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68화
유현은 강혜림을 안아 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군단도 해방군도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 붙잡거나 막지 않았다. 그들은 붕괴하는 흑뢰궁을 보았기에 막을 수 없었다.
유현도 남겨진 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서로가 속았다고 생각하는 군단과 해방군의 케케묵은 감정이 고작 이런 거로 해소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전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그렇게 유현은 떠났고, 이후 유현에 대한 소문이 빠른 속도로 혼성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흑뢰군주, 마천후 강혜림의 몰락.
그리고 새로운 군주, 책더미 군주의 등장까지.
하지만, 책더미 군주는 여타 군주와 다르게 영역을 차지하거나 누군가를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떠돌이처럼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퍼졌을 뿐.
그것이 오히려 혼성계의 존재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군주이되 지배하지 않는 군주.
자신의 영토가 없이 떠도는 군주.
혼성계에서 군주라는 존재가 일종의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는 걸 생각하면 유현의 행보는 그야말로 이례적이었고, 당연히 대성군과 성군들이 그런 유현의 행적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유현을 자신의 편으로 데려오기만 한다면, 그들은 흑뢰군주를 쓰러뜨린 엄청난 강자를 전력으로 얻게 되는 거니까.
책더미 군주의 진짜 이름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래도 흑뢰군주를 쓰러뜨리고 해방군을 도왔다는 행동으로 보건대 그 성향은 악인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혼성계의 거인들 또한 그 부분을 인지하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라. 가서 책더미 군주를 찾아라. 찾아서 그를 우리 성군으로 영입해라.
유현의 등장과 동시에 혼성계의 정세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 *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돌원숭이 자식!]
마라 파피야스가 기거하는 제육천의 세계.
먹구름이 가득하고 하늘에서 끝없이 번개가 휘몰아치는 검에 물든 세상.
그곳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천궁에서 마라 파피야스의 분노에 찬 고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마라 파피야스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계속 씩씩거렸다. 강유현 텔러를 거의 손에 넣기 직전이었는데, 그 중요한 순간 손오공의 방해를 받아서 전부 물거품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손오공 녀석이 끼어든 이유도 가관이다. 녀석이 그냥 짜증이 나서 끼어든 거라면 이해라도 한다. 손오공의 제멋대로인 성격은 혼성계에서도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손오공은 석가모니의 부탁을 받고 움직였다고 했다.
그것이 마라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빌어먹을 땡중! 죽어서도 나를 방해하는구나!’
석가모니는 태초부터 존재해 온 그가 유일하게 타락시키지 못했던 존재.
오히려 자신이 애지중지 키웠던 부하를 셋이나 극락정토에 빼앗기고, 애처롭게 빌면서까지 그의 열반을 막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마라 파피야스에게 있어서 석가모니라는 존재란 결국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었다.
그런 석가모니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마라 파피야스는 그가 미련하다고 비웃었다.
고작 하계의 존재에게 저렇게 희생을 하려고 하다니, 그것을 위해 그 무수한 고통을 견디며 열반을 바란 거냐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죽을 때도 웃으면서 떠났다. 마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왜 네놈은 소멸까지 하면서 그렇게 웃은 거지?’
석가모니가 죽는 순간, 마라 파피야스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이제 절대로 그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마라 파피야스는 유현을 노렸다. 석가모니가 이전부터 눈여겨본 존재. 다른 세상의 천마를 영입하고 그녀를 키우며 출라판타카마저 꺾어 버린 텔러를.
그를 타락시키고 망가뜨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은 석가모니를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점을 지울 수는 없어도 그것을 어느 정도 뒤덮을 수만 있다면 해 볼 만했다.
마라 파피야스는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눈여겨본 것은 강혜림이었다. 사실 건드릴 만한 대상이 그녀밖에 없던 영향이 컸다.
‘어차피 다른 놈들은 건드려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
권지아와 서수민, 그리고 유영민까지.
이 셋은 마음이 너무나도 단단해서 그가 파고들 틈이 없었다. 하지만 강혜림은 달랐다.
유현이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게 됐다는 걸 깨달은 강혜림의 마음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이전부터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기는 했다. 아닌 척하고 있어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의 관심을 끌 정도의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날 지구가 2차 판타즘 쇼크를 겪으며 사상세계의 폭주를 맞이했을 때, 마라 파피야스가 처음으로 유현의 서재에 방문해서 그들을 지켜보는 순간부터 느꼈다.
강혜림의 마음속의 어둠이 본격적으로 싹을 틔우고 발아했을 때 마라 파피야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혜림이 그토록 바라는 강유현의 모습을 본뜬 인간 하나를 보내,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망가뜨렸다. 갑자기 이상한 도플갱어 하나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더욱 성공적으로 끝났을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강혜림이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그때부터 마라가 나설 차례였으니까.
세상을 타락시키는 마천의 왕은 강혜림에게 힘을 속삭였다. 강혜림은 그런 마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모든 일이 그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됐다.
엄청난 잠재력과 재능을 지닌 그녀는 고작 초월자의 수준이 아닌 군주의 자리까지 우뚝 섰다. 그리고 유현이 돌아오고, 두 사람이 물러서지 않고 싸우게 됐을 때.
마라는 그 대망의 순간을 즐겁게 주시했다.
소중하게 여기던 서로가 칼을 겨누고, 괴로워하면서도 끝내는 무기를 휘두르는 그 상황을.
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마라는 강혜림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기면 그거대로 좋지만, 유현이라는 남자는 고작 그 정도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마라의 예상대로 싸움은 유현의 승리로 끝났다.
그 남자가 자신의 손으로 강혜림을 베고, 그녀의 목숨이 끝나는 순간.
마라는 바로 지금이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네놈은 이제 내 거다!’
견고하던 유현의 마음에 금이 갔다. 마라 파피야스는 틈새로 스며들어 유현을 타락시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봐라. 땡중아. 나는 비록 너를 타락시키지 못했지만, 네가 그토록 아끼는 존재를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이겼다. 이 몸 마라 파피야스는, 이 혼성계 최고의 마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어처구니없는 일의 연속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투전승불이 된 손오공의 개입과 유현의 각성까지.
심지어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강혜림은, 유현이 무슨 수를 부린 건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남게 됐다. 그가 남긴 타락의 흔적까지 모조리 끊어 낸 채로.
마라 파피야스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왜 그 땡중이 저 녀석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겠어. 세 머리의 루시퍼도 저 텔러를 주시했고, 미카엘도 그랬지. 놈에게는 무언가가 있다.’
마라는 이번에 유현을 타락시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시간은 많았다. 유현이 하계에 있을 때는 제네시스 시스템 때문에 개입할 수 없었지만, 그가 상계로 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번에야말로 꼭 성공하겠다. 자신이 타락시키는 데 실패한 것은 석가모니 하나로 족했다.
그런 생각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 그의 영토의 가장 바깥 부분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마라가 묻자 그가 부관으로 부리는 초월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바깥에서 침입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침입자? 내 영토에 침입자가 있다고?]
마라 파피야스는 지금 부관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극락정토와 천계삼십육천에서도 학을 떼는 최초의 마왕이었다.
그런 자신의 영토는 그야말로 모든 존재가 가장 두려워하며 눈조차 돌리지 않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침입자라니?
[극락정토 녀석들이 정신이 나가서 토벌대라도 보낸 것이냐? 숫자는?]
“그, 그것이…….”
[왜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냐. 몇 놈이 왔지?]
“하, 하나입니다.”
[뭐? 하나?]
“예. 침입자는 단 하나뿐입니다.”
마라 파피야스는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침입자가 고작 하나라고? 그쯤 되면 그냥 길을 잃은 멍청이가 아닌가 싶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길을 잃은 녀석인가. 이 혼성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인가 보군.]
“아닙니다. 침입자는 무소속이 맞는 것 같지만 이곳이 마라님의 영토라는 걸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바깥에서 마라님을 찾으면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나를 찾으러 왔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욱 의문이 들었다. 대성군 극락정토도 자신을 노릴 때는 개인이 아닌 다수의 성령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개인이 자신을 노리고 온 거라고?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그만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지금은 그딴 애송이에게 신경 쓸 기분이 아니다. 알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부관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라 파피야스는 안 그래도 짜증이 나는데 별것들이 다 방해를 한다고 생각했다.
명령을 받은 부관은 곧바로 제육천 내에 있는 초월자들을 불러 모았다.
움직일 수 있는 10명의 초월자가 곧바로 부름에 응해 나타났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숫자는 하나. 하지만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배짱뿐만 아니라 실력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마라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시니 최대한 빨리 배제하도록.”
고작 하나를 상대로 10명이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썩 기분이 나쁠 법도 한 데도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마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들은 기꺼이 따르기로 했다.
초월자 10명이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제육천의 외곽으로 향했다.
“뭐지? 이 상황은?”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라 파피야스가 지배하는 욕계의 꼭대기, 타화자재천에는 천인들이 기거하고 있다.
말이 천인이지 그들은 마라의 사병이며, 어지간한 군주가 지배하는 군단보다 훨씬 더 월등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천인들을 이끄는 백인대장은 초월자급 강자들이었다.
비록 정예 초월자들에 비해서는 그 끗발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실력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천인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0명이 넘어 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백인대장이 5명이나 있었다는 소리다.
그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방금 막 쓰러진 건지 그들의 시체는 이제 막 텍스트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대체 누가?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일개 개인이 이 짧은 시간이 500명이 넘는 천인들을 쓰러뜨렸다고?
“흠? 이번엔 또 이상한 녀석들이 나타났구나.”
그 폐허의 중심에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우면서도 늠름해 보이는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백발을 찰랑였다.
검은 장포를 입었지만 소매는 찢어져 있었고, 그런 양손에는 너덜너덜한 붕대를 칭칭 감았다.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두는 지배자의 면모를 지녔으면서, 누군가를 직접 부리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싸우는 투사의 면모가 동시에 존재했다.
강하다.
마라를 섬기는 10명의 초월자는 그녀를 노려보며 잔뜩 긴장했다.
“네년은 누구냐?”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 없고, 마라 파피야스나 불러라. 이곳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감히 우리의 앞에서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네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을 직접 섬기는 정예 사도들이다. 감히 그분을 함부로 부른 죄, 고작 목숨으로 사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 말에 백발 여인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각오? 내가 내 적을 깨부수겠다는데, 각오까지 필요한 일인가? 그래 좋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니, 어디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를 막아 봐라.”
빠직!
초월자들의 이마에 핏대가 돋아났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에 건방지다고 먼저 나서서 덤비는 자는 없었다.
눈앞의 여인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녀의 힘은 그만큼 강했으니까.
초월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잔뜩 긴장을 한 채 싸움의 준비에 들어갔다.
“제 3무림계 17대 천마, 구운혁이다.”
“제 7중간계 3대 마왕 케오르신이다.”
“제 7무림계 4대 혈마 혁강운이다.”
“제 2중간계 심연의 마왕 위고르잔.”
“제 5계 적마인 델샤라.”
…….
10명의 초월자의 입에서 각자 자신의 정체와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라 파피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자신의 세상에서 절대적인 공포로 군림했던 존재들.
누군가에겐 천마이자 마왕이며 혈마였던 자들의 전력은 그야말로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소개가 끝난 그들이 여인에게 동시에 물었다.
“그쪽의 정체는?”
10명의 초월자의 물음에 백발 여인은 그들을 비웃지도, 그렇다고 침묵으로 일관하지도 않았다.
“서수민.”
이제는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하고 전성기의 힘, 그 이상을 되찾은 그녀는 상대방의 의지를 받아들여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백화 매니지먼트의, 서수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