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78화
식사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마음이 여린 강유라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오직 강혜림만 차려진 음식을 별 생각 없이 먹고 있었다.
유현은 순간 당황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을 한 거였는데, 설마하니 눈물을 흘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그냥 별거 아닌 일인데, 왜 저러는 걸까.
너무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유현은 힘든 일에 대한 역치가 남들보다 지나치게 높았던 것이다.
“어,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진짜로. 덕분에 마음이 놓였어요.”
“그, 그치만 오빠…… 엄청 힘들었잖아.”
강유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
“아니, 유라야. 나 진짜 괜찮다니까. 어제까지는 뭐, 솔직히 힘들긴 했는데…… 덕분에 나아졌어. 진짜로.”
“크흥. 그러면 이제 뭐 하게?”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잖아. 다들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리고 헤어진 옛 동료들도 찾고…… 뭐 그래야지. 혹시 알고 있는 사람 없어?”
“누구?”
“아무나 좋으니까. 아니, 그보다 수민 씨는? 같이 있지 않았어?”
“어…… 수민이는 그러니까…….”
유라는 살짝 망설이더니 유현의 눈빛을 보고 포기한 듯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한 달 전에 도시를 떠났어.”
“한 달 전? 그렇다면 그전까지는 같이 있었다는 거야?”
“그랬지.”
“그 해결해야 한다는 일이 뭔데?”
“수민이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나한테도 말 안 할 정도로?”
유현이 진지하게 나오니 강유라도 그 이상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도 식사에 열중하는 강혜림을 곁눈질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혜림 언니를 저렇게 만든 녀석을 혼내 주러 간다고…….”
강혜림을 저렇게 만든 녀석이라고 한다면, 유현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마라 파피야스.
타화자재천의 마왕인 그가 강혜림의 타락을 주도했으니 사실상 원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서수민은 그런 마라의 존재를 일찌감치 눈치채고 그를 쓰러뜨리러 간 것이다.
말로는 혼내 주겠다고 했지만, 서수민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그보다는 훨씬 더 과격하고 직설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건…… 좀 큰일이네.”
“여, 역시 그렇지? 내가 수민이를 말렸어야 했는데. 수민이가 워낙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아니.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왜? 상대는 무려 1세대 성령이라고. 그것도 그 위험하다는 마천의 왕, 마라 파피야스! 아무리 수민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초월자만 몇이고, 얼마나 많은 적이…….”
“그걸 감안해도 괜찮다는 거야.”
유현은 가레스가 자신과 함께 움직이면서 해줬던 이야기 중 하나를 떠올렸다.
마라 파피야스가 기거하는 타화자재천에 침입자가 하나 나타났는데, 혼자서 10명이 넘는 초월자와 타화자재천에 기거하는 천군을 쓸어 버렸다고 했다.
그만한 강자가 대체 누구인지 그때 들었을 때는 의아했었는데, 강유라의 말을 듣는 순간 바로 그 침입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서수민. 그녀는 이전부터 이미 초월자의 가능성에 발을 들였던 덕분인지 5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강해진 것이었다.
유현은 강유라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전해 줬다.
“저, 정말? 수민이가 정말로 다 이겼다고?”
“그래. 너는 수민 씨랑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면서 왜 그걸 모르는 건데? 얼마나 강한지 알 거 아니야.”
“그, 그치만 수민이가 강하다 해도 상대도 상대니까……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
강유라는 그러면서 서수민이 연합 내에서 얼마나 대단한 전력으로 평가받는지 떠들었다.
사실 서수민의 실력만 놓고 보면 군주급, 그중에서도 집행자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녀는 그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군주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나서서 뭘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녀의 강함을 아는 사람은 연합 내에서도 극소수, 그것도 고위직 사람들만 알고 있다고 한다.
“수민 씨의 성격을 고려하면,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라 파피야스가 도망쳐 버렸으니 서수민이 돌아올지도 불확실해졌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끝까지 마라 파피야스를 추격해서 그를 없애 버려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혹시, 수민 씨와 연락을 취할 수단이 있어?”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연락이라도 됐으면 혜림 씨가 멀쩡해졌다는 설명을 해 주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서수민이 움직인 계기는 강혜림이었다.
그녀를 타락시킨 대상이 마라 파피야스니, 그를 없애면 강혜림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마라 파피야스를 쓰러뜨리기도 전에, 강혜림은 유현의 손에 의해 바뀌었다.
그것이 구원인지, 혹은 또 하나의 문제인지는 일단 내버려 두더라도 이 사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서수민이 바로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지구에서 사용하던 통신 기기니 뭐니 하는 것은 혼성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 통화를 할 수 있는 수단이 몇 개 있기는 한데, 서수민이 연락을 받을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좀 위안이 되네.”
서수민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단신으로 1세대 성령의 영역에 가서 깽판을 놓을 정도라면 어딜 가서도 다칠 일은 없어 보였다.
그 정도로 일을 벌였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그녀를 건드릴 배짱이 부릴 존재는 없을 테니까.
유영민의 경우에도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 같고.
“혹시, 서련 씨나 지아 씨의 소식은 들었어?”
“아. 서련 언니는 안 그래도 말해 주려던 참이었는데. 언니도 이 도시에 있거든.”
“어, 정말?”
“응. 도시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 안 그래도 오늘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지아 씨는? 지아 씨의 행방도 알아?”
“권지아 언니는…… 나도 모르겠어. 워낙 자신을 잘 알리지 않는 성격이라서, 미안해.”
“아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런가…… 지아 씨는 아직 모르는구나.”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백서련과 서수민의 행방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성과는 있는 셈이었으니까. 권지아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녀가 어딜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뒤이은 식사를 끝낸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2층에서 마음을 정리한 아버지가 계단을 내려오다 유현과 마주쳤다.
“가는 거니?”
“예…….”
언제 돌아올 거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유현도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둘은 서로가 알고 있었다. 오늘 떠난 이후로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할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유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힘내렴.”
“…….”
그 한마디 응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일전에 봤을 때 아버지는 유현에게 남인 것처럼 존댓말을 썼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자신의 가족인 것처럼 편하게 대하며 그를 응원해 줬다.
그 사소한 변화 하나가 유현에게 아주 크게 다가왔다.
“허허. 괜히 부끄러워지네. 나이를 먹다 보니 주책만 는 거 같아.”
“아니요, 충분히 응원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그런가? 맨날 딸만 대하다 보니, 아들은 어떻게 대할지 참 애매해진단 말이지.”
“똑같습니다.”
“응?”
“똑같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똑같았다.
상대가 아들이고 딸이고 상관없이, 가족으로서 아버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옛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허, 허허. 그런가?”
“네.”
“그렇게 말해 주면 내가 안심이지. 그래. 힘내서 꼭 원하는 바를 이루렴.”
“그럴게요.”
아버지와 대화를 끝내고 현관에 나오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이 참 많지?”
“아뇨. 별거 아니었어요.”
“그래. 할 말은 이미 그이가 다 했을 테니, 나는 별말 하지 않을게. 힘내렴.”
“……네. 고마워요.”
그것만으로 충분한 위안이 되었기에 유현은 은은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혜림과 집 밖으로 나오자,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강유라가 다시 예전처럼 밝게 웃으며 유현을 이끌었다.
“자. 가자. 올드 타운의 중앙 행정부로.”
“그래.”
강유라가 유현을 이끌고, 유현이 강혜림을 이끄는 기묘한 구도가 펼쳐졌다.
올드 타운은 원가 커다란 도시답게 이동 수단이 꽤 많았는데, 일전에 코스모마켓에서 보았던 신기한 이동 수단들도 더러 보였다.
지면을 빠르게 달리는 커다란 쥐며느리라던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4개의 날개를 지닌 익룡까지.
“너는 뭐 탈 것 없어?”
“나? 당연히 있지.”
그런 질문을 기다렸는지 강유라가 턱을 치켜세우며 자랑을 시작했다.
“원래 좀 있다가 말해 주려고 하는데, 오빠가 그렇게 궁금해하면 어쩔 수 없지.”
“있으면서 왜 지금 안 부르는데?”
“내건 그냥 부를 수 없거든.”
“그냥?”
“보면 알아.”
강유라가 유현을 데리고 간 곳은, 마치 헬기 착륙장처럼 넓은 공터였다.
“강유라 경비대장님. 반갑습니다.”
“네. 수고하시네요.”
공터를 지키는 사람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강유라는 이윽고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등에서 빛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하늘을 향해 높게 솟구쳤다.
유현과 강혜림은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응시했다.
10초 정도가 흘렀을까. 이윽고 공터의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강렬한 태양 빛을 등진 채 나타난 그것은 거대한 날개를 지닌 맹금류였다.
“어?”
그 맹금류의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한 유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현의 옆에 선 강유라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빠도 오랜만에 보지?”
“백효?”
“맞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백색 부엉이였다. 유현은 곧바로 저 맹금류가 백효인 것을 알아차렸다. 새끼 때 보았던 모습과 크기가 천지 차이였지만,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이윽고 공터의 중앙에 착지한 백효는 구르륵 울더니 유현을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녀석도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자기 주인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오랜만이다. 백효야.”
부엉!
백효는 날개를 퍼덕이더니 유현에게 다가왔다. 예전에는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았는데, 이제 유현이 백효의 날개에 폭 들어가게 생겼을 정도로 둘의 덩치 차이는 컸다.
유현은 자신에게 머리를 들이미는 백효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유라 네가 백효를 맡고 있었구나.”
“맞아. 얘가 오빠 사라진 뒤로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 진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거, 내가 열심히 키워서 여기까지 온 거야.”
“백효가 너를 따라서 다행이다.”
백효가 강유라를 따르게 되는 것에 유현은 크게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백효는 미네르바가 키우는 부엉이의 혈통이라 할 수 있는 신수였기에 강유라에게서 자신의 주인 향기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덕분에 주인인 유현이 사라진 것에 슬픔을 느껴도 백효는 강유라의 덕분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 백효는 올드 타운 내에서도 손꼽히는 비행 속도를 자랑하는 최고의 신수로 꼽혔다.
최도윤이 타고 다니는 그 거대한 매조차도 백효의 속도에는 비비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자, 어서 움직이자.”
강유라가 백효의 등에 올라탔다. 유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백효의 등에 올랐다. 강혜림은 처음에는 백효를 경계했지만, 이윽고 백효의 푹신푹신한 깃털의 감촉이 좋았는지 등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대자로 엎드렸다.
백효는 곧바로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 속도는 가히 전투기를 능가할 정도였지만, 유현은 신기하게도 어떠한 중력 가속도와 풍압도 받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오르자 올드 타운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효가 향하는 곳은 그중에서도 중앙에 가장 높게 솟아있는 건물이었다.
지구에 있던 부르즈 할리파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하는 저곳이 바로 올드 타운의 중앙 행정부였다.
건물이 얼마나 컸으면 야외 테라스로 추정되는 부분마다 거대한 신수가 착륙할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백효는 그중에서 중앙 정도 되는 층에 내렸다.
“자, 어서 가자. 서련 언니 깜짝 놀래켜 줘야지.”
“……그래.”
유현은 백효의 등에서 내렸다. 백효는 오랜만에 만난 주인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유현은 그런 백효에게 걱정 말라며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다시 만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백효야.”
“맞아. 그리고 진짜 주인이 돌아왔으니, 이제 백효는 오빠와 다시 지내야지.”
“유라 너는 괜찮겠어? 백효 없으면 어쩌게?”
“에이. 나야 다른 타고 다닐 얘들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경비대장의 직책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니까? 애초에 나는 주인 대행으로 백효를 5년간 맡았을 뿐이고. 돌려주는 게 마음이 더 편해.”
“네가 그렇다면야 뭐…….”
유현과 강유라, 강혜림은 곧바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단순히 지구 출신의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인간들도 더러 보이고 아인종들까지 섞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강유라를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유현은 그들이 보내는 눈빛과 태도에서 정말로 강유라가 올드 타운에서 인정받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다.
“서련 씨는 어디에 있어?”
“지금쯤이면 이미 출근해서 서류 작업하고 있겠네. 그리고 서련 언니만 있는 거 아니야. 오빠네 회사에 있던 사람 중에서, 정보를 모으는 담당 한 분 더 있었잖아?”
“성유찬 씨?”
“맞아. 그분도 여기에서 일하고 계셔. 그리고 이제 그 사람 유부남이야.”
“뭐? 진짜?”
유현은 그래도 모두가 불행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기대감에 젖어 들었다.
백서련 씨는 자신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를 놀래켜 준다는 생각만으로 조금은 흥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여기야.”
문 앞에 도착한 강유라가 벌써부터 기대감에 이기지 못해 문을 노크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안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유현의 일행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