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70화
또 다른 손님을 쫓아낸 유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과정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지난 일주일간 유현은 온갖 귀찮은 자들에게 시달렸다.
그나마 조금 전처럼 조용히 물러난 퍼시벌과 가레스는 양반이었다.
며칠 전 찾아온 녀석은 유현에게 자신이 이런 말을 해 주는 것 자체를 고마운 줄 알라며 건방지게 굴었다가 목이 날아갔다.
그 외에도 말로는 유현이 들어먹질 않자 강혜림을 인질로 삼으려는 녀석들도 있었다. 놈들은 유현이 직접 가장 고통스럽게 죽였다.
유현은 특히 강혜림을 건드리려는 녀석들 때문에 날이 잔뜩 서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뜨지 못하는 것에 지나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강혜림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까지 나타나니 신경 쇠약에 걸리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강혜림은 아직도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었다.
그녀가 멀쩡하게 눈을 뜨길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유현아. 괜찮아?]
‘나는 괜찮아.’
사실 괜찮지 않았다. 백련이 보기에도 유현의 상태는 그렇게 좋지 않았으니까.
감정이 무뎌지고 성격이 더 날카로워졌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강혜림을 자신의 손으로 벤 그 순간부터 유현은 조금씩이지만 변해 갔다.
그나마 유현이니까 저렇게 버티는 걸지도 몰랐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즉 미쳐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당장 이 모든 사건을 코앞에서 지켜보던 백련도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데, 당사자인 유현은 오죽할까.
바스락.
풀숲에서 또다시 소리가 나더니, 조금 전 떠났다고 생각한 기사 가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현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물었다.
“내가 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하하. 그래서 퍼시벌님은 다시 원탁으로 돌아가셨어요.”
“너는?”
“저는 가 봤자 할 것도 없어서요. 이왕 나온 김에 좀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복귀하려고요.”
“그래서 이쪽에 붙겠다? 뻔하군.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아, 아니에요! 진짜로. 대성군에 들어와 달라거나 그런 부탁 하는 거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혼자 돌아다니기 적적하니까 가는 길에 이야기나 좀 나누거나 뭐, 그런 것도 좋으니까요.”
“이야기라고?”
“제가 누군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걸 참 좋아하거든요. 다른 선배들은 저보고 말이 너무 많다고, 수다 떠는 것을 좀 줄이라고 하지만…… 예전부터 이어져 온 천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리 쉽게 바뀌겠어요?”
가레스의 말에는 어떤 속내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정말 순수하게 유현에게 호기심이 동해서 그를 찾아왔을 뿐이었다.
유현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가레스를 모질게 내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레스를 보면서 글루칼리스에서 보았던 링우그가 떠오르기도 했다.
“귀찮게만 굴지 마라.”
“아, 감사합니다!”
가레스는 해맑게 웃으며 유현의 맞은편에 적당히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는 싱글벙글거리는 얼굴로 유현을 주시했다.
신경을 끄려고 해도 그 시선이 너무 강렬했기에 유현은 살짝이지만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네?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대체 무엇이?”
“저,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강유현 텔러님을 다시 보는 게 되게 반갑거든요.”
“날 알고 있군.”
“알다마다요, 유명했잖아요. 가호를 포기하고 직접 싸우는 텔러. 남들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상세계를 컬렉터들과 함께 클리어 한 불세출의 천재! 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부터 봤거든요. 진짜 팬이에요.”
“팬……인가.”
설마 자신을 알아보고 그렇게 말해 주는 성령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가레스의 태도를 보면 단순히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런데 솔직히 놀랐어요. 5년 전에 행방불명되시더니, 갑자기 이렇게 나타났잖아요. 심지어 책더미 군주라는 이명까지 얻은 채로 말이에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냥 말 못 할 개인적인 일이 있었지.”
“그렇군요.”
가레스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더 묻는 것은 유현에게 있어서 실례라고 느낀 것도 있지만, 그의 본능이 이 이상은 입을 다물라고 경고를 한 영향이 가장 컸다.
유현의 모습은 그가 알던 5년 전의 모습과 상당히 달랐다. 겉모습은 바뀐 것이 없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그랬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잘 웃던 강유현 텔러는 사라지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분노와 괴로움으로 점철된 책더미 군주 강유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레스는 쥐죽은 듯 조용히 잠을 자는 강혜림을 슬쩍 보며 어렴풋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눈치챘다.
강유현 텔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반응과 지난 5년 동안 어떠한 소문도 없던 것으로 보건대 그는 모종의 사건 때문에 5년 동안 행방불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백화 매니지먼트 사람들은 사분오열 흩어지고, 강혜림 컬렉터는 타락해서 흑뢰군주가 됐다.
책더미 군주라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과 함께 흑뢰군주가 죽었다는 소문을 접하고, 책더미 군주가 강유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가레스의 머릿속에 이 모든 상황이 차곡차곡 정리됐다.
의견의 차이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유현은 변해 버린 강혜림과 싸워 그녀를 쓰러뜨렸다.
‘흑뢰군주가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죽은 건 아니라서 조금 의외이긴 하네. 기절……은 아닌 것 같고, 저렇게까지 깨지 않고 계속 잠만 자는 걸 보면 무언가 있었던 거겠지.’
싸웠다는 소문은 진짜일 것이다. 적어도 서로는 분명 진심을 다해 검을 휘둘렀던 거겠지.
유현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가레스는 문득 옛날에 있었던 전쟁을 떠올렸다.
모두의 앞에 우뚝 나서서 찬란한 황금빛 검을 들던 아서 왕. 그가 섬기는 왕이자 마비노기온 내에서도 상대할 자가 거의 없다고 알려질 정도로 강력한 성령이자 영웅.
아서 왕은 대의를 위해서 소중하다고 생각한 아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끊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 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때 아서 왕이 짓던 표정이 지금 유현의 얼굴과 똑같았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는 건 알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네.’
가레스는 유현의 시화를 즐겨 보던 구독령 중 하나였다. 다른 텔러들이 보여 주는 시화와 다르게 유현의 시화는 자신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낭만, 로망, 모험 등등.
언제나 안전만 추구하며 비슷한 이야기만 반복해서 보여 주는 여타 텔러와 다르게, 유현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기사도에 반해 그것을 추구하던 가레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유현이 라 만차의 돈키호테에서 보여 준 그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가슴이 뛰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조금 전 퍼시벌이 자신에게 위험하니 같이 돌아가자고 했음에도 고집을 부리며 유현과 붙어 있겠다고 대답한 건 그런 이유였다.
지금은 무뎌지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이 남자의 어딘가에는, 아직도 자신이 그때 보았던 찬란한 빛과 기사도가 남아 있다고. 그렇게 믿었기에 가레스는 위험을 감수하고 유현과 동행을 택한 것이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차피 잠 따윈 자지 않아도 돼.”
“강혜림 컬렉터, 때문이죠?”
“…….”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로 점철된 그의 얼굴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죄책감을 가지고 계시군요.”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유현은 애달픈 얼굴로 고요히 잠들어 있는 강혜림의 뺨을 쓰다듬었다.
가레스는 그 모습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해해요. 저희 왕도 그러셨죠.”
“……원탁의 왕이라면, 아서 팬드래건 말인가?”
“네. 그분도 많은 후회를 했죠. 혹시 모르시나요?”
“랜슬롯과 모드레드 일 때문이군.”
“아시는구나. 네 맞아요.”
가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비노기온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조직 중 하나인 원탁의 기사들. 하지만 원탁의 기사는 옛날과 비교하면 완전하지 못했다.
그 빈자리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니까.
“저희가 별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그때 있었던 일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바뀌려고 해도 쉽지 않죠. 저희가 지닌 그 이야기들이 저희를 계속 좀먹고 바뀌는 걸 거부하거든요.”
호수의 기사였던 랜슬롯은 배신의 기사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런 랜슬롯은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을 후회한다고 한다.
하지만, 후회해도 역사는 바뀌지 않는가. 그는 여전히 배신의 기사이며, 원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각인된 역사와 이야기가, 일종의 족쇄가 되어 그를 끝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왕께서는 그들을 이미 용서했죠. 하지만 그들은 돌아올 수 없어요. 왕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고요. 결국 성령들의 후회란 그런 거예요.”
상계라고 해서, 별의 자리에 올랐다고 그들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성령이라는 존재는 좋게 말하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의 극한에 당도한 것이고, 바꿔 말하면 그 이상 더는 변할 수 없는…… 제자리에 정체된 존재였다.
“그래도 유현 씨의 경우에는 조금 낫잖아요? 적어도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진 건 아니니까,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하하, 죄송해요. 오늘 막 처음 만난 사이인데, 제가 참견이 좀 심했죠?”
괜히 머쓱해진 가레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하려다가 강혜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무슨 일이지?”
“아, 아뇨. 그…… 강혜림 컬렉터가 방금 좀 움직인 거 같았는데.”
“……!”
유현의 시선이 다시 강혜림을 향했다. 가레스의 말이 맞았다. 눈을 감고 있던 강혜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고요히 잠만 자던 그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유현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이윽고 강혜림이 눈을 떴다.
“혜림 씨? 혜림 씨! 정신이 드십니까?!”
유현은 데카르트를 역소환하고 강혜림의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뜬 강혜림은 아직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이 모닥불에서 가레스를 향하더니 이윽고 자신의 곁에 있는 유현으로 옮겨 갔다.
“혜림 씨.”
“……!”
그리고 유현의 얼굴을 본 강혜림의 안색이 창백하기 질리더니, 그녀가 갑자기 발작하기 시작했다.
“아, 아으아아!!”
“혜림 씨? 정신 차리세요!”
유현이 다가갔지만, 강혜림은 더더욱 팔을 휘저으며 유현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레스와 백련이 당황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기억이 불완전한 거야.’
유현은 강혜림이 어떤 상태인지 곧바로 파악했다.
지금의 그녀는 부활의 후유증 때문에 기억이 온전치 못했다. 유현을 보고 강혜림이 공포에 질려 발작을 하는 것도, 죽기 직전 자신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 유현이라는 기억을 단편적으로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해!]
‘일단 진정시켜야 해.’
강혜림의 발버둥이 끝나려 하지 않자 유현은 그녀를 품에 안듯이 껴안았다. 강혜림은 유현에게서 벗어나려고 팔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이 유현의 몸 곳곳을 때렸다.
기억은 온전치 못해도 그녀의 육신은 군주였던 시절의 그대로였다. 강혜림의 손톱이 유현의 뺨을 할퀴고 지나가자 상처가 터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괜찮습니다, 혜림 씨. 괜찮아요.”
강혜림이 자신을 거부하고 때려도 유현은 그녀를 풀어 주지 않았다.
강혜림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이제, 이제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
강혜림의 숨결이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의 움직임이 잠잠해지더니 이윽고 다시 눈을 감고 유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잠에 빠져들었다.
유현은 강혜림을 조심히 눕혔다.
“괘, 괜찮으세요?”
뒤늦게 가레스가 다가와 유현의 상처를 살폈다.
“어, 상처가?”
“금방 재생하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뺨에 난 상처는 이미 재생됐다. 다윈의 육체를 지닌 유현에게 이런 것은 상처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다만, 유현이 흘린 피는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었다. 텍스트로 변해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가레스는 그것을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가, 텍스트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어……?”
유현은 초월자, 그것을 넘어선 군주가 되었다. 군주급 강자는 혼성계에 완전히 적응했기에 다치거나 상처를 입으면 피가 신체의 일부가 텍스트가 되어 흩어진다.
하지만, 지금 유현의 피는 아무리 봐도 물질계의 그것과 똑같았다.
책더미 군주라 불리는 유현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보일 수 있는 현상이었으니까.
“이게, 대체…….”
가레스는 의아해하다가 문득 한 가지 가설에 생각이 미쳤다.
유현이 군주급 존재가 됐다는 것은 최소한 그가 ‘이야기의 지평선’에는 도달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야기의 지평선은 일종의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인간이 성령의 자리로 올라가듯이 말이다.
“유현 씨,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당신 설마, 이야기의 지평선에 도달한 뒤…… 인간이 되신 겁니까?”
그리고 그것은 바꿔 말하면, 성령도 인간도 아닌 다른 존재가 인간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증거.
가레스는 스스로가 이 가설을 떠올려 놓고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성령의 자리에 올라갈 기회가 있음에도 그걸 포기하고 인간이 되길 선택하는 자가 있을 리가 없다고, 그렇게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래.”
유현의 대답을 듣는 순간, 가레스의 눈이 찢어져라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난 이제 텔러도 아니야.”
강유현 텔러. 아니, 인간 강유현.
그는 이야기의 지평선에서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