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415화 (415/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415화

오엘로의 활약과 아서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인해 카멜롯의 시민들은 기적적으로 안전하게 카멜롯 바깥으로 대피할 수 있게 됐다.

어느덧 도시에 남아 있는 존재들이 없게 됐을 때, 멀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전이 마법을 준비했다.

“다 끝났으니 이제 우리만 벗어나면 되네.”

동시에 하늘 위에서 거대한 섬광이 번쩍 터졌다.

그것은 아서의 엑스칼리버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광채가 집정관을 가격하면서 터진 폭발이었다.

집정관이 한차례 크게 휘청이는 지금, 그들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아서!”

케이가 아서의 이름을 외쳤다. 숨을 헐떡이던 아서는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의뢰는 끝났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오엘로는 아서와 가벼운 악수를 하며 곧바로 마차에 탑승했다. 오엘로와 함께 온 다른 해결사들도 빠르게 마차로 합류했다.

오엘로는 마차의 문을 닫기 전, 유현에게 말을 건넸다.

“근처에서 기다리마.”

“예.”

이윽고 황금 마차는 왔을 때와 같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며 카멜롯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것은 소수의 원탁의 기사와 아서왕, 그리고 유현과 서수민이 전부였다.

멀린이 주문을 읊자 그들의 주위로 곧 푸른 마법진이 생성됐다. 이것이 이제 마지막 전이 마법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아서는 점점 사라지는 황금빛 장벽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멸하는 장벽의 틈새로 엘로힘이 창을 쥐고 내려왔다. 놈들은 죽여야 할 사람들이 없었음에도 어떠한 감정의 동요 없이 차분히 창을 쥐며 카멜롯을 향해 겨누었다.

그들의 목표는 카멜롯을 이 혼성계에서 지우는 것.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죽지 않는 한 멈추지 않는다.

세계의 의지는 거역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입맛이 썼다.

“아서. 어서 떠나자. 카멜롯이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왕국은 다시 재건할 수 있어.”

“왕국의 재건인가…….”

케이의 말에 아서는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듯 중얼거리더니, 불쑥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사실은 그냥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지내고 싶었어.”

“뭐? 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평범하게 사랑을 하고, 평범하게 가정을 갖고, 평범하게, 평범하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었어.”

“아서 너…….”

“하지만 그렇게 안 되더라고.”

아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슬픈 미소였다.

케이는 그런 아서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없었다. 가레스도, 베디비어도, 멀린도, 란슬롯도 마찬가지였다.

아서는 왕이 됐다. 바위에 꽂힌 칼리번을 뽑았고, 호수의 여인에게 엑스칼리버를 받아 왕이 되어 나라를 이끌었다.

그렇게 나라를 이끌고, 그러게 나라가 멸망했다.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어야 할 이야기는 배신과 내분으로 막을 내렸다.

“케이. 멀린. 가레스. 란슬롯. 그 외에 모두.”

아서는 이쪽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엘로힘과 집정관을 보며 말했다.

“모두 날 도와줘서 고마웠다. 내 이야기는 이제 여기까지인 것 같다.”

“너…….”

“이대로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놈들은 멈추지 않을 거야. 제단의 목적은 카멜롯이지만, 가장 없애고자 한 것은 로고스의 이름을 알린 나일 테니까. 내가 어디를 가도, 제단은 끝까지 쫓아와서 모두를 죽이려고 하겠지.”

“혼자, 남겠다는 거냐?”

“방법이 그것뿐이니까.”

케이는 그러지 말라고, 함께 싸우자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제단의 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빈말로라도 싸우겠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못했다.

만약 아서를 데리고 카멜롯을 탈출한다 해도 제단은 끝까지 쫓아올 테고, 그로 인해 무수한 존재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어쩌면 차라리 여기서 아서 하나의 목숨으로 끝낼 수만 있다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케이는 자신이 아서를 버리려고 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 아무리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그렇지 왕을 버리려고 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자책을 하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혜안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양자택일조차 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받는 상황.

케이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들 너무 슬퍼하지는 마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대체, 왜……!”

“가레스.”

“차라리……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으면……!”

가레스가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진실을 알았기에 제단이 움직였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저 주어진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면서 지냈다면…… 적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레스. 그것은 비겁한 도망이야.”

“왕이시여…….”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스스로 억압받는 삶을 택한다는 것은…… 그건 기사 이전에 이지를 지닌 존재로서 절대 넘길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서의 시선이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는 유현을 향했다.

“갑자기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너보다 이런 대답에 더 적합한 존재는 없으니까.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세상의 뜻을 거부하는 자유의 탐구자. 너는 선택을 내렸지.”

“……저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말 안 해서 그랬지, 고백하면 나도 네가 하계에 있을 때 시화를 하는 것을 몇 번 구경했거든. 정말 재미있게 봤지. 멋지던데? 특히 그 마지막 기사 이야기는 최고였어. 같은 기사로서 감탄만 절로 나왔지.”

“그건…….”

“이제는 판에 박혀서 잊혀진 기사도, 그것을 추구하는 자의 모든 계보를 이은 마지막 존재. 그게 바로 너잖아? 그런 네가 설마하니 세상의 진실을 알고 그 끝을 향해 나아가는 자였다니. 이런 게 바로 운명이려나? 참 재미있는 거 같아.”

“운명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이죠.”

유현의 칼 같은 대답에 아서는 벙찐 표정이 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러네. 맞아. 운명이라니. 운명 따위를, 네 숭고한 그 선택에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미안. 무례를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그래. 마지막 기사이자 책더미 군주 강유현. 내 여정은 결국 여기서 끝나겠지만, 너는 아니야. 너는…… 더 앞으로 나아가겠지. 그리고 이 세상의 끝에 도달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걸 받아.”

아서가 그렇게 말하며 내민 것은 바로 엑스칼리버였다.

왕의 자격이라 할 수 있는 금빛 검을 본 케이와 가레스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아서!”

“왕이시여!”

“시끄럽게 다들 왜 그래?”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엑스칼리버는…….”

“이건 내 선택이야. 이곳이 내 이야기의 끝이고, 나는 더 이상 너희와 함께할 수 없어. 그러니까, 적어도 같은 뜻을 품은 사람의 여정에 보탬이 되게끔 도움을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이 엑스칼리버가 바로 아서 팬드래건의 마지막 안배이자 선물이었다.

“앞으로 있을 일에 비하면 이 엑스칼리버 조차 ‘고작’이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받아 줘.”

“……아니요. 과분한 선물입니다.”

“아주 약간이라도 좋으니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야.”

유현은 머뭇거리는 손으로 엑스칼리버를 양도받았다. 주인을 가리는 검이라고 했는데, 엑스칼리버는 유현이 쥐어도 잠잠했다. 오히려 자신의 새로운 주인을 인정했다는 듯 은은한 빛마저 뿜어냈다.

“이제 그건 네 거야.”

“……잘 쓰겠습니다.”

“아서. 그러면 너 무기는 어쩌고…….”

아무리 아서라 하더라도 저 정도의 적들을 상대로 맨몸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아서는 피식 웃으며 하나의 창을 꺼내들었다.

“그건…….”

“롱고미니아드(Rhongomyniad). 내 최후의 무기이자, 내 아들을 찔러 죽인 내 죄업의 상징. 이게 나와 마지막에 함께 할 녀석이야.”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창은 수수하게 생겼지만, 무엇보다도 섬뜩한 예기를 뽐냈다.

아서는 최후의 전장에서 마지막 무기로 롱고미니아드를 택했다. 이것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카멜롯 하늘을 뒤덮은 황금빛 장막이 완전히 사라지고 엘로힘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

“자. 놈들이 거의 다 왔네. 대화는 여기까지야. 멀린. 준비됐어?”

“예. 왕이시여.”

“멀린. 지금까지 고마웠어. 함께해서 즐거웠고.”

“왕이시여. 저는…….”

멀린은 무언가 한탄하듯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쪽을 향해 전혀 사심 없이 웃는 왕의 마지막 모습을, 도저히 추한 몰골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예. 저 또한, 즐거웠습니다.”

멀린은 머나먼 과거를 회상했다.

아서의 아버지 우서 팬드래건을 섬기고, 그의 핏줄이었던 아서를 발견하며 그를 왕이 되도록 도왔을 때.

결국 모든 미래를 보았지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니뮤에의 배신을 달게 받으며 바위 아래에 봉인 당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한 점이 하련하게 남았다.

만약, 자신이 운명을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아서를 그저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남게 해서 행복하게 살길 기도하고,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적어도 이런 괴로움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래도 웃으며 보내야 한다.

그것이 왕을 섬기는 자로서, 왕을 모시는 자로서 마지막까지 보여야 할 예우니까.

멀린은 마지막 전이 마법을 발동했다.

“다들. 잘 가라고.”

아서는 전이의 빛에 휩싸인 전우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그들이 빛과 함께 사라졌고, 카멜롯의 반파된 왕성의 꼭대기에는 아서 혼자만 남게 됐다.

도시는 황량했다. 시민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떠나가고 오로지 그만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이게 혼자 남는다는 기분인가.

아서는 롱고미니아드를 고쳐 쥐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거라면…… 이제 아발론에 가서 깨어나는 것도 못 하겠군.”

자조하듯 중얼거리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꺾이지는 않았다.

가자.

왕이 해야 할 일을 하자.

비록 원해서 된 왕이 아니었지만, 왕이 된 이후로 그 자리를 소홀히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너무 매몰되어, 너무 많은 것을 놓쳐 오히려 후회까지 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파앗!

다리에 힘을 주며, 높이 뛰어오른다.

아서는 롱고미니아드를 쥐고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엘로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무수한 흰색 천사들과, 그에 맞서는 단 하나의 왕.

그들이 서로 충돌하기 직전, 아서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이제는 꿈에서나 겨우 들을 수 있을까 한 그리운 목소리에.

아서의 시선이 목소리가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모드레드.’

자신의 아들.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해 버린 불쌍한 아이.

마비노기온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탄의 영역인 저승에 떨어진 그 아이가, 카멜롯의 바깥에서 자신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서.’

손에 쥔 창의 감촉이 더욱 섬뜩하고 무겁게 다가온다.

그는 이 창으로 캄란 전투에서 아들을 찔러 죽였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카멜롯을, 더 나아가 브리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모르간.’

모드레드의 곁에는 눈물을 흘리는 모르간도 함께였다.

‘예전처럼 돌아가자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아서는 과거를 추억했다.

모르간과 사랑을 하고, 모드레드가 태어났을 때.

그에게 있어서 이제는 몇 없는 진실로 행복했던 순간을.

이제 다시는 도달하지 못할 그의 이상향이었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와라!”

그는 적어도 이 순간, 왕의 지위를 벗어던진다.

반역으로 무너진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그가, 스스로 반역에 몸을 담아 세상을 향해 창을 겨눈다.

반역의 왕 아서 팬드래건.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자 최후의 이야기였다.

“로고스의 개들아!”

엘로힘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거대한 질량의 속에서 엘로힘의 창이 육신을 유린한다. 그래도 아서는 웃으며 롱고미니아드를 휘두르고 찌르며 엘로힘을 쓰러뜨렸다.

어느덧 아서의 모습은 엘로힘들에게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나머지 엘로힘들은 지상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무수한 빛과 섬광이 터지고, 카멜롯의 성 위로 빛의 기둥들이 떨어졌다.

폭발과 함께 건물이 무너지고 성벽이 잿더미로 변해 사라진다.

생존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들의 왕과 도시가 함께 사라지는 순간을.

그저 바람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반역의 왕 아서는 카멜롯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이전의 신화와 다르게 그는 더 이상 아발론에 가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올 거라는 희망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비록 돌아오지 못하는 그였지만, 뒤에 남겨진 자들의 마음에 자그마한 씨앗을 심었으니까.

반역의 씨앗을.

* * *

유현은 숲의 한적한 공터에 도착했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른 숲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잔뜩 뽐냈다.

서수민은 바깥에서 따로 기다려 달라고 하고 혼자만 온 참이었다.

그런 유현을 맞이해 준 것은, 먼저 도착해 바위에 걸터앉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금발 머리 소년 오엘로였다.

“왔냐?”

“예.”

“의뢰주는…… 어떻게 됐지?”

“본인이 원하는 최후를 맞이했더군요.”

“그런가.”

오엘로는 바위에서 내려오며 유현의 앞에 섰다.

“할 이야기가 많지?”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