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400화
유현은 어둠 속을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곳이 대체 어디인지, 하늘과 땅은 분간이 가지 않았고. 자신이 제대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그런 의문이 막 떠오르려던 차에 정면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어둠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 유현은 거기에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꼈다.
빛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 누군가가 이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누구지?’
나이도 성별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보다 더 의문이 드는 것은 저자가 과연 인간이 맞기는 하냐는 것이었다.
빛 속에 존재하는 그는 그냥 새하얬다.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흰색 마네킹을 세워 놓은 것처럼 생겼다. 무엇보다 덩치가 커서 유현이 상당히 올려다봐야 했다.
인간의 형상을 갖췄지만, 모든 것이 하얗고 신장도 상당히 커서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
유현의 기척을 느낀 건지 그가 뒤를 돌아봤다.
[음? 설마 이런 곳에 손님이 올 줄이야. 이게 대체 얼마 만이지? 아니, 그보다 이런 곳에 누군가가 들어올 수도 있는 거였나?]
‘당신은…….’
[음? 하하! 이거, 어떻게 왔나 했더니 파편의 소유자였군. 아, 그런가. 벌써 그럴 때가 온 건가. 생각보다 시간이 참 빨리 흘렀어.]
그럴 때? 시간이 빨리 흘렀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무엇보다 상대방은 애초에 유현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것은 그저 혼잣말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냐고 유현이 말을 걸기도 전이었다.
[흐음. 그렇다 해도 이런 곳에 멋대로 온 손님을 소홀이 대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상하게도, 유현은 여유가 가득한 그 목소리에 소름 끼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전신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이 기분. 죽음보다 더 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
이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낀 게 언제였던가.
‘책벌레를 마주했을 때?’
그런 결론을 내린 것과 동시에 눈앞의 존재가 입을 열었다.
[그냥, 지울까?]
오싹.
등골을 타고 싸늘한 오한이 내달린다. 저건 단순히 그냥 해 보는 말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그것을 넘어서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시행할 수 있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책벌레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녀석은, 책벌레보다 훨씬 더 거대한 무언가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그 순간, 유현의 등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허?]
눈앞의 존재도 또 한 명의 불청객의 등장에 어이가 없었는지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꽉 잡아.”
목소리의 주인은 곧바로 유현을 붙잡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너무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서 유현은 반응하지 못했다.
한 줌의 빛만 존재하는 끝없는 어둠을 넘어서 유현은 어디론가 이동했다.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그 광경에 유현은 이게 진짜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너는 아직 그를 만날 준비가 안 됐거든.”
“당신은, 누굽니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보다도 상대방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훨씬 더 컸다.
자신을 구해 준 것으로 추정되는 은인은 조금 전 새하얀 존재와는 반대될 정도로 새까맣게 생겼다. 신장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유현은 그가 웃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누군지 궁금한 건가. 당돌하다고 해야 할지, 호기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대답은 안 해 주실 겁니까? 방금 거기는 어디고, 또 그 새하얀 존재는…….”
“미안하지만, 나는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이곳에서는 특히나.”
“이곳?”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나를 직접 찾아와. 혼성계 어딘가에 내가 있으니까. 그때는 말해 줄 수 있을 거다.”
“당신을 어떻게 찾아가죠?”
“거짓된 예언자를 찾아. 그가 안내해 줄 거다.”
“거짓된 예언자?”
“짐승도 나타났고, 용도 있으니, 남은 건 이제 거짓된 예언자지. 그 모든 것이 다 모인다면 너는 진실을 알게 될 거다.”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유현은 자신이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해져서 물었다.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죠.”
“이름은 그때 만나면 대답해 주지.”
“왜죠?”
“지금 말하면 재미없잖아?”
검은 존재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동시에 유현의 몸이 저 아래로 자유 낙하했다.
“허억!”
한없이 떨어지던 유현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병실로 추정되는 곳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유현 씨? 정신이 들었어요?”
그런 유현을 반겨 준 것은 곁에서 계속 보살피고 있던 백서련과 강혜림이었다. 더불어 강유라까지 있었다.
“제가, 어떻게 된 거였죠?”
“그…… 헤라클레스가 물러나고, 제천대성님도 떠났어요. 그리고 유현 씨가 기절해 있어서 저희가 데려온 거죠.”
“싸움은…….”
“이겼어요.”
이겼다는 그 한마디에 유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지아 씨. 지아 씨는 멀쩡합니까?”
“나는 괜찮다.”
권지아가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했는지 그녀는 여전히 머리 위에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다.
“마그니는…….”
“죽였다. 내가 직접 죽였지.”
“이기셨군요.”
“내가 질 거라고 생각했나?”
“그럴 리가요.”
유현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누구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 모여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고마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물론, 사망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 그가 나타나면서 연합의 군주 중 태반이 다치거나 죽었으니까.
집행자인 최도윤, 윌포드, 네마르타는 큰 부상을 입었고, 군주 중에서도 부상자가 대거 속출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유현이 아는 군주 중에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도 손오공이 중간에 나선 덕분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연합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둘 다 조용해요. 아무래도 이번에 연합 내전에서 저희가 승리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비밀리에 보낸 정예 병력이 전부 패배한 탓인지 딱히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더라고요.”
싸움이 끝났을 때, 백서련은 곧바로 후속 처리에 들어갔다. 죽었다 깨어난 건 깨어난 거고,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니까.
일단 혹시라도 재차 침공을 가할지 모르는 살리오 제국의 동태와 그들과 손을 잡은 올림포스, 아스가르드를 살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것이 이번 싸움으로 너무 큰 타격을 입었으니까.
특히, 살리오 제국의 경우에는 집행자 둘 중 하나는 인질로 잡히고, 다른 하나는 죽기까지 했다.
살리오 출신의 군주들도 마찬가지.
“제국은 자멸하게 될 거예요. 집행자를 모두 잃고 군주들까지 잃었으니, 그들은 사실상 전력의 중추를 소실한 셈이니까요.”
“저항의 가능성은?”
“그것도 생각은 했었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일단 이번 싸움이 워낙 크게 소문이 났거든요.”
“헤라클레스 때문이군요.”
그 정도의 존재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힘을 드러냈다. 그리고 연합은 그런 헤라클레스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연합의 공이라기엔 하자가 많다. 투전승불이 된 손오공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모두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니까. 굳이 공을 매긴다면 손오공이 8할, 유현이 나머지를 차지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에 취한 연합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 싸움을 직접 겪은 자는 너무 극소수라서 싸움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걸로 한숨은 돌렸어요. 평소에도 연합을 눈독 들이던 세력들은 이번 일을 기점으로 얌전히 지내겠죠.”
“내전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움직이는 자들은 없답니까?”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런 자들은…… 전부 다 정리됐죠. 제천대성님 덕분이에요.”
“아.”
그냥 떠난 건 아니고, 마지막까지 케어를 해 주고 간 거구나.
유현은 다음에 다시 손오공을 만나게 된다면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로 다짐했다.
“서련 씨, 몸은 괜찮습니까?”
“네? 아, 네. 괜찮아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쌩쌩한걸요.”
백서련은 일부러 팔뚝에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수심이 깊어 보이던 얼굴은 이번 내전을 승리로 이끈 덕분인지 훨씬 밝아졌다.
병원 내에서 잠시 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유현은 몸 상태를 점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은가?”
“네.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유현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세상에 무슨 감상을 품을지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화안금정을 받고, 백서련을 살리며 급화까지 터득한 이후로 유현은 자신의 무언가가 변했다고 느꼈다.
이야기를 완벽하게 다루는 기술.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이전처럼 할 수 없겠지만, 유현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소득이었다.
‘힘이, 이전보다 더 넘쳐.’
헤라클레스로부터 이야기를 일부 빼앗았던 것이 기억났다. 빼앗는 데만 열중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헤라클레스의 이야기 일부가 자신의 몸에 스며든 것이다.
유현은 분명 이전보다 눈에 띄게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헤라클레스를 마주하고 백서련이 죽을 뻔했을 때 느끼던 그 절망감과 분노. 그것은 아직도 조금 전에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단서를 얻었으니 이제 급화를 완전히 터득할 일만 남았어.’
애초에 이 급화라는 것 자체가 흑뢰군주가 되었던 강혜림을 되살렸을 때와 상당히 흡사했다. 그것은 자신이 지닌 코덱스의 파편, 상대방의 책을 볼 수 있는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분명,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유현은 자신이 변했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관조자처럼, 그 이후에는 스스로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동을 했다면.
이번에는 마치 이야기를 쓰고 고치는 작가가 된 기분이다.
‘그리고, 꿈속에서 만난 그 검은 존재.’
그는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거짓된 예언자를 찾으라고 했다.
그 거짓된 예언자는 대체 누구일까? 방법을 알려 주지도 않고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 정도의 존재가 그런 말을 허투루 내뱉었을 리가 없다.
‘해야 할 일이 늘었어.’
무엇보다 백련이 마지막에 했던 말.
이 세상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는 것.
“지아 씨.”
“왜 부르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권지아에게 혹시나 이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권지아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까지 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백련은, 직접 그 우주의 재시작을 견뎠으니 알고 있다고 치고.
‘용케도 파괴되지 않고 견뎌 왔구나.’
유현은 백련을 매만졌다. 항상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백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어딘가 허전했다.
백련은 이제 없다. 이전 우주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며.
‘백련…….’
언제나 곁에서 함께 해 온 동료의 빈자리는 이렇게나 크고 공허했구나.
그러다 유현은 문득 다른 한 존재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면 내가 5년 전 대폭발에 휘말렸을 때, 사탄은 시스템의 제재를 받으면서까지 백련을 회수하려고 했어. 그리고 내가 돌아온 것을 기다렸다는 듯 알아차리고 백련을 내게 보냈지.’
대체, 왜?
처음에는 사탄의 그런 행동에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사탄은 원래부터 속을 알기 힘든 모습을 더러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백련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알게 되면서, 사탄의 지난 행적이 재조명받게 됐다.
이전부터 사탄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특히 유현이 파편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라플라스의 파편을 가장 먼저 선물해 준 것도 사탄이었다.
‘만약, 처음 연회장에서 나를 만났던 것도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다면?’
페널티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백련을 회수한 것도, 사실 백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거라면?
단순한 의심은 그 순간 확신이 되었다.
사탄, 그는 분명 이 우주가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자신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검은 존재는 짐승과 용에 대해서 언급했어.’
기독교 종말론에서 짐승과 용, 그리고 거짓된 예언자를 하나로 묶어서 불경한 삼위일체로 본다.
짐승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묵시록의 붉은 용. 그 진짜 정체가 사탄이라는 걸 모르는 존재는 없다.
용은 존재하며 짐승도 나타났다. 남은 건 거짓된 예언자. 그렇다는 것은 사탄은 그 검은 존재와 연관이 있다는 소리다.
‘어서 움직여야 해.’
이런 곳에서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 순간, 병실의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최도윤?”
이번 부상은 진짜인지 몸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는 최도윤은 세상 심각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소와 같겠지만, 이 녀석의 사소한 감정의 변화도 알 수 있는 유현이 보기엔 지금 최도윤은 매우 다급해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환자가 이렇게 다급하게 움직이고.”
“소식 들었나?”
“소식? 무슨 소식?”
그 말에 병실 안쪽의 다른 사람들도 듣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살리오 제국이 사라졌다.”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단이 직접 움직였어.”
제단이라는 말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제단이라고 한다면 이 우주의 법칙을 아우르는 제네시스 제단뿐이다.
그런 제단이 나섰다고?
“그게 진짜야?”
“방금 막 들려온 소식이다.”
최도윤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리오 제국은, 제단에 의해서 완전히 지워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