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04화
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실, 싸움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일방적인 학살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유현의 승리로 끝맺었다.
당초 유현에게 싸움을 걸었던 놈들은 초월자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나약한 잔당에 지나지 않았고, 그런 녀석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유현을 이길리 만무했다.
“크륵!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인간이 그 정도의 힘을…….”
부하들이 모조리 죽고 자신만 남게 되자, 타화자재천 소속 천군의 십인대장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물었다.
아무리 용군단과 함께 나타났다지만, 그래도 인간이니 마냥 우습게 봤는데. 그 힘이 상상을 초월하니 너무 당황스러웠다.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뭐, 뭐?”
“얼마 전, 여기에 백발의 여인이 찾아왔었지?”
“……!”
백발 여인이라는 말에 십인대장은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놀람, 경악, 그리고 두려움이 담긴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맞군.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네, 네놈 설마 그 마녀와 아는 사이였나?”
“질문에나 대답해.”
“크큭! 그런가. 그랬던 거였어.”
십인대장은 피를 흘리면서도 미친 듯이 웃었다. 그 모습에 유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통을 가하려 하는 순간, 녀석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마녀는 사라진 우리의 왕을 쫓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로? 그 위치는 어디지?”
“그것까지는 나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 괴물 같은 무위를 펼치는 자를 대체 누가 미쳤다고 감시를 할까. 아니, 그런 자를 쫓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
십인대장은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단신으로 찾아와 타화자재천 영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온갖 초월자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며 마라 파피야스가 기거하는 궁전마저 반파시켜 버린 그 괴물을.
그녀가 한번 손을 뻗을 때마다 천지가 진동하며 폭풍이 몰아쳤고, 거기에 무수한 천군들이 휩쓸리며 죽어 나갔다.
타화자재천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흠. 결국, 살아남은 잔당인 너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소리군.”
“큭큭.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조만간 지옥에서 그녀와 만나게 될 테니까. 우리들의 왕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너도 그녀도 모두 사이좋게 저승의 한복판으로 떨어지게 되겠지.”
너무나도 당당한 십인대장의 협박에 유현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뭐?”
“우리의 왕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너희는 아직 모른다. 고작 인간 따위가, 그분의 부하들을 좀 물리쳤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그분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네놈들은 찰나도 버티지 못하고…….”
“아니, 네가 그렇게 당당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럴 것이…… 네가 그렇게 찾는 너희 왕이라는 존재는 도망쳤잖아.”
마라 파피야스가 어떻게 됐는지는 연합의 영토로 가는 길에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
서수민과 싸웠다고 전해지는 녀석은 그대로 도망쳤고,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후 목격자가 없어서 정황을 알 수는 없지만, 쑥대밭이 된 영토마저 버리고 사라졌으니 보통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닐 터.
그런데, 부하라는 녀석은 왕이 돌아올 거라고 말하니 듣는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니다! 왕께서는 단지 전략적으로 물러났을 뿐……!”
“그래.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라.”
“크으윽!”
더 이상 이 십인대장으로부터 뽑아낼 정보가 없었진 유현은 녀석의 목을 틀어쥐고 힘을 가했다.
“자, 잠깐만!”
십인대장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살려 달라고 빌려 했지만, 유현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애초에 유현은 녀석을 살려 줄 생각도 없었다.
꽈득!
십인대장의 목이 부러졌다.
유현은 마라 파피야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강혜림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녀석이니, 죽여야 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다.
마라 파피야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
“네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죽여 주마.”
유현은 쓰러진 시체를 뒤로하고, 타화자재천의 영역 안쪽으로 향했다.
* * *
최초의 마왕 마라 파피야스가 지배하던 타화자재천은 전투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새겨진 채였다.
원래라면 상당히 흉흉한 분위기였어야 할 이 저주받은 검은 땅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부서져 있어서 본래의 위용을 채 반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유현은 그 아로새겨진 틈새를 거닐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거대한 절벽이 양 끝에 협곡처럼 펼쳐졌다. 거대한 참격이 만들어 낸 인공적인 지형이었다.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이 있었나 보군.’
무려, 그 마왕의 영토다.
마라 파피야스에게 종속된 강자들의 숫자만 대체 몇일까. 초월자를 넘어서, 군주에 근접하는 수준을 지닌 자들일 터.
그런 존재가 최소 두 자릿수 이상은 있었을 텐데, 서수민은 홀로 놈들과 맞선 것이다.
그리고 승리했다.
‘수민 씨는 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지.’
연합 내에서 언급되는 것만 봐도 최소 최도윤과 동등한 수준으로 추정됐다.
최도윤이 집행자, 정확히 수준만 놓고 보면 2세대 성령도 이길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서수민의 무력 또한 최소한 그에 준하거나 그 이상이라 봐도 좋겠지.
서수민이 강해진 것은 기꺼운 일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유현은 우선 흔적부터 찾기로 했다.
‘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유현은 곧바로 눈동자 위에 황금빛 안광을 띄웠다. 손오공으로부터 받은 화안금정이 펼쳐지며 순식간에 주변 풍경의 본질을 꿰뚫기 시작했다.
갈라진 바위의 틈새와 무너진 절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까지.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과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전부 다 텍스트로 변해 흘러들어 온다.
‘역시, 라플라스의 눈이랑은 달라.’
라플라스가 정보를 규합해서 미래로 향하는 갈래를 읽어 내는 것이라면, 화안금정을 통한 급화는 물질에 새겨진 모든 역사와 흔적을 읽어 내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타인의 책을 읽어 내는 코덱스의 파편과 흡사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단지, 그 대상이 생물에서 무생물까지 뻗어져 나간 것이지만.
‘보인다.’
본래는 눈에 보이지 않았어야 할 글자들이 허공을 맴돌며 희미한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것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까지 뚜렷하게 변하자 유현은 이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어. 마냥 일방적인 것은 아닌가. 수민 씨가 강하다고 해도 역시 혼자서 이 정도의 숫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서수민은 결국 승리했다.
자신의 왕성이 기거하던 마라 파피야스는 그녀에게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도주를 택했다. 둘이 제대로 부딪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게 맞을 것이다.
대체, 왜? 서수민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마라 파피야스 또한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은 1세대 성령이다. 그런 존재가 서수민을 두려워해서 도망쳤다고 보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일단 마라 파피야스는 수민 씨를 피해서 도망쳤어. 방향은, 북쪽인가.’
서수민 또한 그런 마라 파피야스를 붙잡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다.
이후에도 소식이 없다는 것은 서수민은 여전히 마라 파피야스를 쫓고 있다는 것이고, 마라 파피야스는 서수민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떠났다는 뜻.
화안금정을 해제한 유현은 곧바로 북쪽으로 움직였다.
계속 걸을수록 심했던 싸움의 흔적이 희미하게 변해 갔다. 그러다 타화자재천 북쪽의 끝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라 파피야스는 도주에 성공했고, 서수민은 녀석을 놓쳤다.
‘그렇다는 것은 일단 계속 북쪽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건가.’
타화자재천은 천계삼십육천의 영토에 속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바깥의 외진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대성군 천계삼십육천도 마지못해 영역을 넘긴 거지, 그렇다고 타화자재천을 자신의 영역 깊은 곳에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터.
‘사실상 이 땅을 먹고 떨어져라, 라는 의미로 넘겨준 셈이지.’
그러다 보니 타화자재천은 자연스럽게 여러 영역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 타화자재천의 북쪽에 있는 영역은 바로 대성군 마비노기온이 속한 곳이었다.
‘흠.’
유현은 잠시 경계선에 서서 고민했다. 이대로 쭈욱 들어가게 된다면 당연히 마비노기온의 영역에 침범하게 된다. 그가 서 있는 타화자재천의 끝자락은 황폐한 땅이었지만, 저 너머는 울창한 숲이 가득했으니까.
정체를 숨기고 몰래 들어갈까? 대성군의 영역은 넓다. 정체를 숨기고 움직인다면 딱히 걸릴 위험도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서수민을 찾기 위해 정체를 숨긴 채로 움직이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지 못했다.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크니까.
오히려 마비노기온에 소속된 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일단은 들어가 볼까.’
무작정 안쪽으로 향하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그런 불확실함에 기댄 행동은 아니었다.
유현은 눈은 이미 저 너머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유현이 곧바로 마비노기온의 영토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상대방도 움직였다.
“거기 정지. 누구냐?”
갑옷을 차려입은 수려한 기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화에서 나올 법한 은빛 갑주에 금발을 지닌 남성이었는데, 수려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말투나 행동은 기사라고 부르기엔 미묘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이 근방에 머물며 경계 구역을 감시하던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유현에게 칼만 뽑지 않았지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지나가던 행인.”
“웃기고 있네. 어떤 행인이 그 마왕의 영역에서 넘어오냐?”
“그러는 댁은 누굽니까?”
“보면 몰라? 기사잖아 당연히.”
“갑옷만 입으면 다 기삽니까? 언행은 기사 같지 않은데. 도적단 아닙니까?”
“네가 기사에 대해서 뭘 안다고…….”
금발의 기사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유현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뭐냐. 너도 기사였냐?”
“예?”
“아니. 너, 기사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잖아.”
금발 기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유현을 가리켰다.
“그 정도로 지엄한 기사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지.”
유현은 그 말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가 기사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것은 맞다. 돈키호테로부터 계승받은 마지막 기사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와 함께했으니까.
하지만, 보통 이야기란 드러내지 않는 이상 상대방이 알아볼 수 없다. 급화를 다루는 존재, 혹은 유현처럼 파편의 힘으로 상대방의 정보를 읽지 않는 이상 알 방도는 없다.
눈앞의 기사는 그런 유현이 기사의 이야기를 지녔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역시 평범한 기사가 아니었다.
“후우. 뭐, 여기까지 왔는데 숨길 것도 없죠. 저는 강유현이라고 합니다.”
“나는 케이다.”
“케이?”
케이라는 이름에 유현은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설마, 원탁의 기사 케이?”
“어, 맞아. 알고 있네? 원탁의 기사에서 3석을 차지하고 있지.”
어디 3석만 차지하고 있을 뿐인가.
케이라고 한다면 원탁의 기사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아서왕의 의붓형이다. 당연히 원탁에서 지닌 발언권이나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수준만 놓고 보면 마비노기온 내에서도 초일류에 속했다.
케이에 대한 전승은 많이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설마하니 저런 성격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흠. 그보다 강유현이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 아! 그래. 가레스 그 녀석이 말한 사람이 바로 너였군. 이야, 설마 이런 곳에서 그 당사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군요.”
“그래서 우리 마비노기온에는 무슨 볼일이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
“혹시 백발의 여인이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백발의 여인?”
케이는 유현이 무슨 말을 하는가 고민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손바닥을 탁 하고 쳤다.
“아. 들어 본 거 같아. 얼마 전에 저 마왕의 영토에서 싸움이 크게 났는데, 그 당사자가 백발의 여인이라고 했었지. 설마 그쪽이랑 아는 사이였어?”
“네. 그녀의 흔적을 쫓아 움직였는데, 방향이 이쪽이더군요. 아마 마비노기온을 통과해서 움직인 거 같은데…….”
“그건 맞을 거야. 내가 이 근방에서 경계를 서는 것도 그 때문이거든.”
케이나 되는 기사가 이런 곳에서 침입자를 찾는 이유는 오직 하나.
얼마 전 경계선 너머에서 마라 파피야스와 그를 쫓는 한 여인이 마비노기온의 영토에 무단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마비노기온은 비상이 걸렸다. 아무리 그들이 대성군이라 해도, 갑작스러운 침입자가 최초의 마왕이며, 그를 뒤쫓는 것은 그런 마왕조차 싸움을 꺼리는 대상이라는 것은 경계하기 충분했으니까.
“그 둘은 어떻게 됐습니까?”
“마왕은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백발 여인은 녀석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아직 우리 영역에 있지.”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습니까?”
“어디고 자시고.”
케이는 턱을 긁적이며 태평하게 말했다.
“우리 카멜롯 성에서 식객으로 잘 지내고 있는데?”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