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02화
유현이 권지아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도 전, 그녀의 몸 위에 스멀거리는 검은 기운을 발견하고 말을 삼켰다.
‘저건…….’
권지아가 평소에 사용하는 보랏빛 기운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보랏빛 기운이 모든 것을 물어뜯고 집어삼키는 탐욕이라면, 저것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욕보이고 더럽히는 기만이었다.
“지아 씨. 대체, 그 힘은……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눈치챘구나.”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지 권지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지난 5년 사이에 새롭게 익힌 이 힘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숨기려고 해도 이미 유현은 이 힘이 얼마나 강하고 위험한지 이미 눈치를 채 버렸다.
“뭐, 별거 아니다. 그냥 어쩌다 익히게 된 것일 뿐.”
“위험한 거 아닙니까? 아니, 확실히 위험한 힘이 분명한데요. 그걸 계속 사용하면 지아 씨는…….”
“나도 안다. 아무렴 내가 이 위험한 걸 모를까. 단순한 괴물의 힘도 아닌 그 묵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힘인데.”
“설마, 성경의 짐승의 힘을 사용하신 겁니까? 대체 어떻게……?”
“펜릴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권지아는 후드를 살짝 들춰 보이며 자신의 머리위에 난 늑대 귀를 보여 줬다. 권지아의 머리 색깔과 같은 귀는 이전에도 봤듯이 쫑긋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을 얻을 필요가 있었거든.”
“하지만, 그 힘을 계속 사용한다면 나중에는…….”
“그 정도로 간절하고 절실하니까.”
권지아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느덧 유현의 지척에 선 그녀는 유현이 언제나 입고 있는 정장의 옷깃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입술을 열었다.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렇죠. 저라고 지아 씨에게 무슨 말을 따로 하겠습니까.”
힘을 얻겠다고 심장 대신 생명의 열매를 박아 넣었던 자신이 이런 거로 남을 탓하기에는, 이미 두 사람은 너무 먼 곳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끝없이 달려야 하는 삶. 멈춰도 죽고 뒤를 돌아봐도 죽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길은 유일하게 앞만 보고 쉬지 않고 달리는 것뿐이었다.
그 끝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파멸만 가득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멈출 수 없다.
누군가 그것을 강요한 것이 아님에도, 둘은 분명 같은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결국에 이러한 미래를 만들고자 다짐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의지였으니까.
“떠날 거냐?”
권지아의 손이 유현의 옷깃을 넘어 그의 넥타이로 향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흐트러진 넥타이를 깔끔하게 정돈했다. 유현은 잠자코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죠.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언제?”
“적당히 인사를 마치고 바로.”
“혼자…… 갈 거냐?”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권지아의 물음에 유현은 숨김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권지아의 손이 넥타이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한걸음 물러나 유현과 거리를 벌렸다.
“연합 내전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
유현은
대답을 망설였다.
헤라클레스가 등장하고, 백서련이 죽을 뻔했다. 실제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그런 백서련을 살릴 수 있던 것은 오직 백련의 희생 덕분이었다.
그녀가 희생을 했기 때문에 백서련이 산 것이다. 거기에, 유현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
“아뇨.”
유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자신의 나약함이 불러온 이 결과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응당 자신이 져야 할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도, 누군가의 죽음도. 결국, 자신의 마음에 안고 가야 할 일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헤라클레스를 상대로 싸우면서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은 저렇게 강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을 뿐이죠.”
“……그런가.”
“이대로 가면 저희는 패배를 면치 못합니다. 더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함께 싸울 사람들을 모아야 해요.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죠.”
“그걸 혼자서 하겠다는 거냐?”
“그만큼 위험하니까요. 또 헤라클레스 같은 존재가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이번에 제단이 갑자기 움직인 것도 그렇고…… 아마 엄청난 적들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다수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소수 정예로 움직이는 게 낫죠.”
“그래서 제일 먼저 뭘 할 생각이지?”
“일단, 영민이와 수민 씨를 찾을 겁니다. 혜림 씨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두 사람의 도움은 필수니까요.”
“그렇군. 하지만 둘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 않는가.”
“그렇죠. 그러니까 지아 씨에게 하나 부탁할까 합니다.”
부탁이라는 말에 권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탁? 네가?”
“지아 씨가 저 대신 영민이를 찾아 주세요. 영민이는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겁니다. 그때…… 혜림 씨와 제가 싸웠을 때 영민이가 저를 도와줬거든요.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저희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겠죠. 찾는다면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하긴. 그나마 가장 이름이 알려진 건 녀석이니 찾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유영민이 용병으로 활동하는 것은 권지아도 익히 아는 바다.
그들의 소식을 접하기만 한다면 유영민과 다시 만나는 것은 별로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 너는 수민이를 찾으러 갈 생각이구나.”
“당연히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어떻게?”
“일단, 마라 파피야스가 거주하고 있었다는 타화자재천이 있는 곳으로 향할 겁니다. 천계삼십육천의 영토에 있으니, 그 근방에 가면 소식을 접할 수 있겠죠.”
동시에 유현에게는 다른 목적 또한 있었다.
천계삼십육천의 영토와 맞닿은 다른 대성군의 영토가 바로 에덴과 판데모니엄이다. 유현은 서수민의 해방을 수소문하는 것과 동시에 사탄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혜림이는 어쩌고? 네가 없으면 불안해할 텐데.”
“전이라면 모를까 지아 씨와 서련 씨 덕분에 혜림 씨는 전보다 더 나아졌습니다. 제가 없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슬퍼할 거다.”
“제가 앞으로 갈 곳은 혜림 씨에게 훨씬 더 위험한 곳입니다. 적어도, 간다면 저 혼자서 움직여야 해요. 차라리 혜림 씨가 조금 슬퍼하는 거로 끝난다면 그게 더 낫습니다.”
“……하아. 모르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듣지도 않을 거고.”
“이게 최선이니까요.”
권지아는 그 이상 유현을 탓할 수 없었다. 강혜림을 두고 다시 혼자 떠나는 유현의 행동은 분명 화가 나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그의 입장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도 공감하고 있기에 질책의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녀도 똑같은 선택을 내렸을 테니까.
“……몸 성히 돌아와. 또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고.”
“제가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혜림 씨나 서련 씨를 다시는 걱정시키게 만들 생각도 없고요.”
“나도…….”
“네?”
“나도…… 네가 다치면 걱정한다고.”
“아…….”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유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권지아는 괜한 말을 했다며 달아오른 얼굴로 유현의 시선을 피했다.
“아, 아무튼!”
이 어색한 분위기를 끝내기 위해 권지아가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꼭…… 다시 돌아와야 한다.”
“당연하죠.”
유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빠. 이제 가는 거야?”
떠나가는 유현을 보며 강유라가 물었다. 그녀는 연합 내전에도 싸움에 참여하지 못해서 유현에게 여전히 미안함을 품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나섰다면, 적어도 1명은 더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가야지.”
“나는…….”
“아직도 미안해하는 거야?”
강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은 그녀의 시무룩한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네가 있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어. 이런 말 하는 것도 솔직히 이상하긴 한데, 나는 네가 거기에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한다.”
순수하게 살리오 제국과 싸우는 연합의 내전이었다면 강유라의 전력은 유의미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이 끝나고 모습을 드러낸 헤라클레스는 강유라라 하더라도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적이다.
대부분 군주의 피해도 헤라클레스 때문에 나온 것이지, 차라리 강유라가 그 자리에 없던 것이 오히려 유현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그, 그래도…….”
“정 걱정되면 더 열심히 수련해서 강해질 생각을 하면 돼.”
“그래?”
“그래.”
“그런데, 나 어떻게 강해질지 감을 못 잡겠는데.”
“너보다 강한 사람한테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아니, 차라리 그렇게 해라. 만약 그 사람이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하면, 내가 그러라 했다고 말해. 그러면 상대도 어느 정도 넘어가 줄 거다.”
시간만 있었다면 나름 조언을 해 주거나 훈련을 봐줄 수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유현에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굳이 추천한다면 위무혁,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유현이 그렇게 말하자 강유라가 화색을 띠며 답했다.
“확실히 그렇겠네. 응. 오빠 말대로 할게.”
“그래.”
“때마침 여기에 머무르고 있겠다, 도윤 오빠한테 부탁 한번 해 봐야겠다.”
“뭐? 아니 잠깐만.”
유현은 도저히 듣고 넘길 수 없는 이름이 나오자 황급히 강유라를 붙잡았다.
“누구? 너, 혹시 지금 최도윤한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냐?”
“응. 그런데? 왜? 그러면 안 돼?”
“그…….”
당연히 안 되지!
유현은 분노에 찬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그보다 도윤 오빠? 설마 서로 친한 사이였어? 대체 언제부터?
유현은 잠시 심호흡을 하며 차분하게 강유라를 설득했다.
“유라야. 최도윤은 안 돼.”
“왜?”
“왜, 라니? 당연히 걔는…… 그, 집행자잖아.”
“집행자면 가장 강하잖아. 그러면 내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 최도윤은 말이야, 워낙 재능충이라서 자기가 강해지는 건 잘해도, 남을 가르치거나 하는 건 잘 못 해. 그러니까 그런 거야.”
“그래?”
“어. 그래. 맞아.”
“근데, 오빠는 도윤 오빠에 대해서 되게 잘 안다.”
“……!”
그 말에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려다가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라가 딱히 뭘 알고서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신기해서 한 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뭐, 뭐…… 모르진 않지.”
“그래도, 뭔가 아쉽다.”
“뭐……가?”
강유라의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 유현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설마. 아니야. 아니지? 아닐 거야.
“그래도 도윤 오빠가…… 좀 잘생겼잖아?”
조금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강유라의 모습에, 유현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유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아니!”
“아이 씨.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무튼,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 그러니까 아닌 게 아니고. 걔가 좀…… 음. 그래. 좀 잘 생기기는 했지.”
솔직히 최도윤을 싫어하는 유현이라도 이 부분은 부정할 수 없어서 수긍하며 넘어갔다.
강유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유현을 응시했다.
“좀?”
“젠장. 그래. 많이 잘 생겼다. 됐냐?”
“응응.”
“그래. 아무튼, 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야. 유라야.”
“성격도 좋잖아?”
“그게 뭔 미친……. 후우. 최도윤 걔가 성격이 좋다고?”
“몰랐어? 자기 부관 되게 잘 챙겨 주기로 유명한 집행자잖아. 서윤이가 자주 나한테 이야기해 주거든.”
유현은 납득하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최도윤은 전생의 그와 상당히 다른 성격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르겠지. 가족이 살아 있으니 성격이 더 유해졌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자신이, 비록 나 자신이라는 인식보다도 보살펴 주고 싶은 여동생이라는 느낌이 드는 강유라가 최도윤과 맺어지려 하다니.
물론, 이건 조금 많이 나간 생각일지도 모른다.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어도 완전히 그쪽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불안감이 든다. 묘하게 최도윤에 대해 말할 때 목소리가 들뜨는 강유라의 태도만 봐도 수상함이 물씬 풍겼다.
최도윤과 강유라가? 유현은 둘이 같이 서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때 녀석을 죽였어야…….’
“오빠? 무슨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살기가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까. 강유라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유현을 흘겨봤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최도윤은…… 그래. 그, 이번에 새로운 기술을 터득한 거 때문에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을 거다.”
“엥? 그래?”
그 말에 강유라는 의외로 쉽게 납득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의외로 쉽게 납득하네?”
“당연하지. 나도 이렇게 보여도 초월자라고. 내가 이 자리에 올라가면서 나름 깨달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모르겠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실마리를 발견했다면,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게 옳아.”
이런 똑 부러지는 부분에서 확실히 강유라가 5년 동안 성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뭐, 다행이고.”
“그보다 오빠는 괜찮겠어? 혜림 언니 내버려 두고 혼자 가도 돼?”
“…….”
강혜림의 이름이 나오자 유현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권지아도 그렇고, 강유라도 그렇고. 다들 강혜림에 대해서 걱정하지만, 사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유현이 없어진 사이 가장 크게 망가졌던 것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지금은 괜찮아졌다 하더라도 강혜림이 흑뢰군주였던 시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유현에게 있어서 강혜림은 이른바 속죄의 대상이었다.
그녀를 다시는 혼자 놔두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문득,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백서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혼자…… 가야 해.”
앞으로 그가 겪을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강혜림은 연합에 의탁해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만약 또다시 싸움이 벌어진다면, 유현은 누군가를 반드시 지켜 줄 수 있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자신이 부족해서, 혹은 사소한 실수 때문에 백서련 때와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자신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구나. 오빠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는 말리지 않을게.”
“그래. 부모님께는…… 따로 안부 전해 드리고.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줘.”
“응. 알았어.”
강유라와 인사를 건넨 유현은 이제 올드 타운을 떠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강혜림에게는 이미 모든 것을 설명했다. 물론 강혜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유현과 꼭 가고 싶다는 것을 온몸으로 어필했지만, 유현은 단호했다.
결국 아이처럼 삐친 그녀는 방에 틀어박혔지만, 유현에게는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미안함은 있었다. 없을 리가 있을까. 그녀를 볼 때마다 드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뿐인데.
“꼭. 다시 만나자.”
유현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올드 타운을 떠났다.
* * *
‘이젠 진짜 혼자구나.’
복장 위에 여행용 로브를 껴입은 유현은 조용하고 한가한 여정에 이질감마저 느꼈다.
혼자서 다닌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때도 그의 곁에는 백련이 함께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련조차 없었다. 손에 쥔 백련은, 소중했던 친구의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일 뿐이었다.
완전한 혼자.
유현은 처음으로 그 누구도 없이 홀로 세상에 남겨졌음을 실감했다.
‘됐어. 어차피 여행을 다니려고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올드 타운을 벗어난 지 어느덧 며칠이 흘렀다. 유현은 연합의 영토를 넘어 천계삼십육천의 영토가 있는 역천의 폭포 근방까지 도달했다.
저 멀리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역천의 폭포가 보였다. 영역의 경계를 가르는 이정표에 도착한 것이다.
이대로 천계삼십육천의 영토로 바로 들어갈지, 혹은 주위에서 조금 수소문을 해서 움직일지 고민하던 차.
크와아아아!
하늘에서 거대한 괴성이 울리더니 무수한 용 군단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용, 이라고?’
저 정도의 용이라면 떠오르는 대성군은 오직 하나. 드래고니카다.
하지만, 드래고니카가 왜 천계삼십육천 근방의 영역을 지나가고 있는 거지? 그리고 저 정도의 군세는 대체 또 뭐고?
그 순간, 유현은 용의 무리 선두에서 날고 있는 백룡과 눈이 마주쳤다는 걸 깨달았다.
‘이쪽으로 온다.’
선두의 백룡이 전열에서 이탈하더니 유현을 향해 날아왔다.
매끄럽게 빠진 용이 바람을 일으키며 유현의 앞에 착지했다.
[신기하군요. 이런 곳에 여행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