 땅을 지배하기도 했다.
이번 카멜롯 사태는, 그런 자들의 귀에까지는 닿지 않았을 터.
“절대자라는 자리에 비해 하는 짓은 영악해. 그게 로고스야.”
“…….”
유현 또한 프라이티온과 같은 생각이었다.
로고스는 우주를 재시작할 수 있는 힘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을 시행하는 행동은 매우 교활했다.
이야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통제하고자 하다니.
‘그래. 애초에 천체주식회사를 비롯한 엑소도스, 희극단패부터가 로고스의 일을 수월하게 돕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어.’
이야기의 왕들이 합심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시화를 중단한 것도 수확의 시기가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이야기들이 혼성계에 자유롭게 흘러 다닐 경우에, 바라지 않던 진실까지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경계한 것이다.
뒤이어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로고스가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놀랍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음?”
“로고스는, 저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지전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이 방법은 분명 효과적이지만, 정말로 녀석이 이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는 것을 반복하는 창조주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뭐든지 가능한 전지전능한 존재가, 가장 효과적인 길을 마다하고 돌아서 간다니요.”
“그건…….”
프라이티온도 그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뭐든 할 수 있다면 그저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저항하는 존재들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을 터다.
그러지 않았다?
그게 아니다.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성령들의 머리 위,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신이라 일컬어지는 로고스지만…… 그 또한 한계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이다.
“정보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고, 또 자신을 따르게 할 찬탈자들의 도움이 필요했을 겁니다. 왜?”
“……아무리 로고스라 하더라도, 모든 성령이 죽고 싶지 않아서 발악을 하는 것은 껄끄러울 테니까.”
“찬탈자의 존재는 일종의 이쪽의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내부에 심은 스파이입니다. 누구나 찬탈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성령들이 하나로 규합하지 못하게 막는 셈이죠.”
“그리고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책벌레들의 존재까지.”
“성령들은 책벌레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소탕하려 하죠.”
그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그만큼 로고스의 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어쩌면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은, 오래전 회차에서…… 한번 크게 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그럴 가능성이 크군. 그 때문에 업무를 분담하고, 경계를 명확히 나누면서 전과 다르게 확실한 통제를 이루려 했다는 건가.”
유일한 궁금점은 대체 왜 로고스는 이 세상을 이렇게 반복을 해 가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가였다.
하지만, 유현과 프라이티온은 곧바로 호기심을 억눌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나머지 세력을 어떻게든 규합할 수만 있다면, 가능성은 있다는 말은 잘 들었어.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심각해. 남은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는데, 이런 소식을 전할 방법이 이제 없으니까.”
“전부 서재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죠.”
“그래 맞아. 텔러 조직에서 운영하는 서재는 회사가 문을 닫으며 전부 사라졌으니.”
“아뇨.”
유현은 고개를 저으며 프라이티온의 말을 부정했다.
“전부 사라진 건 아닙니다.”
아직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