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98화
유현은 백련의 책을 만졌다.
이전에 책을 만지는 것에 대한 별다른 감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은 소중한 것을 만지듯 유현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럽고, 또 부드러웠다.
손에 닿는 책의 감촉이 마치 온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따뜻하다.
이것이 지금의 백련을 구성하는 이야기이자, 그녀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근원.
유현은 그것을 잘게 부서서 백서련의 몸에 흘려 넣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화아악!
동시에 백서련의 몸이 빛에 휩싸이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헤라클레스가 만들어 낸 상처가 빠른 속도로 복구됐다. 그것을 채우는 것은 그녀가 지닌 이야기였다. 새하얀 활자가 상처에 스며들고, 상처를 재생시키며 백서련의 몸 전체에 깃든다.
그 기적 같은 광경에 강혜림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고, 그녀의 품 안에 안긴 백효도 눈을 크게 뜬 채 멀뚱히 구경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지며 백서련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 유현 씨?”
“네. 서련 씨. 접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
백서련은 그제야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손을 들어 올려 복부를 만졌지만, 상처는 없었다.
대체 왜 상처가 없어진 건지, 어떻게 죽기 직전이었던 자신이 살아난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현이 또 무언가를 했다는 것은 알겠다.
그것에 무슨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까 고민하던 백서련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
“꿈을 꿨어요.”
“그렇습니까.”
“조금 뜬금없기는 한데, 꿈속에서 유현 씨가 울고 있었어요. 막 눈물을 흘리면서 저한테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했었죠.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검이 됐어요. 웃기는 이야기죠?”
“…….”
“아무튼 그렇게 해서, 기억이 흐릿한데…… 검의 상태로 아주, 아주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았어요. 얼마나 오래인지 모를 정도로. 진짜 이상해요. 꿈일 텐데 너무 생생해서…….”
“…….”
“그러다 눈을 뜨고 지금 유현 씨를 보니까, 이상하게 딱 이 말을 해 주고 싶더라고요.”
“무슨, 말이요?”
유현은 최대한 슬픔을 억누르며 그렇게 물었다.
“고맙다고.”
“…….”
“지금까지 함께해서, 정말로 고마웠다고요.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렇습니까.”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해야 할 말은 나중에 더해도 됩니다.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으니까요. 서련 씨는 혜림 씨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빠져 주세요.”
“유현 씨는…….”
“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백련을 슬쩍 살폈다. 손끝에 맴도는 감촉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유현은 어째서인지 지금의 백련은 예전보다 더 차갑다고 느꼈다. 그때의 온기가 아련했다.
그 무렵 지상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더욱 격화됐다.
헤라클레스와 손오공이 벌이는 싸움.
그걸 끝낼 때였다.
* * *
마그니와 권지아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세를 잡지 못해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서로가 견제만 날리면서 간을 보는 싸움은 아니었다.
권지아도, 마그니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움에 임했다. 초토화된 주변이 그것을 증명했다.
묠니르가 남긴 번개의 흔적과 권지아가 남긴 짐승의 이빨과 발톱 자국이 주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승부가 나지 못한 것은 그만큼 둘의 실력이 백중세였기 때문이다.
“후욱. 후욱. 이거 참 말도 아니군.”
마그니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쉬지 않고 휘몰아치던 공세에 제동을 걸었다. 권지아 또한 마그니를 노려보며 들끓는 기운을 가다듬었다.
둘의 싸움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주위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아마 이대로 승부를 판가름하려면 최소 몇 날 며칠은 쉬지 않고 싸워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권지아의 조급함을 느낀 마그니가 음흉하게 웃었다.
“너도 느꼈지? 지금 너희 동료들이 있는 곳에, 녀석이 나타났다는 걸.”
“녀석이라면…… 조금 전부터 네가 경계하던 놈인가?”
“알면서 뭘 묻지? 올림포스에서 내가 그렇게 경계를 할 정도의 녀석은 몇 없지. 그리고 이런 곳에 직접 그 귀한 몸을 이끌 녀석은 더욱 한정되어 있고.”
그 말에 권지아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헤라클레스.”
“그래. 올림포스 녀석들. 어째서 별다른 병력을 보내지 않았나 했더니, 그런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지. 이 연합의 땅덩어리가 어지간히도 탐이 났나 보군.”
“…….”
권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헤라클레스의 명성은 그녀도 익히 아는 바였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녀는 헤라클레스를 기억하고 있다.
600번이 넘는 회귀를 하면서 그녀가 헤라클레스를 마주했던 것은 10회차 이전에 딱 한 번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그녀가 기억을 되찾은 이후 잊을 만하면 자꾸 떠오르며 그녀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헤라클레스의 강함은 그랬다.
‘지금 연합의 수준에 헤라클레스가 나섰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해.’
적어도 그녀가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권지아도 헤라클레스와 싸운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10분 이상 버틸 수 있나? 권지아는 냉철하게 자신이 지금 어느 수준인지 판단했다.
‘그걸’ 사용하면 어떻게든 비등하게 싸울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다.
이곳의 헤라클레스는 단순한 영웅이 아닌, 기간토마키아를 승리로 이끈 최강의 신이니까.
그런 존재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힘, 혹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저쪽에 남겨 놓은 동료들이 걱정되나 보지?”
“……그래. 덕분에 이 싸움을 더 빨리 끝낼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건방지긴. 마치 자신이 이길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럴 자신이 있으니까 말을 꺼낸 거야.”
권지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마그니는 그 모습에 불쾌함을 느꼈다.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눈을 감아? 지금까지 비등하게 싸워서 이쪽을 만만하게 본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생각을 바로 고쳐 주마.
마그니는 묠니르를 쥐고 우렁찬 번개를 방출했다. 이대로 권지아를 태우는 것을 넘어 잿더미로 만들 생각으로 묠니르를 들어 올리려는 그때.
마그니는 권지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너…….”
“이것까지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진한 어둠에 잠긴 것 같은 음울한 목소리가 마그니의 귓가를 울렸다,
마그니는 진한 향기를 느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맡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맡는 이 향기가 무엇인지 본능이 깨닫고 만다.
죽음.
마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펜릴에 이어 그것까지 사용하다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다 해도 끔찍한 미래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가!”
“내겐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을 정도로 지금의 삶이 중요하거든. 다시는 잃기 싫을 정도로. 그러니 이 마지막 기회를 최선을 다해 불태워야 하는 거 아니겠어?”
권지아는 어둠 속에서 웃었다.
보랏빛 늑대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없었다. 단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수한 ‘짐승’들이 나타났을 뿐.
그 숫자는 666마리였다.
* * *
헤라클레스가 팔을 뻗었다.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그의 주먹이 손오공의 황금쇄자갑의 중앙을 때렸다. 거기에 얻어맞은 손오공의 몸이 뒤로 대포처럼 튕겨 나갔다.
헤라클레스는 공중에서 쏜살같이 움직이며 손오공의 뒤를 쫓았다. 그대로 따라잡아, 다시 주먹을 쥐고, 강하게 내리친다.
일격에 살의를 담아, 단지 상대방을 일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꽈르릉!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공간이 뒤틀리며 굉음이 울렸다.
[오. 열심히 하네?]
하지만 옆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죽이려던 대상이 한낱 분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주먹을 뻗는다. 공기가 폭발하며 공간이 일렁였다. 단순한 주먹질로 그런 위력이었다.
말을 건 손오공의 몸이 터진다. 그리고 흩날리는 것은 손오공의 머리털. 그마저도 분신이라는 사실에 헤라클레스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헤라클레스는 어느덧 무수한 손오공의 분신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미꾸라지 같은 녀석.”
[어때. 전부 다 죽일 수 있겠어?]
“우습게 보지 마라.”
분신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천이 넘어 보였다. 저 분신 하나가 대성군의 정예 병사를 뛰어넘는 무력을 지녔다. 공격을 허용하면 위험하다.
헤라클레스는 다시 활을 꺼내 들었다. 이름은 없이 그저 몬스터 킬러라고 불리는 이 무기는 그가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던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곧바로 화살을 쏘았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10발 가까이.
천 명이 넘는 분신을 상대로 이 정도면 충분했다. 화살이 허공에서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분신들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500이 넘게 당했다. 손오공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분신들이 마치 소나기처럼 헤라클레스를 향해 떨어졌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을 가르며 헤라클레스가 손오공의 본체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손오공은 곧바로 여의봉을 휘둘러 방어에 들어갔다.
둘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콰가각! 거대한 압력을 견디지 못한 세계가 일그러지며 비명을 토했다. 힘은 헤라클레스가 더 우위였다. 손오공의 몸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렇게 밀리던 몸이 어느덧 우뚝 멈춰 섰다.
‘버틴다고?’
손오공의 덩치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커지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얼굴이 3개가 되고 팔이 6개로 늘어났다. 손오공을 내려다보던 헤라클레스는 어느덧 그를 올려다보게 됐다.
도술. 삼두육비(三頭六臂).
여섯 개의 팔이 각자 여의봉을 쥐고 헤라클레스를 향해 짓쳐 들었다.
헤라클레스도 단순히 육탄전을 넘어서 자신의 진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그 명령을 받들어 산만 한 멧돼지와 황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두 짐승은 그가 시련을 넘으며 하사받은 능력이었다.
칼리돈의 멧돼지와 크레타의 황소는 각자 엄니와 뿔을 앞세워 손오공을 향해 짓쳐 들었다. 동시에 헤라클레스가 협공을 가했다.
삼두육비로 거대해진 손오공의 몸이 재차 뒤로 밀려났다.
‘대단하군.’
자신이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상대를 했는데 버티는 걸 넘어 대등한 존재는 이랑진군과 우마왕 이후로 거의 없었다. 아니, 그나마 나타가 있었나? 하지만 녀석도 30합 이상 버티지 못했다.
헤라클레스는 달랐다. 방심하면 지는 건 이쪽이 될 거다.
“커져라, 여의.”
손에 쥔 여의봉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여섯 개의 팔에 매달린 여섯 개의 여의가 거대한 기둥이 되어 떨어졌다. 아니, 기둥처럼이라는 말은 틀렸다. 애초에 여의봉은 용궁을 떠받들던 기둥이었으니까.
칼리돈의 멧돼지와 크레타의 황소가 각기 여의봉에 하나씩 깔려 소멸했다.
헤라클레스는 떨어지는 여의를 손으로 붙잡아 그대로 휘둘러 나머지 여의를 모두 쳐 냈다.
무너져 내리는 가짜 여의의 파편 속에서 황금색 불꽃이 헤라클레스를 향해 짓쳐 들었다.
헤라클레스는 싸늘한 시선으로 손오공을 맞이했다.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설마.]
두 성령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서로의 공방이 다시 오가려는 순간, 헤라클레스가 지하 기지로 쳐들어가면서 만든 거대한 구멍을 통해 새하얀 그림자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헤라클레스는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가 곧이어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히 죽였다고 생각한 백서련이, 자신이 눈독 들이던 강혜림이라는 여인과 함께 커다란 부엉이를 타고 도망치고 있었다.
‘어떻게? 회복약은 분명 없앴을 터.’
애초에 회복약이 있어도 그녀의 상처를 치료할 방도는 없었다. 상처를 내면서 백서련의 몸에 독을 흘렸으니까. 히드라의 독 정도는 아니지만, 초월자도 되지 못한 백서련이 그 독을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책더미 군주. 그 남자가 뭔가를 했군.’
헤라클레스는 곧바로 유현이 무언가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숨겨진 한 수가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귀찮게 됐다. 죽였다고 확정한 대상을 다시 죽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늘었으니까.
[지금 어딜 한눈팔고 있는 거지? 우리 싸우는 중 아니었나?]
“……확실히 지금 네놈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됐지.”
[핫! 어디 한번 해 보라니까?]
헤라클레스가 전력을 가다듬으려는 순간이었다.
휘청!
헤라클레스의 다리 한쪽에 힘이 풀리며 그의 몸이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시종일관 오만함과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헤라클레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설마, 손오공과 싸우면서 누적된 데미지가 이제야 생긴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의 몸 상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이 느낌은, 손오공 때문이 아니었다.
헤라클레스의 시선이 곧바로 이 사태의 범인을 향했다.
강유현. 책더미 군주라 불리던 남자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단지 그뿐인데도, 몸에 가해지는 압박감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헤라클레스는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가, 유현의 손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