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01화
제네시스 제단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요새였다.
전체가 알 수 없는 재질의 새하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치 찬란한 빛을 그대로 조각이라도 한 것처럼 생겼다.
무엇보다 제단은 그 크기가 100km가 넘어, 존재 자체만으로 위성의 크기와 맞먹는다.
평소에 차원과 차원의 틈새에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혼성계에 위험이 갈 정도의 천칭이 기울어지는 사태가 벌어지면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고는 한다.
지금까지 제단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제단의 본체는 사실상 상징적인 것에 가깝고, 진정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제단이 재정한 시스템의 억제력이니까.
또한, 그것이 혼성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인식이었다.
하지만 제단이 직접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있는 극소수의 인식은 달랐다.
제단이 움직이면, 그것이 어떤 의도였든 반드시 거대한 피바람이 분다.
이번 살리오 제국의 사태가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저, 저게 뭐야!”
“적인가?”
살리오 제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도시 엘더 센트럴.
이른 아침에 해가 떠올라 있어야 할 엘더 센트럴은 지금 어둠에 삼켜져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기물. 제단의 요새는 도시 전체를 차지한 것도 모자라 그 바깥까지 뻗어, 엘더 센트럴로 향하는 모든 햇빛을 차단해 도시 전체를 그림자로 뒤덮었다.
그 아래에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고, 살리오 제국의 병사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요새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요새의 하면부가 빛이 난다 싶더니 무수한 폭격이 쏟아지며 엘더 센트럴을 휩쓸었다.
도시 전체에 설치된 방어 마법진이 발동하며 포격을 막고자 했지만, 요새가 지닌 화력은 그것을 훨씬 웃돌았다.
집행자들끼리 싸워도 방비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엘더 센트럴의 방위 시스템은 제단의 요새 앞에서 종잇장에 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고층 건물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그 안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황제님은! 황제님은 어디 계신가!”
“맞서 싸워라! 저 거대한 요새를 격추해!”
살리오 제국은 가만히 당해 주기만 하지 않겠다는 듯 반격의 봉화를 올렸다.
비공정이 떠오르며 요새를 향해 나아갔고, 소형 비공정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남은 마도병단이 모조리 출격해 빛의 날개를 내뿜으며 날아올랐다.
비록 군주들과 집행자가 없다 하더라도 살리오 제국의 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상대가 제단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철컹!
무언가 떨어지는 거대한 소리가 울리더니 이윽고 요새의 하면부에 거대한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생존자들은 도망치는 것조차 잊고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윽고 눈 부신 빛을 등지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사?”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치며 내려오는 그들은, 신화 속에 불리던 천사처럼 생겼다.
하지만, 진짜 천사는 아니다. 놈들은 딱딱한 갑주를 입은 것처럼 생겼으며, 몸통은 가늘며 팔과 다리는 기이할 정도로 길었으니까.
제단이 내보낸 새하얀 존재들의 이름은 엘로힘(Elohim).
문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그들은 곧바로 붉은 안광을 빛내며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언어를 사용하는지 몰라서 뜻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저것이 절대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엘로힘으로부터 거대한 힘이 뿜어져 나와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크아아악!”
“회피! 회피해라!”
“놈들을 죽여!”
곧이어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이 벌어졌다.
아니, 그것을 과연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싸움은 엘로힘의 일방적인 학살로 이루어졌다.
“너, 너무 빨라!”
“정신 차려! 도망치지 말고 놈들을…… 커헉!”
잘 훈련받은 살리오 제국의 병사들은 엘로힘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빛나는 날개를 지니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빛의 창으로 모든 것을 꿰뚫는 그들은 타락한 인간에게 내리는 신벌이나 다름없었다.
비공정이 불꽃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하고, 마도병단들은 엘로힘의 창에 꿰뚫려 대롱대롱 매달렸다.
제국의 주력 부대가 채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다.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렸다.
“아, 으아아.”
지상에서 그 광경을 올려다보던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이도 저도 하지 못했다.
새하얀 육신에 붉은 피를 가득 뒤집어쓴 채 천천히 내려오는 엘로힘의 모습은, 도저히 천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괴, 괴물.”
누가 그랬던가.
공포는 갈라진 땅의 틈새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공포는.
하늘에서 빛과 함께 내려온다.
“도, 도망쳐야…….”
“사, 살려 줘…… 커헉!”
새하얀 빛의 창이 지상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감정이 없는 엘로힘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저 명령을 입력한 기계처럼 무자비하게 엘더 센트럴을 파괴하고 살육을 자행했다.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갔다. 누구는 살려 달라 빌고, 누구는 신의 이름을 외쳤으며, 또 누구는 지엄한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나서지 않았다.
엘더 센트럴 황성의 알현실, 그곳에 생명 연장 장치를 덕지덕지 붙이며 목숨을 연명하던 살리오 제국의 황제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으니까.
죽어 있는 그의 미간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엘더 센트럴의 바깥. 제단의 요새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거리에서 유영민은 저격용 총을 회수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자리를 뜨기 위해 채비를 마치는 그의 한쪽 어깨 위에는 금빛 구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바로, 살리오 제국의 황제를 죽이고 회수한 코덱스의 파편이었다.
‘이크.’
유영민은 불바다가 된 엘더 센트럴을 보다가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부대의 엘로힘이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다.
현재 놈들은 엘더 센트럴을 중심으로 한 살리오 제국의 지배가 닿는 도시들을 모조리 없애는 중이었다. 놈들의 범위 안에 있는 생명체는 걸리는 순간, 누구 할 것 없이 살해당한다.
유영민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엘로힘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였다.
‘설마하니 벌써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그가 엘더 센트럴에서 떨어진 거리만 100km가 넘는다.
유영민은 그 난전 속에서 정확히 알현실에 있는 황제를 저격해서 죽인 것이다.
‘황제가 자리에 앉아서 꼼짝도 못 한 상태라 다행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황제를 저격하는 데 상당한 소요가 발생했을 것이다. 황제를 죽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리를 좁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엘더 센트럴과 거리를 줄이면 곧바로 엘로힘에게 들통났을 터.
‘맥스웰의 보정까지 다 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나도 제단에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될 뻔했군.’
원래도 엘더 센트럴에서 먼 곳에 있었지만, 혹시 몰라서 더 먼 곳까지 떨어진 유영민은 곧바로 주변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쯤이면 되겠지.
유영민은 곧바로 원거리 염화 스킬을 발동했다.
‘이쪽이다. 회수는 끝났어.’
[과연. 훌륭하고 깔끔한 일 처리야. 100km가 넘는 거리에서 황제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다니.]
‘……지켜보고 있던 거냐?’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 혹시라도 일이 나쁘게 흘러가면 내가 나서야 하니까.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무엇보다 지금 무려 그 제단의 본체라 할 수 있는 요새가 떠다니는 상황이고.]
‘…….’
유영민은 기분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상대의 입장이 백이면 백 옳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성과 감성은 별개의 것. 녀석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짜증이 솟구치는 것은 일종의 반사 작용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잊지 마. 나는 너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을 뿐이야. 언제 다시 적으로 돌아서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러니 날 자극하는 짓은 적당히 해.’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군.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누가 뭐래도 너는 우리들의 가장 우수한 파트너니까.]
‘……됐고. 파편은 곧바로 보내도록 하겠어.’
곧바로 염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빨랐다.
[그러고 보니 소식은 들었어.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지?]
‘…….’
[너무 그러지 마. 아니면, 아직도 나를 증오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지금 아직도라고 했냐?’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유영민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노도와도 같은 분노.
상대는 그런 유영민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여유롭게 대꾸했다.
[내가 말 했잖아. 그건 다 필요한 일이었다고.]
‘그렇다 해도 네가 한 짓이 사라지지는 않지. 합리화할 생각이라면 포기하지 그래.’
[합리화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일종의 필요악인 셈이지. 용병왕으로 불리는 너도 혼성계에서 지내면서 깨달았을 텐데? 세상에 올바른 길만으로 답습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때로는, 더러운 길을 걸어야 해낼 수 있는 것도 있지.]
‘……그래서, 이것도 네가 말하는 그 예언에서 나오는 과정이라는 거냐?’
[글쎄다.]
유영민과 대화를 나누는 남자, 거짓된 예언자는 모호한 대답을 흘렸다.
유영민은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딱 잘라서 말했다.
‘됐다.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눠 봤자 나만 손해니까. 이만 끊지.’
[그쪽이 편한 대로.]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둬. 너는 머지않은 미래에, 네가 지금까지 저지른 짓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진청운.’
거짓된 예언자, 진청운은 유영민의 협박에 가까운 경고에 소리 없이 웃었다.
[알아.]
그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진청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바라는 바야.]
* * *
유현은 건물의 옥상에 서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살리오 제국의 멸망 소식을 접한 것이 조금 전이다. 그리고 엘더 센트럴을 위시한 위성 도시 5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바로, 제단에 의해서.
‘제네시스 제단.’
세상을 억제하는 제네시스 시스템을 만든 근원. 대체 누가 만들었고, 어떤 것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집단.
그들이 이렇게 직접 나서서 움직이는 것은 단언컨대 유현도 처음 봤다.
‘놈들은 왜 갑자기 움직인 거지? 그것도 살리오 제국을 상대로?’
살리오 제국이 신들의 집단, 대성군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잠재력은 확실히 위험한 것이었다.
가장 최근에 만든 것이라 해도 무려 신화급 무구를 성령도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니까.
그것도 순수한 신비로운 이능이나 마법만이 아닌,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과학을 접목해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멸망은 창세기의 바벨탑을 무너뜨린 신벌과도 흡사했다.
하지만 혼성계에서, 그것도 지금까지 중립 혹은 침묵을 유지하던 제단이 이렇게까지 직접 나서는 일은 전무했다.
유현은 오늘 자신의 꿈에서 보았던 존재를 떠올렸다.
새하얀 존재와, 검은 존재.
‘이번 사건도 그들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는? 그리고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연달아 새로운 일들이 터지자 머리가 복잡하게 꼬였다.
시간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이 세상에 진짜 종말이 내린다는 미래를 아는 이상 그마저도 촉박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모래시계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손으로 막으려 해도 흐르는 모래는 손가락의 틈새로 하염없이 빠져나올 뿐.
고민이 깊어 갈 무렵 옥상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여기 있었나?”
“……최도윤.”
아직 부상을 추스르지 못한 최도윤을 본 유현이 퉁명하게 대꾸했다.
“다친 녀석이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와?”
“여전히 까칠하군.”
“이유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을 텐데?”
“그건 이해한다. 사실 그때의 기억이 없었다 하더라도, 나 또한 네놈과 제대로 친해질 수는 없을 것 같으니까.”
“……당당하게도 말하는군.”
유현은 최도윤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또 저런 태도야말로 녀석 다운 것이라고 납득하고 말았다.
“가려는 거냐?”
“……뭘?”
최도윤의 날카로운 질문에 유현은 잡아떼듯 말했지만, 이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늦을수록 우리만 손해니까.”
“혼자서 갈 생각이로군.”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는 건 위험해.”
“그건…….”
최도윤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유현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필시 백서련, 그 여인과 관련된 일이겠지. 그녀가 헤라클레스에게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그 또한 전해 들었다.
애초에 헤라클레스를 상대로 증오를 쏟아 내며 감정적으로 굴던 유현의 태도만 봐도, 보통 일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녀가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왔다는 건.
“이번에 새로 익힌 그 힘, 때문인가.”
“뭐야. 너도 눈치챘어?”
“그 힘을 다루는 녀석과 직접 싸웠는데, 모를 리가.”
그걸 싸운다고 해서 아는 것도 여러모로 기가 막힌 부분이었다.
미친 재능충 자식.
유현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온 것을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최도윤은 헤라클레스와 나름 무기를 맞대며 싸운 이후, 급화에 대한 실마리를 깨우친 것이다.
보통은 느끼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돼 먹은 잠재력인지.
하지만, 이제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최도윤이 강해지면 이쪽의 전력이 늘어나서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을 테니까.
“언제 떠날 거냐?”
“바로 당장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일행들에게 말은 전해야겠지.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떠나겠군.”
“곧 있을 전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보나?”
“…….”
최도윤은 전쟁을 확신했다. 제단이 나서며 살리오 제국을 제거한 시점에서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대체 왜 살리오 제국을 먼저 제거하고, 남은 연합은 그대로 놔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언젠가 연합의 차례가 올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몰라.”
유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애초에 제단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겠고.”
“대성군들이 벌벌 떨 정도지.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거나, 혹은 침묵하고 있으니까. 그들도 제단에는 맞서기 싫다는 소리야.”
“그러면 확실히 지금 우리 수준에서는 못 이기겠지.”
“지금, 인가. 앞일은 모른다는 거로군. 방법은 있나?”
유현은 손가락으로 최도윤을 가리켰다.
“방법이야 하나뿐이지. 강해져. 네가 실마리를 잡은 그 힘, 그걸 완벽히 다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강해져야 해. 다가올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유현은 최도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제대로 시선을 마주하게 됐다.
최도윤은 유현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올 전쟁이라고 확신을 담아 말하는 걸 보면, 너는 이미 길을 정해 놓았었군.”
“길을 정하기는 무슨. 그냥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렇다 해도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걷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유현은 이 녀석이 왜 갑자기 이런 좋은 말을 하는 거지? 하는 시선으로 최도윤을 주시했다.
최도윤은 살짝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최도윤이 웃는 모습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감정이 죽은 로봇 같은 이 녀석도, 미소를 지을 줄 알았구나.
그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도윤은 등을 돌렸다.
“뭐야?”
“할 말은 끝냈으니, 수련하러 갈 거다.”
“다친 몸으로?”
“이까짓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당장 검을 휘두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거든.”
“……마음대로 해라.”
옥상 문을 벗어나기 전 최도윤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를 도와줘서 고마웠다.”
그 말을 남기고, 최도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처음으로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유현은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었다. 현실인 걸 아는데,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다.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옥상 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지아 씨?”
아직도 후드를 뒤집어쓴 권지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