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88화
모두가 잔뜩 긴장한 채 강혜림을 주시했다.
활자가 스며든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이윽고 옅어지더니 강혜림의 기운이 이전보다 한층 더 평온해졌다.
강혜림이 감았던 눈을 뜨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주위를 가볍게 훑었다.
“혜림 씨. 정신이 드십니까?”
유현이 강혜림의 상태를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강혜림은 더욱 선명해진 시선으로 유현을 돌아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현의 얼굴을 담았다. 강혜림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혜림 씨?”
배시시.
강혜림은 유현을 보며 씨익 웃었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변화는 있었다.
그녀는 이전까지만 해도 아이처럼 굴었지만, 이야기를 부여받으며 조금 더 달라진 건 확실했다.
약간 성숙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평소보다 더 다소곳해진 태도가 그것을 증명했다.
유현은 이후로 몇 가지를 더 질문했지만, 강혜림은 유현을 보며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권지아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괜찮은……거겠지?”
“아마도요. 여전히 말은 하지 못하는 거 같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건네받은 강혜림은 유현의 예상대로 예전의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모든 이야기를 제대로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제 유영민과 서수민을 만나서 그들의 책에서 강혜림의 이야기를 얻으면 끝이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유영민과 서수민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른다는 건데.
‘아니. 일단은 군주 연합 내부의 일부터 신경 쓰자.’
내일 해가 뜨는 즉시 다른 세력의 지도자들이 모일 것이다. 대부분이 군주급 강자들이며, 그중에는 당연히 집행자들도 있을 것이다.
살리오 제국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이쪽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동료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딜 가서도 대접을 받는 군주급 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다 보면 자그마한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살리오 제국에만 좋게 흘러갈 터.
“그러고 보니 서련 씨, 지구 측의 강자들은 누가 모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유현 씨는 모르시겠구나. 이번에 모이는 사람 중에 지구 출신의 군주들이 몇 명 있거든요. 그중에서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위무혁 씨죠.”
“위무혁 씨가요?”
위무혁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지구가 이렇게 되기 전,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정1품 컬렉터가 바로 그였는데.
광화문 사태 이후로 가지고 있는 힘이 분쇄기로 인해 대부분 격감해서 그 이후에는 은퇴하듯 지낸다고만 들었는데, 설마하니 다시 군주급 강자로 우뚝 서게 됐을 줄이야.
“임건우 컬렉터님도 지금은 군주 중 하나에요.”
“허, 그분도 그랬군요.”
“그 외에도 유현 씨가 알 만한 군주급을 1명 더 꼽으라고 한다면 흑철기사이려나요.”
“황세은 씨요?”
“네. 맞아요.”
백서련은 황세은은 자신의 부관으로 방상씨와 유성아를 데리고 다닌다고 말해 줬다. 그녀들도 내일 아침 올드 타운으로 온다는 뒷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최도윤과 함께 움직이지 않아서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했는데, 나름 군주라 불리게 됐구나.
그리고, 의외로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군주급이 많다는 생각이 미쳤다.
물론, 미국 출신의 랭커나 해외에서 이름이 높은 유명 컬렉터들도 지금 군주라 불리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군주 연합에 소속된 군주의 숫자만 50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지구 출신의 군주의 숫자만 8명 정도.
최강자라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지구 출신 중 유일하게 집행자 타이틀을 단 최도윤이지만, 그 아래에 위무혁, 임건우, 황세은을 비롯한 나머지 4명의 군주가 더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군주들의 부관이라 할 수 있는 전력도 최소 초월자는 되니, 범위를 크게 놓고 보면 지구가 괜히 연합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지구 측 세력도 만만치 않겠지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서요.”
살리오 제국은 50명이 넘는 군주 중에서 반수 이상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 이번 테러 사태로 인해 연합 전체의 집행자 5명 중에서 3명밖에 없는 집행자 중 하나를 잃게 됐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에겐 아직 2명의 집행자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살리오 제국이 올림포스, 아스가르드와 손을 잡은 것이 확실해졌으니 전력만 놓고 보면 이쪽이 확실히 열세였다.
“하필이면 올드 타운이 살리오 제국이 주관하는 구역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어서 이대로 가면 도시 자체가 위험해질 거예요.”
“만약, 싸움이 시작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주 전력들을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가야 해요. 정면에서 부딪치면 승산이 없으니까요.”
권지아가 그 말에 납득할 수 없다며 반박했다.
“도시를 나가자고? 그렇게 하면 남겨진 도시의 시민들은?”
“그건 괜찮을 거예요. 살리오 제국도 바보는 아니에요. 어차피 일반 시민들은 건드려도 건드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죠. 오히려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길을 택할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이번 내전을 끝낸다면 그다음으로 상대해야 할 건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라는 대성군일 테니까. 그쪽에서도 최대한 전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지배하는 영토의 시민들이 많을수록 자신들이 거둬들일 수 있는 포인트도 많아지니까요.”
“자신들이 질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을 녀석들이니, 조금 더 먼 미래를 보고 행동한다 이거로군.”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김칫국을 마시는 저 행동에 짜증이 나지만, 좋게 생각하면 저희에게도 나쁠 건 없다는 거죠.”
결국 말이 내전이고 싸움이지, 실제로 규모가 큰 전쟁은 벌어질 확률이 극히 낮았다.
집행자나 군주급 강자들의 싸움에서 초월자도 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몰려 있어도 고기 방패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에서 괜한 인원을 갈아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
군주급 강자들끼리 싸움이 시작되면 기본적으로 도시 하나는 가볍게 날아간다.
군주란 그런 존재들이다. 비대칭 전력. 걸어 다니는 핵폭탄.
연합 내부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싸움은, 그런 비대칭 전력들만의 대결이 주가 된 지 오래였다.
“내일 회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 해도 제가 할 행동은 변하지 않아요. 상대가 싸우려고 하는데 평화를 주장하면, 저는 따로 떨어져 나와서 맞서 싸울 거니까요.”
“비밀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셨죠.”
“사실, 비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조직이지만요. 일단 내일 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도시를 벗어나서 본거지로 움직일 생각이에요.”
살리오 제국과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그들의 기본적인 이념은 이쪽과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우수한 자가 열등한 자들을 지배하며 착취하고, 그 고혈을 짜서 만든 무기로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더욱 확장한다.
이런 비슷한 사상을 가진 자들은 지구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장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가 바로 딱 그랬다.
그들에게 패배하게 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뭐가 어찌 됐든 내일이 돼 봐야 알 수 있겠군요.”
“그렇죠. 싸우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지만, 저는 그래도 부디 모두가 힘을 합쳐서 맞서 싸웠으면 해요.”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는 시대는 이제 저물었다.
진정 평화를 바란다면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울 힘을 지니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얼마나 되는 사람이 죽어 나갈지.
그걸 생각하면 그 누구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 * *
살리오 제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엘더 센트롤은 공업 단지를 방불케 할 정도로 검은 매연과 안개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기계 도시다.
그러나 그 거대한 매연의 속에서도 어딜 가나 뚜렷하게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살리오 제국의 황제가 기거하는 중앙 황성이었다.
그 황성의 깊은 곳에 있는 알현실.
올드 타운에서 도망치듯 돌아온 패트릭 1황자는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식은땀을 잔뜩 흘렸다.
“그래서 피렌은 죽고, 네놈만 혼자서 몸 성히 살아 돌아왔다. 이거냐?”
황제의 시선이 뒤통수에 닿자 패트릭은 몸을 바르르 떨며 더욱 바닥에 납작 조아렸다.
입이 10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제국의 전력 중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집행자 중 하나를 잃고 돌아왔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황제는 미라처럼 말라 산송장이나 다름없음에도 그 카리스마와 분위기는 여전해서, 패트릭은 언제나 그의 앞에 서기만 하면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고 만다.
“패트릭. 네가 지금 얼마나 큰 실책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마.”
“그, 그렇습니다. 황제시여.”
“무려 집행자다.”
황제는 다 죽어 가는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렌이 비록 우리 살리오의 집행자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하지만, 그녀에게 투자된 제국의 마도구만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피렌은 제국에 충성심이 깊은 집행자 중 하나였다. 비록 지구 출신의 집행자 최도윤과의 싸움에 패배해서 한쪽 눈을 잃었다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의 강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에서 비밀리에 개발하던 라플라스의 눈을 그녀의 눈에 이식시켰으며, 온갖 마도구를 그녀에게 투자해서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요새로 탈바꿈시켰다.
향후 그녀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혈육이라 할 수 있는 1황자의 호위를 맡겼거늘.
“책더미 군주라고 했느냐?”
“예?”
“피렌을 죽인 그 녀석 말이다.”
“마, 맞습니다.”
사실, 패트릭도 잘 모른다. 피렌이 알아서 잘 처리한다고 떠난 뒤에 들려온 소식이 바로 그녀의 죽음이었으니까. 직접 목격하지 못했으니 무슨 말을 해도 결국에는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죽일 수 있는 게 녀석 말고 누가 있는데?’
패트릭은 아스가르드의 성령 마그니가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는 피렌을 죽인 것이 유현이라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믿으며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을 뿐이다.
황제는 패트릭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는 피렌이 죽은 이유에 대해 나름의 짐작을 하고 있었다.
‘올드 타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상식적인 전압이 관측됐다. 그 정도의 번개를 다루려는 성령이라고 한다면 대성군 외에는 있을 수가 없어. 아스가르드와 올림포스, 둘 중 하나가 몰래 수작을 부린 거겠지.’
서로 협력을 하기로 해놓고, 벌써부터 작업에 들어가는 그들의 작태에 항의라도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황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쪽에서 따져도 놈들은 모르쇠로 일관할 거고, 언젠가는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눠야 하는 사이였으니까.
협력을 얻는 대가로, 살리오가 연합의 패권을 쥐게 되면 일부 영토를 양도하겠다는 조약을 맺었지만. 이쪽도 그걸 지킬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연합을 완전히 휘어잡게 되면 다음 목표는 바로 네놈들이 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머지 연합의 세력을 찍어 누를 필요가 있었다.
서로가 출혈을 감수하면서 싸우면, 곧바로 대성군 녀석들이 탐욕의 손길을 뻗을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소수 정예로 놈들의 머리를 박살 내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마침, 피렌의 죽음을 통해 명분은 충분히 이쪽으로 넘어온 상황.
놈들도 마음이 급해졌는지 곧바로 회담을 연다고 했지만, 어차피 무슨 말이 나와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패트릭.”
“네 아버…… 아, 아니. 황제시여.”
“너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마도병단 알파 팀의 지휘권을 일임하마.”
마도병단은 총 24개의 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알파 팀이라면 마도병단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실력자들만이 모인 곳.
패트릭은 벌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황제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그렇다면……?”
“오래전부터 개발에 착수했던 신형 마도구의 제작이 드디어 끝났다. 우리 살리오 제국이 지닌 마도공학의 정수를 담은 특수무기 25정을 전부 하사하마.”
마도병단 알파팀에 이어 이제 막 개발이 끝난 신형 마도구의 지원까지.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가자 패트릭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안색을 굳히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중요하다는 거로군요.”
“마냥 멍청하게 구는 건 아니었구나. 그래.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놈들은 결국 싸울 녀석들과 그러지 않을 녀석들이 따로 나뉘게 될 거다. 네가 할 일은 그중에서도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을 후방에서 기습해서 제거하는 일이다.”
요인의 암살……이라고 할 수 있는 임무였지만, 싸움이 벌어지면 몰래 뒤로 돌아가 적들의 후방을 타격하는 일이었다.
쉽다면 쉽고, 위험하다면 또 위험한 일이다. 적들의 전력이 모두 빠져나갔다고 해도 남겨진 자들이 방비를 하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패트릭은 이건 분명 해 볼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어중간한 병사를 지원받았으면 모를까 제국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마도병단의 알파팀을 지원받았고, 심지어 신형 마도구도 전부 지급받게 됐다.
이건 황제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패트릭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믿으마.”
패트릭은 결연한 얼굴로 알현실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황제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패트릭이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며 비쩍 마른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그의 오른손 위에 눈부신 황금빛 파편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