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89화
올드 타운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테러가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주끼리 회동을 갖는 거로도 모자라 살리오 제국 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전쟁이 벌어진다.
그런 소문이 도시 전체에 빠르게 퍼졌다.
회의장의 창밖에서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던 유현조차도 시민들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느낄 정도로 도시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다들 도착했습니다.”
바깥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경비대원 하나가 다른 군주들의 도착을 알렸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현과 권지아, 백서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회의장의 열린 문을 통해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유현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나 전생에서는 본 적이 없는 수인족과 엘프, 드워프들의 모습이었다.
‘저들 또한 군주라 이건가.’
확실히 느껴지는 힘은 상당히 강하다. 게다가 지구에서는 본 적이 없는 신비로운 모습까지. 혼성계에 퍼진 이야기에 딱 걸맞은 외형이었다.
‘그다음은 중천맹의 무림인들.’
무림인들은 그래도 서수민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나마 아는 것이 많았다. 혼성계에는 다양한 무림세계가 있고, 세계마다 특색은 있지만. 기본적인 틀은 다 비슷했다.
대부분 도복을 입고 있고, 허리춤에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를 찼다. 일부는 패도적인 기운을 흘리고, 또 일부는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포리너였다.
‘상당히 기괴한 외형을 지녔다고 하는데, 소문대로군.’
포리너는 정확히 어떠한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여러 행성의 소수 민족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연합 내부의 작은 연합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모습은 통일된 부분이 없고, 하나같이 개성이 가득했다.
그 모습은 유현이 막 천체주식회사의 본사에 갔을 때, 온갖 다양한 모습의 텔러들을 봤을 때와 매우 흡사했다.
바위로 이루어진 거구, 전신이 실시간으로 색상이 변하는 피부를 지닌 여성. 점액질 슬라임처럼 보이지만, 커다란 눈 1개가 달려 있는 생명체까지.
그들의 유일한 공통적인 면모라고 한다면 회의장에 들어온 포리너 출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역시, 저쪽도 초월자에 군주급이 섞여 있어서 당연한 소린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지구 측 사람들이었다.
여유를 부리며 먼저 들어온 건 임건우였다.
그는 5년이나 지났는데, 겉모습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원래부터 아저씨 같았지만, 지금도 여전하다는 소리였다. 다만 수염은 더 길었는데, 그의 곁에는 한층 더 성숙해진 최예리가 동행하고 있었다.
“어?”
임건우는 유현을 알아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며 임건우를 돌아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시선이 사라지자 임건우는 눈을 부릅뜨며 유현을 주시했다. 정말 유현이 자신이 알던 그 강유현 텔러가 맞는지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백서련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유현은 그런 임건우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유현의 입 모양을 확인한 임건우가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있는 강유현이 진짜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웅성웅성.
회의장에 자그마한 동요가 잔잔한 수면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퍼졌다.
임건우의 뒤를 이어 덩치가 큰 한 남성이 들어왔다.
5년 전에서 잔주름만 살짝 늘었을 뿐 별로 변하지 않은 위무혁. 지구에서 무신이라 불리던 이 남자는 지금은 군주 연합 내에서 어엿한 한 명의 군주로서 인정을 받으며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다.
소실했던 힘을 회복한 이상으로 더욱 강해진 그 남자는 회의장에 들어선 순간 유현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유현을 확인한 것은 그 이후에 들어온 흑철기사 황세은도 마찬가지였다. 예전과 다르게 이번에 투구를 쓰지 않은 그녀는 유현을 알아보고 몸을 흠칫 떨었으며, 그런 황세은과 동행한 부관 방상씨와 유성아 또한 유현을 발견했다.
‘방상씨는 여전하네.’
방상씨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얼굴에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나마 키는 조금 더 큰 거 같은데, 그 외에는 변화라고 할 것이 없었다. 유성아도 마찬가지.
미성년자였다가 성인이 된 유라를 본 탓인지 다른 사람들의 변화가 크게 와 닿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보다…… 다들 나와 지아 씨를 많이 보는군.’
회의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백서련의 좌우에 도열한 유현과 권지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강혜림은 구석의 자리에 앉아 자그맣게 변한 백효를 껴안고 있었는데,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월자 이상을 달성한 자들.
그들도 서로 아는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될 테니까.
그중에서 단연코 시선을 가장 많이 모으는 것은 유현이었다.
‘저 녀석이, 책더미 군주인가?’
‘집행자 최도윤과 싸워서 이기고, 그 악명 높은 흑뢰군주를 쓰러뜨리고 자신에게 종속시켰다는…….’
‘정말로 소문처럼 강할까?’
특히, 호승심이 강한 몇몇은 은연중에 유현에게 기운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과연 소문이 진짜인지 가볍게 유현의 반응을 떠볼 속셈이었다.
백서련과 권지아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무례한 짓은 하지 말라고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유현이 자신의 선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재밌군요.”
화아악!
순식간에 유현을 중심으로 강한 기파가 몰아치며 회의장 내부를 잠식했다.
회의장에 들어온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졌고, 특히 유현에게 일부러 기를 흘리며 간을 보려던 일부 사람들은 그야말로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유현이 입을 열었다.
“다들 먼 길을 와서 피곤하실 테니 괜히 시작부터 괜한 거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말투는 정중했지만, 반쯤 협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작부터 기선을 제압해서 이쪽이 흐름을 이끌고 나갈 속셈.
그러나, 군주들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잔뜩 얼어붙어서 알겠다고 답하겠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전부 어딜 가서도 강자로 대접받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곳곳에서 반발이 튀어나왔고, 그중에서 특히 가장 크게 반발한 곳은 바로 중천맹의 무인이었다.
“감히 우릴 겁박하려는 것인가!”
특히 유현에게 노골적으로 기운을 흘리던 한 남성이 가장 격하게 반응했다.
신선처럼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50대 초반의 남자였는데, 그의 새하얀 옷 위에는 큼지막하게 백(白)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밤 기본적인 지식을 빠르게 주입한 유현은 상대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저자가 백검문의 수장인가?’
중천맹은 여러 문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백검문의 경우에는 그런 중천맹에서도 나름 입지가 큰 곳이라고 한다. 지금 유현에게 찔린 사람처럼 화를 내는 남자는 군주 중 하나이자 백검문의 장문인인 위월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유현의 기세에 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오히려 유현을 강하게 노려봤다.
자연스럽게 다른 군주들은 한발 물러서게 됐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위월성과 유현의 일대일 구도로 흘러갔다. 모두가 숨을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다들 기대하는 눈치로군.’
유현은 다른 군주들의 시선이 뭘 뜻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들은 소문의 책더미 군주가 과연 그 소문에 부합하는 인물인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백검문의 위월성이 이렇게 나서 주니 내심 반기고 있었다.
‘내심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더 노골적이야.’
유현은 자신이 조금 물렀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이전까지 만났던 상대는 적당히 위협만 해 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기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안일하게 판단하고 말았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군주들.
특히, 중천맹의 무인들은 전투에 있어서 타협을 하지 않을 정도로 호전적이며 상당히 꽉 막힌 사상을 지니고 있는 거로 유명했다. 괜히 어중간하게 건드리는 것은 오히려 저들을 더욱 자극하는 짓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그래. 이 자리는 고작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었다.
결국에는 발언권을 갖기 위해서 자신이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고, 그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은 바로 힘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위월성은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감히!”
“감히?”
유현은 곧바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위월성을 비웃었다.
상대방을 나름 배려할 생각으로 적당히 흘린 기운이 한층 더 기세를 타고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설마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위월성은 그 투기를 정면에서 마주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유현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화가 났음을 드러내며 상대를 압박했다.
“감히라는 말은, 나보다 약한 그쪽이 할 말이 아니지.”
점점.
유현이 말을 하면 할수록 위월성을 짓누르는 기운이 강해졌다.
위월성은 그것에 저항하고자 이를 악물고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그것은 아주 순간의 편안함을 안겨 줬을 뿐. 근본적으로 유현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검문의 사람들이 손에 검을 가져다 댔지만, 유현이 그들에게 가볍게 시선을 주자 모두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얼어붙었다.
“솔직히 이렇게 다 모인 자리에서 드잡이질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굳이 이런 곳에서 서로 감정만 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그럴 시간도 없거든.”
유현의 몸 위로 검은 활자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자리에 모인 군주들은 그 순간 텍스트에도 검은색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들이 지닌 이야기의 텍스트는 전부 하얀색뿐이었으니까.
그 검은 텍스트의 조각들이 유현의 얼굴에 모이더니 이윽고 하나의 가면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포리아의 가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오류의 악마가 눈을 뜨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군주들도 식은땀을 흘리거나 침을 꿀꺽 삼켰다.
키이이잉!
유현의 기세가 대기를 흔들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감이 공간 자체에 간섭해서 점점 왜곡시키고 있었다.
강하다.
책더미 군주가 집행자를 쓰러뜨렸다는 말은 단순한 헛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남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가 지닌 힘에 비해서 훨씬 더 낮게 잡혀 있었다.
이 정도의 강함이라면 단신으로 2세대 성령에 버금가는 강함을 지녔다고 봐도 좋으리라.
무엇보다 저 가면을 썼을 때 흘러나오는 귀기 어린 눈빛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자신의 존재와 모든 이야기가 지워지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것으로도 부족한가? 아니면, 여기서 더한 것도 보여 줄 수 있고.”
“이, 이익!”
백검문의 무인 중 소수가 결국 검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은 곧바로 칼을 뽑아 자신의 사문을 모욕한 유현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끼어들려고 하면 곤란하지.”
어느덧 등 뒤에 거대한 짐승을 불러온 권지아가 그들을 보며 경고를 날렸다.
신조차 잡아먹었다고 알려진 신화 속의 마수 펜릴의 머리가 회의장 한쪽을 장식하자, 백검문의 무인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권지아는 그들을 비웃으며 펜릴의 머리를 다시 지웠다.
“하, 항복하겠소.”
백검문의 수장인 위월성은 잘 열리지 않는 입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정말 자존심을 살리려고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정말로 유현의 손에 처참하게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오해도 착각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무인이 지닌 본능에 의한 직감.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미, 미안하오. 그저 호기심 차에…….”
위월성의 입술을 비집고 비굴한 사과의 말이 나오자 그제야 그의 몸을 옥죄던 유현의 투기가 사라졌다.
위월성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볍게 쓸었다.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 내가 이렇게나 처참하게 밀리다니.’
그 사실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위월성은 본래 천성이 거만한 자였다.
그래도 군주 중에서 최도윤을 제외하면, 검에 있어서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당연히 군주 중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고, 집행자의 자리가 하나가 난다면 그 자리는 반드시 자신의 차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책더미 군주는 그런 위월성에게 현실의 잔혹함을 다시 새겨 주었다.
“알았다면 됐고.”
위월성을 향한 유현의 말투는 어느덧 자연스러운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위월성은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이를 까득 깨물었다.
‘감히 나를 욕보인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시작부터 기선을 제압하려는 기존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아직 그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남아 있었다.
‘다른 놈들도, 이전까지는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면서 말리지 않더니 이제 와서 자신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굴고는……!’
위월성은 다른 군주들의 행동에도 불만을 품었다. 최소한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그러지 말라고 말려 줬으면 적당히 물러나서 이렇게까지 체면이 구겨지는 일로 번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위월성은 수하들에게 눈짓으로 곧 벌어질 일을 대비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수하들이 눈빛으로 알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한층 딱딱해진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진행했다. 위월성은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려 수신호를 보냈다.
작전을 시행하라는 신호였다.
동시에 회의를 주관하려는 유현의 입이 열렸다.
“자. 일단 살리오 제국과 싸울지 말지에 대한 회의에 들어가기 앞서서, 한 가지 필요한 일을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잠깐.’
유현의 말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위월성이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부하들도 막 움직이려던 찰나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모두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모두가 모인 틈을 타서, 이 회의장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살리오 제국의 첩자부터 제거해야 하거든요.”
첩자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에 의문이 아로새겨졌다.
하지만, 단 한 명.
유현의 추측 같은 말을 단순히 의아함으로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러지 않습니까? 백검문의 위월성 씨?”
유현의 시선이 위월성을 향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위월성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뭘 하려고 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