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99화
쿨럭.
마그니는 거친 기침과 함께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피를 토했다.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덥수룩한 수염을 적시더니 이윽고 텍스트로 변해 흩어졌다.
마그니의 시선이 이쪽을 내려다보는 권지아를 향했다.
피로 물든 이빨을 드러내며 마그니가 웃었다.
“큭큭. 설마 그 정도의 힘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펜릴에 이어 짐승의 힘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거냐. 그것도 고작 인간이?”
마그니의 몰골은 매우 처참했다. 그의 몸은 성한 곳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팔과 다리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겨져 나가 있었고, 몸 곳곳에 짐승이 물어뜯은 자국으로 가득했다. 곧바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처인데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은, 그가 위대한 전사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이 정도의 상처는 아무리 2세대 성령인 마그니라 하더라도 치명적이기에 빠른 속도로 생명력과 이야기가 빠져나갔다.
곧 죽어 가는 데도 마그니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크흐흐. 정말 된통 당했군. 설마하니 그런 끔찍한 힘을 2개나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하나만 해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것을, 욕심을 부려 2개나 가지다니. 너는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 거냐?”
펜릴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권지아는 아스가르드의 주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단지 아스가르드뿐인가? 펜릴은 신화에 나오는 신을 죽이는 마수다. 그리고 이런 펜릴은 혼성계에서 책벌레로 규정되어 있었다.
권지아는 그런 펜릴의 힘을 지닌 것이다. 금지된 힘. 그것이 불러오는 여파는 거대하다.
그런데, 권지아는 단순히 펜릴에서 그치지 않았다.
묵시록의 짐승.
숫자 666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의 힘까지, 그녀는 거머쥔 것이다.
“그 힘은…… 네 저주가 될 거다.”
“저주는 이미 충분히 겪고 있어.”
권지아에겐 죽어도 계속 반복되는 이 삶이야말로 진짜 저주였다.
그것에 비한다면, 짐승의 힘이니 펜릴의 힘이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록 이만한 힘을 얻은 대가를 언젠가 치르게 된다. 그 부분은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다.
“이 삶의 굴레를 끝낼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괴물의 힘이라도 받아들일 거다.”
“크핫!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이게 괴물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마그니는 몇 번이고 미쳤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흐릿해졌다.
“아쉽구나. 네 앞길에 얼마나 끔찍한 고통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것을 마주하는 네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지 이 두 눈으로 보지 못해서.”
“직접 보게 된다 해도 기대하던 광경은 아닐거다.”
권지아는 마그니가 살아 있더라도, 그가 바라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마그니는 권지아의 당당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펜릴과 짐승의 힘을 사용하는 만큼, 권지아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다루는 이 힘이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거다.
허락받지 못한 힘을 다루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 힘이 결국엔 소유자를 잡아먹을 테니까. 그리고 저런 힘을 다루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녀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아스가르드에 이어 에덴의 천상낙원도 그녀에게 칼을 빼 들겠지.
고작 일개 개인이 대성군 둘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평생 도망을 치다가 자멸하게 될 거다.
“무섭지 않은 거냐?”
“무서웠다면 이런 힘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그 최후에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다.”
“그렇다면 그 파멸도 넘어 보이겠다.”
“고작 인간 따위가?”
“인간이니까.”
아마, 예전의 그녀였다면 절대 이런 말을 입에 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 삶을 겪으며 한 남자를 만나 많은 것을 보게 됐다.
그 남자가 자신의 악몽 속에서 어떻게 절망을 극복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끊으면서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그 결의를.
그녀는 누구보다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너는, 진짜 괴물이구나.”
“얼마든지 괴물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렇다고 내 각오가 달라질 일은 없어.”
“크하하! 하긴, 스스로도 괴물이라는 말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콜록. 재차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마그니는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음을 느꼈다.
그는 권지아를 괴물이라 불렀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며 떠오르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이게 인간이구나.”
“…….”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벌벌 떨기만 하는 하등한 존재들인데. 하지만 때로는 누구보다도 더 처절하게 뭐든지 할 수 있는 족속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결국에 운명마저 저항해 보이는 녀석들. 그게 인간이었어.”
권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그니의 말에 긍정했다.
그 누구보다도 마그니가 말한 인간에 자신이 가장 부합하는 존재였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괴물의 힘을 얻고, 모든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면서, 결국에 콧대 높은 신마저도 끌어내려 버리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끝까지 발버둥 쳐 봐라. 인간이여.”
마그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의 육신이 무수한 텍스트 조각으로 변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아스가르드의 거대한 별이 저물었다.
* * *
유현은 헤라클레스의 손을 뻗어 헤라클레스가 지닌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헤라클레스의 머리위에 떠다니는 찬란한 빛을 내뿜는 책. 펼쳐지지 않는 그것을 억지로 펼치며 페이지를 하나씩 뜯어냈다.
뜯어낸 페이지는 이윽고 무수한 활자로 변해 유현의 몸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힘조차도 헤라클레스가 지닌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일 뿐.
그러니 이 상황을 계속 유지해야만 했다.
‘눈이 빠질 것만 같아.’
기존에 세상을 보는 눈에 손오공의 화안금정까지 더해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글자로 보이는 기묘한 광경.
라플라스의 눈을 처음 썼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눈을 타고 들어오는 막대한 정보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그리고, 눈으로 보이는 그것을 손으로 만지며 움직이려는 그 과정조차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것 같아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느낌에 적응을 해야만 했다.
자신이 새롭게 일깨운 이 감각이야 말로, 이 혼성계를 아우르는 진정한 힘이었으니까.
‘저 괴물이 왜 저렇게까지 강한 건지 드디어 이유를 알겠어.’
유현은 헤라클레스를 상대로 모든 능력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에는 패배했다.
유현은 자신이 약해서 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자신은 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헤라클레스의 힘이 월등히 강한 것도 아니었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놓고 보면 둘이 지닌 힘의 총량은 비슷했다.
단지, 헤라클레스와 달리 유현은 이 세상을 아우르는 진짜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을 뿐.
스르륵.
헤라클레스의 몸 주위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때로는 바람을 타고 흐르고, 때로는 의지에 반응해서 꿈틀거리고, 때로는 저들끼리 뭉쳐서 무엇보다도 단단해지는, 그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들.
반투명한 글자들.
저것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고, 외부에서 가해지는 대부분의 타격을 흡수하는 불가사의한 힘의 정체였다.
“네놈.”
헤라클레스는 유현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짧은 순간에 급화(扱話)를 터득한 거냐?”
급화, 다르게 말하면 이야기를 다루는 법.
일정 수준을 넘어선 자들만이 익힐 수 있는 진짜 힘. 이 급화를 사용하는 것은 각 대성군의 1세대 성령 중 극히 일부였다.
헤라클레스가 이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도, 다른 영웅들과 다르게 이야기를 보는 능력과 다루는 실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아무리 초월자니 군주니 치켜세워 줘도, 그들의 힘은 말 그대로 단순히 자신 기준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급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이 세상이 되는 것이다.
고작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 전체를 아우를 수 없듯, 급화를 터득한 자와 터득하지 않은 자의 격차는 컸다.
그런 급화를 배운 자를 상대하려면 똑같이 급화를 깨달아야만 했다.
“믿을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그가 이 힘을 깨닫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헤라가 내리는 시련을 받으며 온갖 괴물들을 쓰러뜨리고, 결국에는 벽을 넘어섰다.
벽 너머의 것을 보고 느끼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영웅에서 괴물, 괴물에서 신으로 불릴 때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던가.
그렇게 해서 겨우 실마리를 잡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붙들어서 겨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강유현은 아주 약간의 계기만 주어졌을 뿐인데, 자신과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저 녀석이 저렇게 보여도 보통이 아니거든.]
그런 헤라클레스를 보며 손오공이 조소를 날렸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손오공 또한 유현의 성취에 놀란 것은 매한가지다.
‘나름 힌트를 주기는 했는데, 설마하니 바로 깨달을 줄이야.’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해서 화안금정까지 건네주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최소 몇 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현은 시간만 놓고 보면 10분도 걸리지 않는 그 짧은 순간에 급화를 터득했다.
천부적인 재능? 아니, 급화를 터득하는 것은 단순히 재능 같은 걸로 치부할 수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예정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화안금정은 단지 언젠가는 벌어질 일을 앞으로 당겼을 뿐, 일어날 수 없는 걸 일으킨 게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헤라클레스가 황급히 몽둥이를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직후 여의봉에 얻어맞은 헤라클레스의 몸이 멀리 튕겨 나갔다.
조금 전까지 서로 대등하게 싸우던 둘의 균형이 유현의 개입으로 무너졌다.
“감히!”
헤라클레스가 이를 악물며 외쳤지만, 손오공은 지금 잡은 승기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무수한 분신이 헤라클레스를 향해 달려들었고, 헤라클레스는 필사적으로 분신에 맞섰다.
헤라클레스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그 상처를 타고 신혈이 흘렀다.
위험하다.
헤라클레스는 이대로 가면 자신이 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 패배는 곧 죽음을 뜻했고, 이어서 올림포스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과 같았다.
까득. 헤라클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결국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그의 발걸음이 조금씩 뒤로 향했다. 가장 먼저 낌새를 눈치 챈 손오공이 조롱했다.
[도망치는 거냐? 천하의 헤라클레스가?]
“전략상 후퇴하는 거다.”
이런 말을 직접 입에 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헤라클레스는 속으로 합리화하며 유현을 노려봤다.
“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죽여 주마.”
그 말을 남기고, 헤라클레스는 도망쳤다. 손오공은 그런 헤라클레스를 쫓으려 했지만, 유현이 갑자기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쓰러졌기에 혀를 쯧 차며 추적을 무를 수밖에 없었다.
[쯧. 운 좋은 녀석.]
그것은 유현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헤라클레스에게 한 말인지 모호했다.
손오공은 도술을 해제하며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온 여의봉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유현을 깨우자니 바로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손오공은 주변을 둘러봤다. 연합의 생존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뭐, 이 정도면 충분히 서비스를 해 준 것 같으니, 이 이상 무언가를 더 해 줄 필요는 없겠군.]
원래라면 전부 죽었어야 할 자들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헤라클레스를 막음으로써 전멸을 면했으니 사실상 자신은 저들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화안금정까지 전해 주고, 급화를 다루는 법도 깨닫게 해 줬으니 이쪽이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준 셈이었다.
[나중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지.]
그리고, 분명 그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천기가 조금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불운한 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으니까.
손오공의 기억 속에서 저런 경우가 먼 과거에 딱 한 번 있었다.
거대한 전쟁이 터지기 직전. 신과 마, 그 외의 모든 별을 떨게 만들었던 대전이 벌어졌을 때 딱 천기가 이랬다.
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돼 먹으려는 건지.
손오공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빛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