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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83화 (383/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83화

백효가 들어가고도 남을 거대한 방 안쪽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피렌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군주, 그것도 집행자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고작 시야가 차단된 것만으로 겁에 질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 어둠은 매우 비현실적이군.’

이야기가 현실이 된 혼성계에서 이런 어둠을 부리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하게 넘어가기에는 피부에 닿는 감촉이 소름 돋을 정도로 싸늘하다.

전신을 온갖 중무장한 마법 갑주로 두르고, 그 갑주 위에 수십 겹의 보호 마법을 새기며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서 몸을 보호했다.

이것을 능가하는 거대한 공격이 아니면 절대로 뚫리지 않는 극한의 방어인데, 유현이 내뿜는 어둠은 그 모든 것을 꿰뚫고 그녀의 피부에 직접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피렌은 그것을 단순한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그녀가 모든 어둠을 뚫고 나왔을 때, 그녀와 함께 움직이던 나머지 병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설마, 정말로 그 어둠에 먹힌 것인가?’

정신 차리고 보니 로브 안에 갖춰 입은 갑주의 마법진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있었다. 자동 수복 기능이 있는 데도 복구가 되지 않았다.

그냥 어둠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단 말인가. 피렌의 경악에 담긴 시선이 아포리아의 가면을 쓴 유현을 향했다.

칠마흑천신공 다섯 번째 마, 유하멸겁.

검은 안개가 잠식한 공간 내부는 무엇도 가리지 않고 전부 집어삼키며 없애 버린다.

피렌과 함께 온 용기병과 아인헤르야르는 전부 검은 안개의 안쪽에서 명을 달리 한 뒤였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군주급의 싸움에서 이제 막 초월자의 벽을 넘어선 녀석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력의 소실은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애초의 목적은 유현과 지부장 백서련을 죽이는 것.

백서련은 유현이 모종의 능력을 통해 숨기고 있었고, 유현을 죽이면 백서련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유현을 죽이면 자연스럽게 백서련의 죽음도 딸려 온다는 소리다.

피렌은 유현을 향해 검을 뽑아 휘둘렀다.

“흠.”

유현은 팔을 뻗어 피렌의 검을 막으려다가 무언가를 느끼고 몸을 뒤로 뺐다.

그 직감이 제대로 들어맞았는지, 조금 전까지 유현이 서 있던 자리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참격이 지나가며 주변을 두부처럼 잘라 냈다.

피렌이 사용한 기술이 아니다. 그랬다면 유현이 눈치를 챘을 테니까.

“그 검. 특이한 걸 사용하는군.”

가면 너머 유현의 시선이 피렌이 들고 있는 검을 향했다. 조금 전 보이지 않던 참격도 전부 저 검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눈치챘나?”

피렌은 그런 유현을 보며 감탄하듯 물었다. 보통 자신과 처음 싸우는 녀석들은 살리오 제국에서 만들어낸 이 신화급 검의 특수능력을 눈치채지 못하고 당황하는데, 유현은 한 번 본 것만으로 그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

“살리오 제국의 무구인가?”

“그래. 하지만 알아봤자 소용없다.”

피렌은 그렇게 말하며 로브 안쪽에서 단검 여러 개를 꺼냈다.

유현은 그것이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무기라는 걸 직감했다.

‘저것도 살리오 제국의 마도구인가.’

살리오 제국이 하나의 세력으로 우뚝 선 것은 공격적인 움직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법과 과학을 접목시킨 마도공학의 극의를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만들어진 물건들은 전쟁이나 싸움에 특화된 병기들이었다.

‘멸망해 버린 제국의 뒤를 이었다고 했는데, 말뿐만은 아니라 이거로군.’

설마하니 마도공학의 정수를 달성했다고 알려진 살리오 제국의 기술을 그대로 구현했을 줄이야.

피렌이 단검을 투척했다. 아니, 투척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단검은 마치 의지를 지니기라도 한 것처럼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며 유현을 향해 날아왔다. 다각도에서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단검은 그 자체만으로 위협적이었다.

유현은 피렌을 보며 웃었다.

“같잖은 짓을 하는구나.”

고작 5자루의 단검으로 나를 죽이겠다고? 아니, 그게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마 피렌은 단검을 이용해서 유현의 시선을 분산시켜서 방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한 거 같은데,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바람인지 기가 찰 따름이었다.

“내게 위협을 가하려면 최도윤 녀석처럼, 최소 천 자루의 검은 쏘아 냈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지금까지 숨겨 왔던 백련을 꺼내 들었다. 손에 쥔 백련을 검의 형태로 휘두르며 날아오는 단검을 모조리 쳐 내고, 그대로 피렌의 미간에 쏜살같은 찌르기를 내질렀다.

피렌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콰지직!

백련이 피렌의 미간을 찌르기 직전 허공에 반투명한 방어막이 겹겹이 생기더니 백련의 검을 막아 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일 뿐, 힘없이 무너진 방벽은 유리처럼 깨지며 허공에 흩어졌다.

그 사이에 피렌은 있는 힘껏 고개를 꺾어서 유현의 찌르기를 피했다.

피렌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흠. 방금 그걸로 확실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정말 별게 다 있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현은 피렌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최도윤과 같은 집행자라고 하길래 대체 얼마나 강한지 나름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거늘, 피렌이 보여 준 무위는 그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최도윤이 스스로 무의 극한을 이룬 강함이라고 한다면 피렌의 경우에는, 그래 장비와 아이템만 믿고 까부는 것에 가까웠다.

피렌의 순수한 무력의 수준만 놓고 보면 조금 강한 군주급 정도. 흑뢰군주라 불리던 강혜림도, 검의 군주라 불리던 최도윤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다.

“무기 자랑이라도 하려고 싸우는 건 아닐 테고, 이쪽이 조금 진지해지면 그쪽도 전력을 보여 주려는 거냐?”

“너…….”

피렌은 유현을 보며 떨리는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그녀의 시선은 조금 전부터 유현의 손에 쥐어진 백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검…… 어디서 난 거냐.”

“아. 이거?”

유현은 백련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하긴. 살리오 제국의 뒤를 이었다는 녀석이니 백련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곧바로 꿰뚫어 봤을 것이다.

“그 검을 어찌 네가……!”

“왜?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그건 제국에서도 몇 개 만들어지지 않은 마스터피스 중 하나다! 네놈이 가지고 있을 무기가 아니란 말이다!”

“이미 멸망한 제국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을 텐데.”

“멸망이라니! 살리오 제국은 영원하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러라지. 다만, 이 검은 원래부터 내 거였어.”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피렌의 반응을 살폈다. 뭔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봤다는 저 표정을 보면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격했다. 그렇게 과거 사라진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살리오 제국 장검에 집착이라도 있는 건가?

‘뭐가 어찌 됐든 상관없겠지.’

그보다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살리오 제국 녀석들을 만난 이후부터 백련의 말이 부쩍 줄었다. 싸울 때도 간혹 한마디씩 거들던 백련은 지금 침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백련?’

[…….]

‘백련.’

[으, 응? 나 불렀어?]

다행히도 잠이 들거나 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조용해지고.’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살리오 제국 때문이야?’

백련은 이제는 멸망해 버린 살리오 지국에서 만들어 낸 마스터피스 무구다. 혼성계 내에서도 신들이 사용하는 무구에 버금가는 신화급 무구이며, 주인과 함께 강해지는 특성까지 지녔다.

그런 백련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지만, 멸망한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녀석들을 만났으니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 확신은 아니지만…… 조금 고민할 게 있어서. 걱정했다면 미안.]

‘아니. 네가 괜찮으면 이쪽이 다행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백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힘이 없었다.

분명 뭔가 있는 게 틀림없는데, 그것을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유현은 당장 눈앞의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왜? 더 덤비지 않는 건가?”

“건방진……!”

“그렇게 화가 나면 어서 네가 보여 줄 수 있는 진심을 다하라고. 나는 조금 전부터 네 조잡한 실력에 잔뜩 실망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집행자라 불리는 녀석인데, 최도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 이름을 꺼내지 마라!”

최도윤의 이름이 나오자 피렌이 발작하듯 외쳤다.

피렌에게 있어서 최도윤이라는 이름은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스위치였다. 피렌 본인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강함은 살리오 제국의 온갖 마도구의 지원을 받아서 이뤄진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녀의 실질적인 수준은 일반적인 군주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강함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진짜 집행자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그 부족한 것을 마도구로 메꾸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현이 피렌에게 실망을 느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도구 발.

피렌은 살리오에서 자신들도 대단한 전력을 보유했다는 것을 표면적으로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집행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피렌은 평소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전까지는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5년 전, 지구 출신의 사람들이 연합에 몰려왔을 때였다.

안대를 한 왼쪽 눈이 그때를 떠올리자 욱신거렸다.

그 남자. 마치 강함이라는 것을 그대로 빗어 올린 것 같은 남자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리고 그 강함에는 어떠한 외적인 요인이 없는, 자신의 힘으로 쌓아 간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피렌은 자신이 이대로 좋은가에 대한 고뇌에 빠졌다.

“같은 집행자라 해도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군.”

유현은 그런 피렌의 반응에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 어디서 많이 봤나 했더니, 저건 전생의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가.

최도윤, 그 부조리한 강함을 지닌 남자와 비교를 하면 저런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유현은 상황이 웃기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그 남자와 악연으로 맺어진 것이 자신인데, 지금 최도윤의 이름을 써먹으며 피렌을 도발하는 것도 자신이지 않은가.

‘마도구를 저렇게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것은, 당장에 빠르게 강해지기 위한 집착 때문인가.’

확실히 피렌이 두르고 있는 온갖 마도구의 수준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다방면으로 활약하기에 적당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월등한 강자를 상대할 때 제대로 먹히지 않는, 일종의 사도였다. 한 우물을 깊게 파지 못하고, 그저 광범위하지만 얕게 익힌 잡기술에 가까운 것들.

서수민이 봤다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으리라.

진정한 강함은 저런 무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고된 단련을 통해 본연의 힘을 키우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 도구 발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닐 텐데. 어디 더 보여 주지 그래?”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피렌은 그렇게 말하며 로브를 뒤집어쓴 얼굴의 안대를 벗었다. 어차피 정체를 들킨 이상 더는 숨길 것도 없었으리라.

그녀의 안대 안쪽에 있는 것은 멀쩡한 눈이었다. 흉터가 있어서 다친 건지 알았는데, 눈이 멀쩡하다?

‘의안이로군. 다만, 평범한 의안은 아니야.’

홍채로 추정되는 것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마치 기계처럼 구동하고 있다. 저 의안 또한 살리오 제국의 마도공학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마도구인 셈.

저걸로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수작을 부리기 전에 끝내야겠다.

유현은 백련을 작살의 형태로 만들며 그대로 투척했다. 리바이어던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그랬다간 중앙 행정부 건물이 반 토막이 나서 무너질 테니까.

조금 전의 찌르기보다 훨씬 더 빠른 초속의 일격이 피렌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피렌은 그 공격을 읽었다는 듯 몸을 틀어 작살을 회피했다.

‘피했어?’

딱히 보고 반응한 것 같은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이질적인, 마치 이쪽으로 공격이 날아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다는 반응.

“하하하. 전부 보이는구나.”

의안을 드러낸 피렌은 새롭게 펼쳐진 풍경에 웃음을 터뜨렸다.

유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눈은 뭐지?”

“황제님이 내게 직접 선사해 주신 새로운 눈이지. 주위 모든 것들을 탐색하고 분석하며, 이후에는 미래마저 읽어 낸다는 전지의 눈. 그래. 이 눈이야말로 살리오 제국의 생명공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라플라스의 눈이다!”

미래를 보는 자신을 상대로 이제 네놈 따위는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피렌은 웃고 또 웃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녀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도 라플라스의 눈을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둘째치고,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장난 아니게 많았다.

미래를 보는 대가 때문인지, 의안에 내재된 프로그램이 최대한 거르고 거른 정보만 보내 주는 데도 시신경과 뇌가 타오르는 기분이다.

군주급이 아니라 일반 병사가 이런 걸 사용했다면, 곧바로 뇌가 녹아 버려서 백치가 되어 미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네놈의 공격은 절대 내게 닿지 못해!”

“미래를 보는 눈, 라플라스라…… 정말 재미있군.”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피렌을 향해 검의 형태로 바꾼 백련을 휘둘렀다.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무게가 덜 한 공격에 피렌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피하고자 몸을 반응시켰다.

그런데.

‘……뭐, 뭐야!’

분명 피했다고 생각한 유현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자신이 피하는 위치로 옮겨 갔다.

그것을 읽어 내고 또 피하려고 하면 유현의 검은 피렌의 다음 움직임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따라왔다.

그녀의 왼쪽 눈이 뜨겁게 타오르며 오류를 외치고 있었다.

“너, 넌 대체……!”

피렌은 두려움에 떨며 유현의 가면에 떠오른 한쪽 눈을 바라봤다.

의안이 조금 전부터 알리고 있는 오류의 근원이 바로 저것이었다.

“미래를 보는 눈이라고 해 봤자 네 건 고작 진짜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은 레플리카.”

“서, 설마…….”

“진짜 라플라스의 악마 앞에서, 감히 미래를 내다본다고 논하다니.”

가면에 박힌 붉은 눈.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피렌은 마치 어둠에 잠긴 채 거대한 악마를 올려다보는 환각을 보았다.

“기분이 나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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