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86화
가장 큰 위협이었던 마그니도 사라졌으니 유현은 백서련과 강혜림을 바깥으로 내보내도 되겠다고 판단해 유랑세계를 해제했다.
다시 현실로 나온 백서련과 강혜림, 그리고 백효는 초토화가 된 주변 풍경에 당황하면서도 기쁨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유현 씨가 이긴 거 맞죠?”
“이겼습니다, 가까스로.”
“내 도움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만.”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백서련이 화들짝 놀랐다.
“지, 지아 씨?”
“그래. 오랜만이다.”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권지아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진짜 권지아가 눈앞에 있는 것을 확인한 백서련은 그야말로 얼떨떨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럴 것이 유현도 지금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권지아를 찾으려고 했는데, 설마하니 그녀가 먼저 찾아올 줄 누가 예상이라도 했을까.
“지아 씨는,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겁니까? 아니, 그보다 그동안 뭘 하면서 지내셨던 겁니까?”
“혼성계를 떠돌아다녔다.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누볐지. 너를 찾기 위해서.”
“네?”
갑자기 훅 들어오는 권지아의 직설적인 말에 유현은 당황했다.
그가 기억하는 5년 전의 권지아는 매우 무뚝뚝하면서도 부끄러움이 많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이 바뀌듯 사람들도 바뀌었고, 그것은 회귀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권지아에게 있어서 이번 회차는 자신의 이 반복되는 굴레를 끝낼지도 모르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 이상으로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동료와의 유대를 다시 떠올리면서, 권지아의 망가졌던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이다.
그래.
그녀는 이번 회차만큼은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살고자 다짐했다.
“너를…… 정말로 보고 싶었어.”
“어, 지아 씨……?”
“내가, 내가 지난 5년 동안 너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알아?”
“그…… 죄송합니다.”
“나쁜 놈.”
그렇게 말한 권지아는 유현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유현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신장의 차이가 있었기에 껴안기보다는 유현의 품에 안긴 꼴이었지만, 유현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권지아가, 그 권지아가 자신에게 눈을 흘기며 포옹을 한 것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절대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현의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방황했다. 하지만 결국에 마음을 다잡고 권지아의 등을 가볍게 쓸어 줬다.
품 안에 안긴 권지아가 몸을 떨며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당황했구나.”
“……끄응. 누구라도 갑자기 그런 반응을 보이면 이럴 겁니다.”
권지아는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유현을 올려다봤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 모습에, 유현은 정말 세상이 변하기는 변했구나 하는 걸 실감했다.
“그보다 로브는 왜 계속 뒤집어쓰고 있는 겁니까?”
“……!”
유현이 후드에 손을 대려고 하자 권지아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 반응에 오히려 손을 뻗으려던 유현만 민망해졌다.
“지아 씨?”
“어, 그게…… 후드는…… 아직 좀, 준비가 안 됐다고 해야 할까.”
“어, 혹시 무슨 일 생긴 겁니까? 어디 다쳤습니까? 상처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 상처…… 음. 그 비슷한 게 있긴 한데…….”
권지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 반응에 유현은 그녀가 혹시라도 크게 다치지 않았나 걱정하며 권지아에게 다가갔다.
“어디 한번 봐 봐요.”
“어, 어?”
“제가 도울 수도 있으니까.”
“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괜히 부담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어서.”
“괘, 괜찮다니까!”
유현이 한 발 다가가면 권지아가 한 발 물러섰다. 백효와 백서련은 그 광경을 어딘가 멍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때 권지아를 지그시 주시하던 강혜림이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에는 이성도 의지도 없었다. 현재 백치에 가까운 강혜림의 모든 행동은 거의 무의식적인 본능에 기한 것들.
현장의 그 누구도 강혜림의 움직임을 읽어 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혜림은 뒷걸음질 치는 권지아에게 다가가 그녀가 뒤집어쓴 후드를 손으로 벗겼다.
훌렁.
“엇?!”
“어?”
그리고 드러난 권지아의 모습을 본 유현과 백서련, 심지어 백효까지 눈을 크게 떴다.
“지, 지아 씨…….”
유현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권지아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 그건 대체 뭡니까?”
유현의 손가락의 끝. 권지아의 머리 위에 돋아나 있는 것은 원래는 없어야 할 짐승의 귀였다. 그것도 갯과, 정확히는 늑대의 그것으로 추정되는 귀가 권지아의 머리에 나 있었다.
권지아는 황급히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지만, 이미 모두가 그 광경을 본 뒤였다.
“……봤어?”
“네? 아, 아니…… 그보다 그 귀는 대체…….”
“…….”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은, 손끝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만 같았다.
권지아가 너무하다는 시선으로 강혜림을 흘겨봤다. 정작 강혜림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를 탓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에 권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서 설명하마.”
오랜만에 본 권지아의 성격이 많이 달라진 것도 있는데, 그녀의 머리 위에 늑대의 귀까지 달려 있다니.
유현은 정말 혼성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 * *
올드 타운으로 향하면서 권지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조금 전 마그니가 내 힘을 보고 도망간 것을 기억하지?”
“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나?”
“확실히 위협적인 힘이긴 한데, 그 마그니가 그렇게까지 당황해하면서 물러날 정도인가 하면 또 그건 아닌 것 같긴 했죠.”
“바로 그거다.”
권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의 근원을 알려 줬다.
“내가 사용하던 기술은 기억하고 있지?”
“예. 설천신류(齧天神流)라고 했었죠.”
권지아의 보랏빛 오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물어뜯는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기본적인 공격은 짐승의 발로 할퀴는 것과 같았고, 그다음은 거대한 짐승의 머리로 물어뜯는 것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하늘을 물어뜯는다는 말에 어울리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사실…… 이 힘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에서 얻어 내 터득한 것이다.”
“그거야 그렇겠죠.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지아 씨는 그 설천신류를 주력으로 자주 사용하셨던데.”
“그래. 그리고 마그니가 이 힘을 두려워할 만큼, 이 힘의 원류는 그들과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다.”
앞장서서 걷던 권지아가 자리에 멈춰서며 유현을 돌아봤다.
“바로, 펜릴의 힘이지.”
“펜릴…….”
펜릴은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유명한 신을 잡아먹는 늑대다.
본명은 펜릴이며 다른 이명으로는 <파괴의 지팡이>라는 뜻의 바나르간드, <유명한 늑대>라는 의미의 흐로드비트니르가 있다.
펜릴의 자식인 스콜과 하티가 해와 달을 집어삼켰다는 전승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펜릴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괴물인지 추측조차 힘들어진다.
그런 펜릴은 입을 벌리면 턱이 땅을 뚫고 들어가고 입천장이 하늘에 닿았다고 하는데, 그 상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거라는 예언이 혼성계를 떠돌았지만.
“펜릴이…… 실제로 존재했습니까?”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아주 먼 과거의 일일 뿐이라고, 적어도 유현은 그렇게 알고 있다.
펜릴과 요르문간드, 그리고 이어지는 라그나로크. 분명 전승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대성군 아스가르드는 혼성계에 멀쩡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라그나로크가 미래에 벌어질 일이라고 치기에는 그 과정이 너무 생생하게 전승되지 않았는가.
유현은 여기서 이 라그나로크라는 것이 단순히 과장된 옛 신화의 전투라고 생각했다.
전승된 이야기에서 토르와 오딘을 비롯한 아스가르드의 1세대 성령들은 전부 죽었으나 지금 아스가르드에 멀쩡히 살아 있는 그들을 생각하면 어딘가 이야기가 잘못 알려진 거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권지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펜릴은 실존한다. 정확히는 펜릴이라고 불렸던 책벌레라고 할 수 있지.”
“책벌레라고요?”
“지아 씨, 지금 책벌레라고 하셨어요?”
책벌레는 세상을 파괴시키기 위한 5번째 이야기의 왕, 배신자 프라이티온이 만들어 낸 인조 생명체이자 그의 추종자다.
적어도 유현이 오엘로에게 듣기로는 그랬다.
책벌레는 말 그대로 세상의 글자를 파먹는 존재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일대를 소멸시키거나 붕괴시키는 끔찍한 생명체다.
그런 책벌레가 펜릴이다? 그리고 권지아가 그런 펜릴의 힘을 이어받았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너희들은 책벌레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지?”
“기본적인 것 말고는 딱히…….”
백서련도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벌레의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5년 전부터 프라이티온이 본색을 드러낸 이후, 책벌레는 혼성계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 이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다.
그것은 연합의 영토 내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간혹 등장한 책벌레 때문에 인명 피해가 났으며, 그로 인해 집행자와 군주들이 나서서 놈들을 토벌해야만 했다.
실제로 바로 얼마 전에도 책벌레 토벌이 대규모로 실행되는 일이 있었다.
“보통 혼성계에서 알려진 책벌레들은, 말 그대로 이지가 없이 세상을 파괴시키는 존재에게 붙는 이름이지. 하지만 그거 아는가? 책벌레 중에서도 이성이 존재하며, 본래는 책벌레라 불리지 않았던 자들도 존재해.”
갑자기 확 커진 스케일에 백서련은 말문을 잃었고, 유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펜릴이라는 겁니까?”
“어디 펜릴뿐일까. 요르문간드를 비롯한 다른 신화 속의 마수들 또한 책벌레의 일종이라 불리지.”
“설마, 다른 대성군도……?”
“신화에 대해서 박식한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무수한 대성군의 신화에서 태초부터 존재했던 혼돈이 있었다는 걸.”
유현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신화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신화의 가장 첫머리는 언제나 빛도 어둠도 없는 까마득한 공허와 혼돈에서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북유럽 신화는…… 태초의 거인 이미르와 소 아우둠라로부터 시작되지.”
“올림포스는 카오스에서 시작되고요.”
“환인제는 마고할미에서, 천계삼십육천은 홍균도인으로부터, 아메샤 스펜타는 앙그라 마이뉴로부터. 그 외에도 반고, 아포피스 등등. 대부분의 대성군은 그런 기원을 지니고 있다.”
“설마…… 그 모든 혼돈의 존재들이 전부 책벌레라는 소립니까?”
“책벌레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권지아의 입에서는 충격적인 진실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그들은 책벌레가 아니었다. 책벌레라는 이름은, 아주 먼 과거에 벌어진 신화 전쟁이 끝나고 생존한 성령들이 그들에게 낙인을 찍듯 붙인 이름이니까.”
“잠깐만요. 제가 아는 바로는 책벌레의 존재는 최초의 텔러 중 하나인…….”
“프라이티온. 배신자의 왕 말이지?”
“알고 계셨습니까?”
“단지 무의미하게 5년의 세월을 떠돌아다니며 보낸 것은 아니니까.”
권지아는 유현을 찾기 위해 5년간 혼성계를 떠돌면서도 온갖 여러 가지 정보들을 모으고, 또 그것을 정리해 왔던 것이다.
“많은 곳을 다녔지. 그중에는 일부 대성군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곳도 있었어. 나는 그런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무수한 유적을 찾고 그곳을 탐구했다.”
“대성군의 영토에…… 유적이라니.”
“그들의 존재가 오래된 것만큼, 당연히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 놈들은 잊은 것 같지만, 나는 유적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지. 혼성계에서 먼 과거에 벌어졌던 신화 대전은 기존 성령들이 혼돈에서 태어난 태초의 존재들에게 건 싸움이었고, 그들이 거기서 승리를 차지했다는 거야.”
패배한 자들은 죽거나, 혹은 살아남은 혼돈의 존재들은 책벌레라는 이름을 달게 됐다.
그들은 말 그대로 이 혼성계를 넘어 세계 자체에 허락받지 못한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전쟁에서 패배해서 밀려난 그들에게 접근한 존재가 하나 있었지.”
“그게…… 프라이티온이었군요.”
“그래.”
본래 혼돈의 존재들은 책벌레라 불려도 존재 자체가 그렇게 변질되지는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바뀐 것은 프라이티온을 만난 이후였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내가 알게 된 것도 과거에 벌어진 신화 대전이 있었고, 전쟁에서 패배한 혼돈의 세력이 우주 구석까지 밀려났다는 것뿐이니까. 그들이 책벌레가 되고, 프라이티온과 관련이 있는 것도 최근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아 씨가 봤다는 이 세상의 진짜 멸망은.”
“그래. 어쩌면……책벌레가 된 혼돈의 존재들과 대성군들 사이에 또 한 번 벌어질 거대한 전쟁일 가능성이 크다.”
또 한 번의 신화 대전이 벌어진다면, 이번에야말로 이 우주는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복된 지난 회차를 미루어 보건대, 앞으로 2차 신화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몇 년이 남지 않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
겨우 세상을 멸망에서 지켜 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저 시작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