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07화
아서왕이 죽었다니.
유현과 서수민은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아주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고.
‘큰일이네요.’
‘어쩌면 좋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우선 해명이라도 해 둘까?’
‘아뇨. 일단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만약, 이쪽이 용의자로 몰렸다면 일부러 원탁 회의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원탁 회의를 참관하게 허락했다는 부분에서, 이쪽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닌 도움을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현의 예상이 맞는지 원탁의 기사들은 누구도 유현과 서수민을 탓하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저마다 안색을 굳히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이쪽을 향한 적의는 없었다.
“가웨인. 자세한 설명을 해 봐.”
시종일관 경박했던 케이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웨인은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어 내며 자신이 봤던 것을 차분히 설명했다.
“일단 나는 평소대로 카멜롯 내의 순찰을 끝마치고, 왕께 보고를 하러 찾아갔다.”
“순찰을? 너 아직도 아래 녀석들에게 시키지 않고 그런 걸 하고 있었냐?”
“기사는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계급과 격이 높다고 해서 이런 사소한 일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되는 법이거늘.”
“예나 지금이나 꽉 막힌 녀석이구만.”
케이는 됐으니까 더 설명해 보라고 재촉했다.
“처음에 왕께 직접 보고를 올리려고 문을 두드렸을 때, 안쪽에는 어떠한 기척도 반응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왕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거라고 생각하고, 때마침 지나가던 하녀에게 혹시 왕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물었지.”
“그랬더니?”
“하녀가 왕께서는 시종일관 방에서 나오시지 않으셨고, 어디로 나갈 일도 없었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바로 왕의 방문을 강제로 열었다. 예의에 어긋난 행위지만, 주군을 향한 충성심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보게 된 것은…….”
가웨인은 그때를 떠올렸는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말을 이었다.
“방 안쪽은 한 차례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곳곳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바로 활자로 변해 사라지는 중이었다.”
“뭐?”
그 말에 다른 원탁의 기사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을 들었다는 듯 격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케이의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가웨인. 지금 네가 말해 놓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냐?”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기사의 명예를 걸고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대답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 뭐, 네가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아. 우리 중에서 누구보다도 왕을 충성스럽게 모시며 가장 고리타분한 기사의 칭호를 지녔으니까.”
“칭찬 고맙군.”
“칭찬 아니니까 고맙다고 하지 마 새끼야. 아무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케이는 곧바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첫째. 내성에서 그 정도로 격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그걸 몰랐다는 것이 말이 안 돼.”
“마법으로 기척을 차단한 거라면?”
“그 정도로 정밀한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이 과연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지? 그건 멀린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해. 아니, 그런 마법을 몰래 펼쳤다고 쳐. 하지만 싸움의 흔적이 있었다고 했지? 그건 어떻게 할 거지? 애초에 멀린이 그걸 모를 수가 있었나?”
“그건…….”
“이상한 점 두 번째가 바로 그거야. 우리의 왕이 어떤 존재인지 잊었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원탁의 최강자야. 그런 왕의 방에 침입을 해서 누구도 몰래 왕을 죽인다고? 싸움의 흔적이 남았다는 건 왕도 저항을 했다는 건데, 그런 왕이 패배했다는 건 믿기지 않아.”
“적이 다수라는 가정은?”
“그것도 했어. 하지만 카멜롯에서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은 정체불명의 집단이 몰래 왕의 방에 들어와 싸움을 벌였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단신으로 왕을 쓰러뜨릴 정도라면, 그것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끔 빠르게 승부를 낼 정도의 강자라면 1세대 성령을 데려와야만 해.”
아서왕의 무력은 2세대 성령과 싸울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아서왕의 가장 큰 힘은 그가 지니고 있는 성검 엑스칼리버다.
신화급 무구인 엑스칼리버를 지닌 아서왕은 그 마그니가 덤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으리라 추정된다.
“가설부터 엉망이야. 다수가,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아야 하고, 심지어 우리 원탁의 기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움직이며, 우리의 왕을 무력으로 제압까지 해야 해.”
“하지만, 그 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건 나도 모르지. 일단 현장을 직접 확인을 해 봐야 알겠어. 아무튼 상황은 알겠다. 그래서 가웨인 네가 왕권 대리로 원탁 회의를 집결한 거였군.”
“그렇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감성적이었던 거 같군. 하지만 나는 최악의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최악의 가능성이라는 건, 왕이 죽었다는 거겠지?”
“……그래.”
가웨인은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케이는 오히려 가웨인을 비웃었다.
“멍청하긴.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나 하고 말이야. 아니면, 혹시 다른 걸 생각했나?”
“다른 거?”
“네가 가장 걱정하는 거 있잖아.”
케이는 가웨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기라도 했다는 듯 그 이름들을 입에 담았다.
“란슬롯.”
“……!”
란슬롯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가웨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얌전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가레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나머지 기사들도 침음성을 흘렸다.
가만히 앉아 있던 장발의 미청년, 퍼시벌이 나섰다.
“케이 경.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동의.”
퍼시벌의 말에 호응하고 나선 것은 원탁의 기사 중 유일하게 활을 쓰는 기사 트리스탄이었다. 활기찬 시골 청년처럼 생긴 그는 배신의 기사 란슬롯의 존재 자체가 언급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란슬롯은 스스로 죄악감에 이기지 못해 카멜롯에 찾아오지 않았어. 그런 녀석이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몰래 이곳까지 찾아오겠어?”
“한 번 했으니 두 번 못할 것도 없겠지.”
가웨인이 증오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트리스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웨인 경. 당신이 란슬롯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바야.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니까 슬슬 넘어가도 되지 않겠어? 당사자인 가레스도 가만히 있는데, 왜 자꾸 그러는 거야?”
“어, 어?”
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가레스가 어깨를 움찔 떨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란슬롯은 가레스에게 있어서 참 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이름이었다.
한때는 누구보다도 존경했고,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있으나 가레스는 란슬롯의 손에 그 최후를 맞이했었다. 란슬롯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웨인이 란슬롯을 증오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별들의 은혜를 입어 성령의 자리에 올라오기 전, 그들은 각기 죽음을 경험했다.
가웨인은 자신의 동생 가레스를 끔찍하게 아꼈고, 란슬롯이 가레스를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왕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가웨인은 왕의 명령마저 무시하며 란슬롯을 죽이려고 들었다. 그 증오심은 성령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 란슬롯이라는 이름은 일종의 금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언급을 하려면 다른 녀석들도 더 있잖아?”
케이가 곧바로 대화에 끼어들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른 녀석들이라고 한다면…….”
“모드레드, 아그라베인.”
둘 다 원탁에서 그다지 좋은 이름은 아니었다.
모드레드는 왕의 피를 이은 아들이면서도 끝끝내 왕에게 반기를 들어 반역자가 되었으며, 아그라베인은 이 모든 갈등의 방아쇠를 당긴 원흉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원탁은 언제나 3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란슬롯, 모드레드, 아그라베인.
이 셋은 마비노기온의 영토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절대로 카멜롯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가만히 듣다 한마디 하지.”
그때 가웨인과 함께 상석이 앉아 있는 한 기사가 입을 열었다.
선이 가느다란 은발의 미청년이었다. 목소리도 가늘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외팔이라는 점이었다.
“베디비어 경.”
“그 셋이 분명 과거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것은 맞다. 하지만 전부 지난 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왕은 그 셋을 용서하고자 몇 번이고 친서를 보내며 다시 함께하자고 말했을 정도로 호의를 보였지.”
그 말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는지 모두가 침묵으로 동조했다.
베디비어가 말을 이었다.
“왕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의 연쇄를 끊고자 했다. 배신의 기사니 반역자니, 그런 자들과 다시 함께하여 옛 원탁의 영광을 드높이고자 했지. 하지만 정작 왕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 셋이었다. 특히 란슬롯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죄업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평생을 속죄하며 지내겠다고 할 정도였지.”
“끄응.”
그 가웨인조차 그 부분을 부정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며 넘겼다. 베디비어의 말은 그만큼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자들이 갑자기 왕실에 침입해서 왕을 시해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단 현장을 봐야 안다니까.”
케이가 답했다.
아직 상황을 속단하기에는 가웨인의 목격 증언만으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그렇다면 저 두 분은…….”
지금까지 유현과 서수민을 애써 묵인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는지 트리스탄이 운을 떼며 물었다.
“이쪽은 나를 따라 잠시 우리의 일을 도와줄 거야.”
케이가 그렇게 두둔하고 나서자 누구도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서수민은 케이의 갑작스러운 말에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유현이 곧바로 그녀를 제지했다.
‘왜 그러는 거냐?’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지금 케이 씨는 저희를 배려해 주는 거니까요.’
‘뭐?’
그러는 사이에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일단 사건 현장부터 확인하고, 흔적이나 단서부터 찾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면 어서 움직이도록 하지.”
“최악의 경우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왕의 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현과 서수민은 가장 마지막에 그 뒤를 따랐는데, 케이가 은근슬쩍 다가왔다.
“갑자기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
“아뇨. 상황은 대충 알겠습니다.”
둘이 서로만 아는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서수민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뭔데, 나도 좀 알게끔 말해라.”
“수민 씨. 저희가 왜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 건지 아십니까?”
“그야 왕이 우리도 불렀다고 해서…….”
“하지만, 왕이 아니었죠. 그것은 가웨인 씨의 명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가웨인 씨는 왜 저흴 불렀고, 케이 씨가 왜 저희를 회의에 참석하게 도왔겠습니까?”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것도 있지만, 저희를 배려해 준 겁니다. 만약 거기서 저희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의심을 화살을 받는 것은 저희가 됐을 테니까요.”
“잘 알고 있네.”
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충 설명을 해 줬다.
“일단, 그쪽이 범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당장 댁은 나와 방금 막 만나서 함께 움직였고, 아가씨는 객실에 머무르며 밖에 나온 적이 없으니까.”
“내가 몰래 움직였을 거라는 보장은?”
“그건 자신을 높게 치는 쪽이야? 아니면, 우리를 얕잡아 보는 쪽이야?”
“……그런가. 방금 그 말은 철회하지.”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식객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의심을 받게 하는 것은…… 가웨인이나 다른 기사들로서는 기사도에 어긋나는 짓이거든.”
“케이 씨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나는 기사도보다는 그냥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을 뿐이야. 괜히 다른 사람이 의심을 받고, 사건이 더 미궁으로 빠지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
그래서 일부러 회의까지 참석하게 해서 두 사람에겐 혐의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했으니 왕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지더라도 유현과 서수민이 의심을 받는 일은 확 줄어들 것이다.
원탁의 기사들이 보증한 셈이니까.
“배려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역시, 다른 의도도 있었죠?”
“들켰군.”
케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쪽의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아.”
“저희의 도움이라고 한다면…….”
“아직 현장을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일단 왕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야. 그것도 우리의 카멜롯 내성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불안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어쩌면 정말로 외부 세력의 개입이 있는 걸지도 모르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카멜롯을 넘어 마비노기온은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상황이 거기까지 치닫는 것은 막아야만 했다.
“저희의 무력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유현은 케이의 뜻을 이해했다. 유현은 책더미 군주의 칭호를 지녔으며 급화의 실마리를 잡은 그의 무력은 이제 거의 1세대 성령에 육박하게 됐다.
서수민의 경우에는 또 어떤가. 단신으로 타화자재천의 영역에 들어가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 마왕을 쫓아낸 인간이다.
두 사람의 전력이라면 어지간한 성군 정도는 우습게 여기기 충분했다.
“그런 셈이지.”
“그렇다면 뭐, 저희도 거두절미하고 깔끔하게 나가기로 하죠.”
“뭐?”
“보상은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케이는 유현이 설마 이렇게 말할 줄 몰랐다는 듯 총 맞은 비둘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 보수를 바란다고? 에이, 농담이지?”
“제가 농담하는 거로 보입니까?”
“아…….”
케이는 멍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충분히 해 줄게.”
“대성군의 이름으로 말이죠?”
“아주 기둥뿌리까지 뽑아가지 그러냐.”
유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받아 낼 수 있는 건 일단 받아 내는 것이 좋은 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