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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420화 (420/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420화

유현은 진청운의 모습을 스윽 살피며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단순히 눈앞의 상대를 조롱하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니었다. 진청운의 상태는 살아 있는 시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었다.

앉아 있는 몸은 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 있었고, 피부는 메마른 고목나무처럼 거칠고 곳곳에 잔주름이 져 있었다.

예전의 그 수려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금의 그는 남들의 5년이라는 세월을 본인만 10배 이상 겪기라도 한 것 같은 몰골이었다.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르지.”

진청운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 여유로운 행동과 말투는 시간이 흘러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불렀다고.”

“그래. 모드레드에게 부탁을 했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유현은 진청운의 행동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얼굴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모르진 않을 텐데?”

“맞아. 사실 난 네가 나를 보자마자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지금의 진청운은 유현이 손만 가져다 대도 힘없이 쓰러질 정도로 나약해진 상태.

그가 전성기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유현의 앞에서는 별 앞의 반딧불이에 지나지 않았다.

진청운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알아. 뭐, 나도 양심이 있지 과거의 일을 모르쇠로 넘기려고 하지는 않거든.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그리고 그 몰골은 대체 뭐냐. 그런 짓을 벌이면서 살아남았으면, 적어도 어디선가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어야지.”

함께 다니던 언리쉬드의 동료들은 어딜 간 건가.

지금까지 모아 온 파편은 또 어딜 간 거고, 지금 이 꼴은 뭐란 말인가.

“배신이라도 당한 거냐? 부하들에게?”

“예언자가 뒤통수를 맞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겠네.”

“그게 아니면 그 꼴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데.”

“이건…… 내가 욕심을 부렸기에 벌을 받은 거야.”

“욕심?”

“혹시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내 선에서 이 모든 굴레를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만심.”

“그게 무슨…….”

이해하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진청운을 보며 유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몰골이 모종의 실수로 인한 결과물이라는 건가?

“뭐, 그쪽의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야. 애초에 이걸 내가 잘났다고 떠들 처지도 아니고. 분수에도 맞지 않는 것을 바랐다가 벌을 받은 걸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잖아?”

“대체, 누가 널 그렇게 만든 거지?”

“거짓된 예언자에게 벌을 내릴 존재가 누가 있겠어. 바벨탑 무너뜨리고, 세상을 홍수로 휩쓸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날개를 녹이는 건…… 머나먼 신화나 지금이나 항상 정해져 있잖아?”

“너…….”

유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혼자서, 로고스에게 맞선 거냐?”

“…….”

진청운은 답하지 않고 묘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비쩍 마른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등 뒤에 자리 잡은 문을 가리켰다.

“그분을 만나러 왔지? 들어가 봐. 저 안에 계셔.”

“…….”

“너무 그렇게 보지 마. 네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도망가지도 않고 계속 이곳에 있을 테니까. 네가 이곳에 찾아온 순간, 그리고 내가 저 문을 가리킨 순간 나의 역할은 이미 다 한 것이나 다름없어. 이젠 난 쓸모가 없으니, 이따가 날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맘대로 해.”

유현은 진청운을 지나 오두막에 딱 하나 있는 문 앞에 섰다.

“들어가 봐. 그분도 널 애타게 찾고 있었으니까.”

그 말이 허락인 것처럼 유현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끼이익. 오두막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안쪽의 문 또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내부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던 순간, 유현은 자신이 이미 문 안쪽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대체 어느새?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가득했다.

앞도, 아래도, 위도 마찬가지다.

‘이상하군.’

화안금정을 지니고 파편의 힘을 사용하며 급화까지 터득한 자신이, 순간이지만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안쪽 공간으로 끌려온 것이다.

그만큼 이 공간이 특이하며, 자신을 초대한 상대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유현은 어둠 속을 걸었다. 걷는 건지. 아니면, 하늘을 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기묘하게 생긴 구조물들이었다. 어쩌면 무언가의 기둥일지도 몰랐다.

빛이 없어서 아무것도 보여야 하지 않을 텐데도, 그 기둥처럼 추정되는 것은 길을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유현을 인도했다.

유현은 그 정해진 길을 따라 쭈욱 걸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것은, 더 이상 구조물이 길을 안내해 주지 않게 됐을 때, 그리고 이쪽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반겨 주는 검은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왔구나.”

“당신이, 진청운이 말한 검은 존재.”

“그래. 꿈에서 만났었지?”

검은 존재는 씨익 웃었다. 인간의 형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었지만, 유현은 그가 웃고 있다고 여겼다.

“여기는 좀 삭막하니 장소를 바꾸지.”

그가 손가락을 따악 치는 순간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에 빛이 들어서더니 이윽고 거대한 서재로 바뀌었다.

동그란 홀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도서관. 주위에 보이는 것은 무수히 쌓인 책이 가득한 책장들. 그것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까마득한 높은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화려한 대리석 타일이 깔린 홀의 중심, 그곳에 한 권의 책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여기는……?”

“내가 일하던 곳의 모습을 어레인지 해서 본뜬 장소야.”

검은 존재.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이야기의 왕 프라이티온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며 그렇게 말했다.

도서관의 사서의 복장을 한 그는 안경을 쓴 선이 가는 미남이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것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 편한 모습으로 의태했다는 것을 곧바로 꿰뚫었다.

애초에 같은 이야기의 왕 중 롯피우트의 본체를 본 입장에서, 그와 대등한 프라이티온의 본 모습이 저런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 궁금한 게 많겠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

“저 책은 뭡니까?”

“아. 저거?”

홀의 중심에 놓인 황금빛 책. 그것에 기시감을 느끼며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했던 것이었다.

“코덱스. 태초의 서. 로고스가 집필한, 이 세계의 근간.”

“역시…….”

“물론, 저건 진짜가 아니야. 이 공간 자체가 내가 만든 것이고, 저 코덱스 또한 그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진짜에는 한없이 부족하지.”

“…….”

유현은 말없이 프라이티온을 주시했다. 도저히 오엘로가 경고했던 것과 이미지가 전혀 맞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프라이티온은 조금 더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끔찍한 괴물들의 수괴였는데, 지금 마주하는 프라이티온은 매우 신사적인 존재였으니까.

“내가 이렇게 대하니까 이상해?”

프라이티온도 유현의 시선이 뭘 뜻하는 건지 알아차리고는 소리 없이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당신은…… 책벌레들의 주인이 아닙니까?”

“책벌레? 아. 너희는 그렇게 부르지. 그보다 내가 걔들의 주인이라니.”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주인이라…… 나는 네가 말하는 녀석들의 주인이랑은 거리가 멀어. 정확히는, 걔들의 대장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대장과 주인은 달라. 대장은 조금 더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맺어진 거고, 주인은…… 말 그대로 그 아이들을 탄생시키고 생사여탈권까지 손에 쥐고 원하는 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훨씬 더 수직적인 구조를 뜻하니까.”

“그렇다는 것은, 당신이 책벌레를 만들지 않았다는 겁니까?”

“뭔가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나는 그 아이들을 탄생시키지 않았어.”

프라이티온이 허공에 손가락을 까닥이자 책장에 꽂힌 책 중 하나가 날아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책벌레를 만든 건 나의 증오스러운 아버지, 로고스니까.”

동시에 책이 펼쳐지고, 유현의 눈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너는 적어도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을 거야. 단순히 네가 회귀를 한 것이 아닌, 반복되는 우주의 다음 시간대에 도착했다는 것까지도.”

도서관의 거대한 천장이 우주로 바뀌었다. 책들은 전부 별이 되었고, 그런 책들을 묶어 주는 책장은 은하수를 이루었다.

“이 세상은 반복되고 있어. 몇백 번 수준이 아니야. 몇천 번. 몇만 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반복하고 또 반복했지.”

우주의 흐름이 바뀐다. 별들이 생성되고 사라지며, 우주가 팽창하고 다시 수축했다.

혼성계를 포함한 우주는 이미 수차례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 세상 속에서, 책벌레라고 불리는 자들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라. 너희들은 책벌레가 이 세상을 파괴시키는 괴물들이며 갑자기 생겨났다고 믿지만, 이들은 오히려 기존에 존재하는 자들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부터 세상에 머물렀지.”

“그건…….”

“그래. 책벌레들은 바로 이전 우주의 성령들이었어.”

풍경이 휘리릭 변하더니 이윽고 하나의 광경을 비추었다.

그것은 하늘 높이 치솟은 산이었다. 구름 위에서 무수한 벼락이 지상으로 떨어졌고, 그런 지상 아래에는 괴물이 천천히 산 위로 오르고 있었다.

벼락이 지져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괴물의 시선은 산꼭대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건…… 올림포스?”

“신화 대전 때의 올림포스야. 보다시피 하늘 위에서 벼락을 내리는 것은, 올림포스의 주신이자 가장 유명한 1세대 성령인 제우스고. 그 아래에 벼락을 맞고 있는 것은…….”

“……티폰.”

“맞아.”

티폰은 제우스가 티탄들을 지하 어둠속에 가둬 버리자,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그런 제우스를 벌하기 위해서 어둠의 신 타르타로스 사이에 낳은 최강의 괴물이다.

티폰의 존재 의의는 신들을 멸하기 위해 태어난 신멸자.

일신의 힘만으로 올림포스의 모든 주신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으며, 신화를 언급할 때마다 반드시 나오는 최강의 책벌레 중 하나다.

“대부분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그렇게 알려져 있다?”

“지금의 역사에선 이 티폰은 제우스를 죽이기 위한 괴물이고, 제우스는 올림포스를 지키기 위해 그런 티폰을 쓰러뜨렸다고 했지.”

이외에도 티폰은 에키드나와의 사이에서 유명한 괴물들을 낳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케르베로스, 키메라, 오르토스, 히드라, 네메아의 사자, 스핑크스 등등.

티폰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대성군 올림포스 내에서도 상당히 각별한 수준.

“이 티폰이, 전 우주의 성령이었다고요?”

“그냥 성령도 아니지. 바로 그가 이전의 ‘제우스’ 였으니까.”

“그런…….”

티폰이 이전 우주에서 제우스였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제우스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세상은 몇 번이고 리셋을 반복했지. 그럴 때마다 로고스는 많은 생명체를 지우고자 했어. 하지만…… 오래 살아온 위대한 성령들은 그에 반발했지. 미치지 않고서야 세상을 지우고 모든 것을 없애고 다시 시작한다는데, 순순히 응하겠어? 그래서 로고스는 방법을 내세웠어.”

“방법이라고요?”

“선택받은 소수에게 다음 우주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한 거지.”

로고스는 모두를 살리려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죽이려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죽이고, 무로 되돌린 뒤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에게도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는지, 로고스는 자격이 있는 자들을 선별해 다음 우주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지금의 제우스도, 이전 우주에서는 전혀 다른 존재였지. 그는 로고스에게 받은 힘과 자격으로 전대 제우스를 쓰러뜨리고, 자신이 제우스의 자리를 가져간 거야.”

“신화 속의 주신들이…… 본래의 존재가 아니라 부여받은 역할이었다는 겁니까?”

“꽤나 놀란 모양이네.”

유현은 그 말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놀랐다고? 당연히 놀랄 수밖에. 세상의 진실이 이렇게나 충격적인데,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너희들이 책벌레니 괴물이니 하던 티폰과 에키드나는, 전대 우주에서 제우스와 헤라의 역할을 맡았었지. 그런 그들 또한 이전 우주에서 전전대 제우스와 헤라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거고.”

“하지만, 지금 티폰은 아직…….”

“그래. 워낙 강대한 존재라 단순히 우주를 재시작한다 하더라도 놈들은 사라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이 세계에 허락받지 못해 변질되고 말았지.”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신화 속의 괴물들.

그들이 사실은 전 우주의 신들이었으며, 이렇게 끔찍한 힘과 외형을 지닌 것은 지금의 세계가 그들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전 우주의 존재들이었기에 지금의 우주와 상충되었고, 그렇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괴리를 일으켜 텍스트를 분해시키는 책벌레가 된 것이다.

동시에 풍경이 바뀌며 여러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요르문간드를 죽인 토르.

티폰을 봉인한 제우스.

아포피스를 몰아낸 라.

브리트라를 쓰러뜨린 인드라까지.

“세간에서 가장 위대한 별이라고 치켜세워 주는 대부분 주신은, 로고스에게 선택을 받아 그런 ‘역할’을 부여받은 대역에 지나지 않아.”

“…….”

“그게, 이 세상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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