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91화
유현은 떨리는 손으로 백련의 책을 펼쳤다.
이전에는 글자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글자의 형태는 갖춘 정도는 됐다.
‘하지만, 여전히 중간마다 글자가 비어서 제대로 알기 힘들어.’
분명, 장족의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여전히 책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책이라고 할 수 없는 전에 비해서 적어도 지금은 책이라고 부를 최소한의 기준은 넘겼으니까.
그렇다면 갑자기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걸까?
백련이 이전부터 말이 없이 조용하다 싶더니 갑자기 책이 변했다. 그렇다는 것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 영향을 줬다는 소리다.
‘설마, 파편을 지닌 나 때문에 무언가 영향을 받은 건가?’
그 영향을 받은 것 때문에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기억이 깨어나게 된 것이고?
억측이라고 하기에는 가능성이 꽤나 높은 가설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백련이 지니고 있는 저 책에 적힌 내용이다.
‘백련.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기억나?’
[아직.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지만, 너무 정보가 적어.]
‘멸망한 살리오 제국에 대해서 뭔가 떠올리기라도 한 거야?’
[그것과는 달라.]
백련의 대답은 어딘가 이상했지만, 백련 본인도 이것 이상은 말해 주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아는 것이 있었다면 전부 말해 줬겠지만, 지금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이제 막 씨앗이 발아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걸릴 거 같아? 기억을 전부 되찾을 때까지.’
[……모르겠어. 다만, 시간이 꽤 필요해. 아마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전부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거 같아.]
백련은 괜한 말을 꺼낸 게 아닌가 싶어서 답답해졌다. 이전, 지구가 2차 판타즘 쇼크에 휩싸였을 때 백련은 아련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분명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자라는 것과 그녀가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자신을 보며 미안하다며 울고 있었다.
그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꿈은 거기서 끝났고, 그 이상 잃어버린 기억이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모든 것을 가로막았으니까.
그 잃어버린 기억이, 혼성계에 완전히 적응한 유현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계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 살리오 제국의 이름을 달고 있는 적들 때문이겠지.
‘나는 대체 뭘까?’
백련은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현과 함께하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보고 겪으며 그녀는 바뀌었다.
그저 오랜 시간이 흘러서 회로가 망가져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료가, 사실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지니고 있어야 할 기억이라니.
대체, 왜?
자신은 그저 먼 과거에 멸망해 버린 제국에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아니었던 건가.
왜, 마치 지금을 과거처럼 인식하고 있는 걸까.
‘대체, 내 잃어버린 기억에는 무엇이 있는 거지?’
원래라면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텐데, 백련은 이상하게 불안감부터 느꼈다. 마치 자신이 기억을 찾으면 무언가 벌어질 것만 같은 나쁜 느낌이 악몽처럼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백련. 당장 기억나는 것은 뭐 없어? 알려 줄 만한 것들 말이야.’
[모르겠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전쟁에서 분명 우리에게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거야.]
‘나쁜 일?’
[그래. 어떤 나쁜 일인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 좋지 않은 일인 건 확실해.]
백련은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미래에 벌어질 전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이번 전쟁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에 있어서 나쁘면 나빴지 절대로 좋지 않다는 것까지도.
[그러니 유현아 너도 주의해 둬. 나도 무언가가 떠오르면 바로 너한테 말해 줄게.]
‘알았어.’
유현은 백련이 괜히 불안해하는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백련의 경고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저렇게까지 불안해한다면 분명 무언가가 있을 터.
원래부터 이번 싸움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었지만, 백련의 말을 들으니 무언가 대비를 더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 *
군주와 그 휘하 초월자들이 올드 타운을 벗어났다.
20명에 가까운 군주와 80명이 넘는 초월자들, 그리고 1명의 집행자까지.
100명의 숫자는 병력이라 부르기에도 하자가 있었지만, 그들의 실력만 놓고 보면 5년 전 지구의 그 어떠한 강대국도 감히 명함을 내놓지 못할 전력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움직임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다만, 굳이 피해를 늘릴 필요가 없으니 서로 제대로 된 전장에서 싸우자. 연합의 군주들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살리오 제국은 그 도전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그들 또한 바라던 바였으니까.
군주들이 향한 곳은 백서련이 이전부터 몰래 활동해 온 반 살리오 연합의 본거지였다.
황량한 허허벌판 지하에 지어진 거대한 비밀 기지는 군주들조차도 혀를 내두르게 만들 정도였다.
연합이 영토 내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정보력으로는 어딜 가서도 꿀리지 않는데.
그런 연합의 바로 아래에서 이런 비밀스러운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니.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오히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이 군주들에게 다행인 참이었다.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살리오 제국과 싸우길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으니까.
군주들과 초월자들은 각자 개인실을 배정받으며 곧 있을 싸움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군. 지구였더라면 꿈도 못 꿀 공간이야.’
백서련은 반 살리오 연합의 비밀 기지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거대한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기지가 지하에 떡하니 존재하는 것은 혼성계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지상과 지하를 오가는 승강기까지 구비되어 있다니.’
유현은 승강기를 타고 지상으로 향했다. 물론 승강기는 주변 풍경과 동화되듯 만들어졌기 때문에 바깥에서 들킬 일이 없었다.
밖에 나오자 싸늘한 밤공기가 유현을 반겨 줬다.
흔들리는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암석으로 가려진 바위의 틈새를 올려다보니 까맣게 물든 밤하늘이 보였다.
“바람을 쐬러 오셨습니까?”
그리고, 그곳에는 유현보다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위무혁 씨.”
무신 위무혁.
아니, 이제는 군주라 불리는 남자는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은 채 황량한 바깥의 풍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져도 어디에 피해가 갈 곳이 없는 넓은 황야. 반 살리오 연합의 비밀 기지는 그 중심에 있었다.
볼 것이 없는데, 여기까지 나왔다는 것은 위무혁 또한 어딘가 불안했기 때문이리라.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지금 하기에는 조금 늦겠지요.”
“하하. 설마 이런 상황에서 재회를 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으니까요.”
‘그래도’라며 위무혁이 유현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유현 텔러님.”
“이젠 텔러가 아닙니다.”
“네?”
“인간 강유현이 됐거든요.”
그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려던 위무혁은 무언가 생각이 미치는 것이 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야기의 지평선에 도달하신 겁니까?”
“그렇게 하시는 걸 보니 위무혁 씨도 도달하신 것 같군요.”
“……그렇죠. 그러니 군주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위무혁도 이야기의 지평선에 도달했다. 그는 결국 이 바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다분히 노력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위무혁은 자질이 부족했기에 성령의 자리까지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부럽지 않은 강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처럼 이야기의 지평선에 도달한 유현이 성령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되길 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것이었다.
위무혁은 무슨 말을 하려다 전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강유현 씨는 역시 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으시는군요. 제가 알던 그분이 맞습니다.”
“너무 좋게 평가해 주시는군요.”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한밤의 황야를 주시했다.
풀 한 포기도 제대로 나지 않은 황야에 보이는 것은 그저 불규칙적으로 솟아나 있는 거대한 바위들이 전부.
혼성계라고 한다면 지구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을 생각하겠지만, 이곳은 그렇게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죠?”
“예. 저도 당황했습니다.”
위무혁은 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이 남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위무혁은 유현에게 5년 사이에 어딜 갔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와 가장 먼저 계약을 맺었던 검후 강혜림이 흑뢰군주가 되었고, 책더미 군주가 되어 돌아온 유현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은 그 또한 들었으니까.
결국, 그런 것이다. 서로에겐 서로의 사정이 있고, 그것을 굳이 캐묻지 않는 것.
그저 이렇게 앉아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앞으로의 싸움은 어떨 것 같습니까?”
“걱정되십니까? 무신이라 불리던 남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싸움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제게도 나름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까요.”
그는 5년 동안 혼성계에서 지내면서 가족은 만들지 않았다. 그에게 유일한 가족은 죽어 사라진 딸과 아내뿐이었으니까.
그 둘을 영원토록 기억하기로 다짐했기에, 그는 새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켜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무혁은 한 도시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도시 시민들이 좋았다. 그들 중 누구도 죽거나 고통받길 원치 않았기에 그는 살리오 제국과 싸우는 길을 택했다.
의무, 책임감, 개인적인 감정. 그게 뭐든지 좋았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는 언제든 싸울 것이다. 설사 자신이 죽게 된다 할지라도.
유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싸움은 분명 위험하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이길 겁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하긴. 그 도윤 씨를 이긴 유현 씨가 하는 말이니 믿음이 가는군요.”
“최도윤과 아는 사이입니까?”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구 측에서 유일한 집행자이기도 하고요. 귀환자 출신이라고는 하는데, 군주인 저는 당연히 같은 군주인 도윤 씨와 면식이 있을 수밖에 없죠. 의외로 말이 잘 통하기도 하고요.”
“말이 잘 통한다고요? 그건 좀 의외네요.”
그 성격파탄자 사이코패스 최도윤이 누군가와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사실 유현 본인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의 최도윤은 전생의 최도윤과 다르니까.
전생의 최도윤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를 잃고, 그 때문에 유현이 알던 그런 성격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최도윤은 어머니도 살아 있고, 적어도 예전처럼 막 나가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와 검을 섞으면서 누구보다도 유현 본인이 가장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그렇구나.
결국, 이번 세상은 바뀐 것이다. 자신 때문에.
“오. 여기에 있었어?”
그때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를 알아본 유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임건우 컬렉터님. 오랜만입니다.”
“하하, 이제는 임건우 군주라고. 그것도 한량 군주라는 멋진 이명을 얻었지.”
“썩 좋은 이명은 아닌 것 같네요.”
한량 군주라니. 임건우의 행동이나 모습을 보면 퍽이나 어울린다. 그러고 보면 윈다린도 가장 작은 군주니 어쩌니 하면서 도시의 시민들이 불렀었지.
임건우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멸칭은 아니고, 일종에 좋은 의미로 부르는 애칭에 가까운 것이리라.
“최예리 씨는 두고 혼자 올라온 겁니까?”
“응? 아아. 예리가 워낙 잔소리가 심해야지. 특히 부관이 된 이후로는 나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니까. 어휴 지겹다 지겨워. 저러니 시집을 못 가지.”
“결혼한 거 아니었습니까?”
“뭐? 예리가? 누구랑?”
“임건우 씨랑요.”
“허?”
유현의 말에 임건우는 그럴 리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예리랑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유현 씨 못 보던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어?”
“……뭐, 본인이 그러시다면야.”
세 사람은 싸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적당히 담소를 나누었다. 곧 있을 싸움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살리오 제국과의 전쟁 쪽으로 흘러갔다.
“이번 싸움, 쉽지 않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살리오 제국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대성군 올림포스와 대성군 아스가르드. 그쪽이지?”
“맞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아스가르드에서는 무려 2세대 성령인 마그니가 출전할 겁니다.”
“마그니라고?”
“미치겠군.”
마그니의 명성은 위무혁과 임건우도 익히 아는 바였다.
아스가르드 최강의 신 토르의 아들이자 그 토르에 버금가는 괴력과 힘을 지닌 신이 아닌가.
“하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그니는 지아 씨가 맡기로 했거든요.”
“권지아? 혼자서 괜찮을까?”
“예. 괜찮을 겁니다.”
권지아가 익힌 설천신류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생각하면, 권지아는 마그니와 극상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마그니를 넘어서 아스가르드 성령이 상대라면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남은 것은 올림포스에서 누굴 보냈냐는 건데요.”
“흠. 그쪽도 문제긴 해. 그래도 적당히 3세대를 보내지 않을까? 아스가르드가 2세대 성령을 보낸 것도 나름 선을 세게 넘은 느낌인데.”
“차라리 그러면 좋겠지만, 그쪽도 이 전쟁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어서 2세대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올림포스의 2세대라면…… 그쪽도 나름 신급일 텐데.”
임건우는 골치가 아파 오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야. 상대측에 집행자가 둘에, 군주도 30여 명 가까이 되는데 말이지.”
“그래도…… 싸우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답한 것은 위무혁이었다. 임건우도 그건 알고 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고요. 이러나저러나 답이 없는 것은 똑같으니, 최대한 열심히 싸우기라도 해야 할 테니까요.”
“그러니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보자고.”
“그럽시다.”
“그러죠.”
세 남자는 서로를 향해 피식 웃어 보이고는 서로 가볍게 주먹을 툭 부딪쳤다.
살리오 제국의 병력이 이곳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있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