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97화
[꼴이 말이 아니구나.]
손오공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천계의 악동에서 한 명의 부처로 승화한 손오공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악동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는지 경박함이 묻어 나왔다.
[뭐, 순전히 네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설마 올림포스 녀석들이 헤라클레스를 불렀을 줄 누가 알았겠어.]
손오공도 혼성계에서 헤라클레스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다.
헤라클레스는 성령들의 세계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존재로 꼽혔다.
태어났을 때부터 성령이 아닌, 그 피를 이어받은 데미갓.
심지어 막 태어났을 때는 자신이 성령의 피를 이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영웅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올림포스에 영웅 출신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었다.
헤라클레스와 비슷한 존재는 혼성계에서도 널리고 널렸으니까.
성령의 피를 이어받아 영웅이 되고, 결국에는 3세대 성령의 자리에 안착하는 자들.
헤라클레스도 어떻게 보면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다른 자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대부분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그러지 않았다.
운명 거역하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노력 때문인지 헤라클레스는 영웅이라 불리던 시절에도 신들이 벌벌 떨던 괴물들을 손쉽게 쓰러뜨리고, 심지어 다른 신들마저도 겁에 질리게 할 가공할 힘을 선보였다.
그렇게 올림포스의 주신인 헤라의 12시련까지 모두 해결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육신을 불살라 육신이라는 틀을 벗어던지고 영성을 얻어 올림포스의 드높은 천상으로 올랐을 때.
그는 비로소 최강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하여간, 저런 걸 만들 생각을 한 건 대체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헤라클레스는 혼성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이질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1세대 성령의 피를 이었지만, 그것이 무슨 돌연변이를 일으키기라도 했는지 극단적인 방향성으로 발전해 버린 시대의 기형아.
모두가 그의 강력한 힘을 두려워해서 영웅으로 칭송하지만, 손오공이 보기엔 저 녀석은 제우스의 욕심이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그 제단마저도 저 한 놈 때문에 성령에게 더는 자식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제약을 걸었을 정도니,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도와주러 오신 겁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 괴물에게 내가 선빵을 날리진 않았겠지?]
손오공은 유현에게 그리 답하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잘려 나간 유현의 팔이 유현에게 돌아왔다.
유현은 상처에 잘려나간 팔의 단면을 가져다 댔다. 고통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팔이 다시 붙었다.
유현은 왼팔을 쥐었다 폈다. 다윈의 육신을 지녔기 때문에 상처는 순식간에 재생됐지만, 헤라클레스에게 패배한 충격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저 괴물은 걱정하지 마라. 녀석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유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손오공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다. 녀석의 소문은 익히 들어 봤지만, 그렇다고 나도 딱히 꿀린다고 생각을 해 본 적은 없거든.]
그가 단순히 천계를 휘젓던 돌원숭이였다면 분명 패배했을 거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신의 자리에 올랐듯, 손오공 또한 삼장과 함께 천축까지의 여정을 끝내며 부처가 되었다.
신이 된 헤라클레스와 투전승불이 된 손오공.
그들이 쌓아 온 이야기의 수준과 존재의 격만 놓고 보면 거의 대등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아서라. 상처는 회복해도 그런 꼴로는 녀석에게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어.]
“제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유현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은 손오공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것 봐라. 조금 전 패배가 어지간히도 분했나 보지?]
“아직 저는 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고. 내 생각은 여전히 같다. 지금 네 상태로는 저 괴물을 이길 수 없어. 그건 힘이 부족하고 자시고가 아니야. 너는 아직 모르는 거 같은데, 너는 힘의 총량만 놓고 보면 내가 본 그 어떤 성령보다도 더 강해.]
“제가, 말입니까?”
[이해하지 못하겠지. 사실, 나도 널 처음 봤을 때는 그랬거든. 하지만 석가의 부탁을 받고, 너를 유심히 지켜보니 이제 알 것 같아. 너에겐 가능성이 있다. 아직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알 수 있어.]
손오공은 한 손을 들어 올려 유현의 두 눈동자를 가리켰다.
[단순히 내공이니 의념이니, 그런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마. 그런 거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 괴물을 이길 수 없으니까. 본질적으로 다른 걸 써야 해. 네가 잘하는 게 따로 있잖아?]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하긴,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긴 하네. 하지만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최선은 이게 전부야. 남은 것은 네가 터득해야 하는 거지. 그러니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기억해. 눈으로 보는 것. 너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걸 잘 활용하라는 거야.]
“그게 무슨…….”
[이건, 약간은 도움을 주기 위한 내 선물이라고 해 두지.]
손오공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현의 두 눈에 송곳으로 찌르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안구를 타고 시신경을 넘어 뇌까지 침범하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죽음의 고통도 느꼈던 유현마저도 한순간 휘청거릴 정도로 괴로웠다. 이건 단순한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만이 아닌, 영혼에 거대한 무언가가 아로새겨진 것만 같다.
“크윽! 이, 이건…….”
[내가 죽음의 경계에서 터득한 눈이다. 너라면 누구보다도 이걸 잘 활용하겠지.]
유현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포리아의 가면을 쓰지 않은 그의 두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설마, 제게 화안금정(火眼金睛)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이렇게나 손쉽게 넘겨주다니. 유현은 손오공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줄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려는 순간, 손오공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동시에 머나먼 지평선까지 밀려났던 여의금고봉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손오공을 향해 날아왔다.
화악! 손오공이 손을 뻗자 여의봉이 그의 코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던지는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여의봉의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손오공과 유현의 주위로 거대한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쳤다.
손오공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 무거운 걸 이렇게 던지다니. 역시 소문대로 괴력도 대단하구만.]
“제천대성.”
손오공의 앞에 헤라클레스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방해받은 것이 퍽이나 기분 나빴는지 그의 얼굴은 한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올림포스의 일을 가로막으려 하다니.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게 보여?]
“죽고 싶은 건가?”
[이봐. 괴물을 죽이는 괴물. 뭐 하나 실수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건방진 돌원숭이가 무슨…….”
[난 이제 더 이상 제천대성이 아니야. 아니, 그렇게 불리던 시절도 있었지.]
제천대성이었던 시절 손오공은 천계삼십육천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대등한 칠대성을 모아 마왕 연합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마왕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때와 단 하나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손오공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것.
[지금의 난 투전승불이다.]
그의 눈동자에 황금빛 불꽃이 타올랐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헤라클레스가 몽둥이를 꺼내 쥐고 손오공은 여의봉을 고쳐 쥐었다. 두 존재가 서로를 노려보는 것은 1초도 지나지 않았다.
동시에 둘의 신형이 사라지고, 허공에 무수한 충격파가 주변을 수놓았다.
“이, 이런 미친. 저게 대체 뭐야?”
“다들 피해!”
부상당한 군주들을 황급히 부축한 초월자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현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들도 어딜 가서 꿀리는 자들이 아니지만, 헤라클레스와 손오공 정도가 되는 자들의 싸움은 그 수준을 달리했다.
그 광경을 보던 유현은 이를 악물고는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금은 서련 씨를 챙기는 게 우선이야.’
아래로 내려가면서 유현은 손오공이 했던 말의 의미를 되뇌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해라.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을 해라. 유현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가 눈으로 보는 것.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것까지.
거기에 더해 손오공이 전수해 준 화안금정 덕분에 유현은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됐다.
‘단순히 사람에게만 책이 있는 게 아니야. 무생물, 심지어 평범한 지면에도 이야기가 흐르고 있어.’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만물에 텍스트가 흐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피부로 받아들이는 세상 자체가 달라졌다.
화안금정을 유지하는 유현의 눈동자가 백련을 향했다.
아직은 읽을 수 없었던 백련의 책이, 이전보다 훨씬 더 뚜렷해져 있었다.
지워지고 흐릿해진 글자에 황금빛이 맴돌며 점점 읽을 수 있게 변해 갔다. 그것은 백련의 책이 변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보는 유현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지하에 착지하자 그곳에는 숨이 겨우 붙어 있는 백서련과 그런 그녀를 껴안은 채 어쩌지 못하는 강혜림의 모습이 보였다.
“서련 씨.”
유현은 백서련에게 다가갔다. 백서련의 흐릿한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없었다.
유현은 주먹을 까득 말아 쥐었다. 화안금정을 터득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백서련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
화안금정으로 보이는 백서련의 생명력이 상처 부위를 통해 빠른 속도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힌다.
힘이 없어서, 아직도 한없이 약해서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더는 누구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마치 그런 각오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꼴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유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의 손길이 백서련을 향할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련은 마치 자신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그 광경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재생됐다.
[아.]
백련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광경이,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꿈속에서 계속 봐 왔던 그 광경이라는 걸.
머릿속에 무수한 섬광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떠오르는 아주 오래전, 이제는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머나먼 과거의 풍경. 자신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하는 남성.
그녀는 꿈속에서 그 흔적을 읽으며 언제인지 모를 그때를 그리워했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려 온 거라고.
그녀는 그 기다림의 끝이 지금이라는 걸 깨달았다.
[유현아. 나 전부 기억났어.]
‘뭐?’
유현이 뭐라고 되묻기도 전에 백련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누굴 기다렸는지, 왜 지금의 광경을 마치 과거처럼 보게 된 건지.]
‘백련. 갑자기 그게 무슨…….’
[내가 지금까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너였어.]
‘…….’
[바보 같아. 지금까지 그토록 찾던 사람이 계속 곁에, 그것도 함께 있었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왜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걸까.]
‘백련. 너…….’
[아니야, 유현아. 백련이 아니야. 내 이름은, 백련이 아니었어. 너도 눈치챘잖아? 내 진짜 이름은 그게 아니라는 걸. 내 진짜 이름을 불러 줘.]
그녀의 말에 유현은 떨리는 시선으로 백련을 곁눈질하다 백서련에게로 옮겼다.
백서련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점차 흐릿해져 가는 그녀의 책은, 기억을 되찾고 점차 선명해지는 백련의 책과 똑같았다.
“아니야. 어떻게…… 네가…….”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백련은, 오래전 멸망한 살리오 제국에서 만들어 낸 신화급 무구의 인공지능이 아닌가. 그녀가 존재하는 것은 먼 과거의 일이었어야 한다.
그랬어야만 했다.
“어떻게, 서련 씨가…….”
[유현아.]
백련. 아니, 검에 깃든 백서련의 영혼이 웃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거야. 이 우주가 몇 번이고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속에서, 이 후회스러운 순간을 바꾸기 위해.]
유현은 머리를 망치로 강타당하는 느낌이었다.
우주의 끝과 반복? 이 순간을 기다렸다고? 그렇다는 것은 그녀가 겪었다는 흐릿한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이, 곧 닥쳐올 현재라는 말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백련이 한 말은 과장 하나 없이 너무 막연했으니까.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야.]
“백련…….”
[그러니 내 책을 사용해.]
“…….”
[네가 죽어 가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억지로 영혼을 여기에 넣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다시 있을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유현의 시선이 패트릭 황자가 사용하던 살리오 제국의 장검을 향했다.
“그런…… 거였나.”
모든 퍼즐이 드디어 짜 맞춰졌다. 그녀가 어째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이전에 멸망한 제국의 잔당이 왜 현대에 남아 있는지.
반복되는 삶과 끝없는 회귀자의 존재, 혼동된 과거와 미래까지.
그래.
이 세상은.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세상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걸렸지?”
대체, 얼마나 걸린 거야.
우주가 멸망하고, 다시 다음 우주가 새로 시작되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날 때까지.
백련은
백서련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세상을 홀로 외로이 떠돌았던 걸까.
이 세상의 거대한 진실을 엿본 것보다도, 유현은 한 가녀린 존재가 그 거대함 속에서 고통받아 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모르겠어. 기억 안 나.]
“…….”
[대체, 얼마나 걸렸는지.]
백련도 그 부분을 확신할 수 없었다. 너무 오래 살아온 것에 대한 반증인지 그녀는 대부분 잠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나는 결국 이때를 위해 긴 세월을 견뎌 왔다는 거야. 오래.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 유현아. 지금이 기회야. 죽어 가는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나는…….”
[그때의 너는, 나의 이야기가 부족했기에 취할 수 있는 수단이 적었지.]
과거의, 몇 세대 이전 우주의 유현은 결국 백서련을 살리지 못했다.
그가 내린 최선이자 최악의 선택은 결국 백서련의 이야기를 살리오 제국의 장검에 집어넣은 것이 전부.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살려야만 했을 정도로 절박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백련이 기억하는 자신의 과거는 그러했다. 결국 헤라클레스에게 모두가 죽고, 유현만 어떻게든 자신을 검에 집어넣어 살리고, 자리에서 도망쳤다.
유현은 그때 자신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약해서 미안하다고.
자신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던 남자,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곁에 있었다.
“그렇게 하면, 너는……?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몰라.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이야기를, 사용하면…… 네가 죽을 수도 있어. 네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녀는 살겠지.]
백련은 미련이 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내가 사는 건가?]
“나는…….”
[선택은 네 자유야. 하지만 유현아. 나는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 나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 말이야. 그리고 나는 네가 가장 후회하지 않는 길을 알아. 물론, 그건 너도 알고 있지?]
“…….”
유현의 시선이 백련의 책을 향했다. 그리고 곧 죽어가는 백서련을 향했다.
선택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버려야 하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대체.”
[…….]
“대체, 왜 나한테 이런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거야. 왜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 누구 하나는 사라져야만 하는 거냐고.”
백련도, 백서련도 포기할 수 없는 동료였다. 그런 둘 중 하나를 고르라니.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는 걸까.
“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결말은 없는 건데…….”
[미안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어서.]
“너…….”
[하지만, 정말 그 답이 궁금하다면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 이 세상의 끝에, 우리들의 이야기의 마지막에 네가 그토록 찾던 답이 있을 거야.]
백련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유현이 슬프고 괴로워할지언정,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니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결말은 없다. 결국 누군가는 불행해지고, 누군가는 슬픔에 빠지게 된다.
이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적었다.
그저 슬픔을 아주 약간만 덜어 냈을 뿐이다. 근본적인 결과는 바꾸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엔 네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며.
백련은, 백서련은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