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67화
[그랬던 건가.]
투전승불 손오공은 빛나는 책을 이용해 강혜림을 완전히 치료한 유현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 왜 석가모니가 그를 지켜봐 달라고 했는지, 그리고 왜 스스로 희생을 해 가면서 그를 지키려고 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가, 마지막 열쇠였구나.]
유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손오공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허탈하게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머리털 하나를 뽑아 유현을 향해 ‘후’ 불었다.
[선심 썼다. 원래라면 그냥 저 마왕 녀석만 쫓아내고 나도 알아서 물러나려고 했는데, 이런 것까지 봐 버렸으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받아라. 언젠가 너에게 도움이 될 거다.]
손오공은 그 말을 끝으로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황금빛으로 변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1세대 성령, 그것도 전투력만 놓고 보면 혼성계 최상위를 다투는 손오공의 등장과 퇴장에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손오공이 유현을 구해 주고, 그에게 선물까지 준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어느덧 잠에 빠져든 것 같은 강혜림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유현이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어, 어어?”
“자, 잠깐!”
해방군은 다급하게 유현을 불렀지만, 유현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전혀 들을 것 같지 않자 해방군의 지휘관들은 조급해졌다.
흑뢰군주를 쓰러뜨리고 자유를 되찾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고, 유현 덕분에 그들은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은 반쪽짜리 성공일 뿐이다.
완전한 성공을 위해서는 흑뢰군주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흑뢰군주를 다시 살리다니! 무슨 속셈이냐!”
누군가가 외쳤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되어 다른 해방군 사람들도 속에 담아 놓은 생각을 내뱉기 시작했다.
“맞아! 흑뢰군주가 죽어야 모든 것이 끝난다고!”
“그녀가 다시 우리에게 복수하려고 하면 어떡해!”
해방군은 흑뢰군주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 이상으로 그녀를 쓰러뜨려 놓고 마지막에 그녀를 살린 유현의 행동도 의심스러웠다.
강혜림과 싸울 때까지만 해도 해방군에게 유현은 구세주나 다름없었지만, 그 모든 싸움이 끝난 이후 그는 또 다른 군주가 될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흑뢰군주를 죽여!”
“내 아들의 원수!”
“저 년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곳곳에서 원성에 찬 고함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고스란히 유현과 그 품에 안긴 강혜림을 향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유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모습에 해방군은 순간 움찔 했지만, 지금까지 쌓인 울분이 한 번 터지자 그들에게 이유 모를 용기를 선사했다.
“죽여! 그 년은 살 가치가 없어!”
“죽여 버려!”
계속해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져 나오자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이 해방군을 향했지만, 집단의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은 그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해방군이 우르르 몰려오며 유현을 포위했다. 그들의 섬뜩한 시선이 유현의 품에 안긴 강혜림을 향했다.
“그녀를…… 흑뢰군주를 넘기시오.”
누군가 나서서 말했다. 수염이 길게 난 애꾸눈의 민머리 사나이였다. 유현은 우묵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지만, 남자는 겁에 질리지 않고 유현의 시선을 마주 보듯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는 꺾이지 않소.”
“……흑뢰군주는 쓰러졌다.”
“하지만, 죽지 않았지. 당신이 살려 냈으니까.”
“내가 살린 것은 흑뢰군주가 아니라 강혜림이라는 여인이야.”
“그 강혜림이 흑뢰군주이며 마천후요. 아직도 모르오? 그녀가 눈을 뜨고, 다시 그 광기가 폭발하게 된다면 과연 또 몇이나 되는 사람이 죽을 것 같소?”
“그럴 일은 없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확신하지?”
유현은 저들에게 이성적인 설득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저 두려울 뿐이다.
이미 공포를 알게 된 그들은 타락한 강혜림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믿고 싶지 않겠지. 그들에게 있어서 강혜림은 그저 무수한 학살을 자행한 악녀일 뿐이니까.
그녀가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한 이유도,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마라 파피야스라는 성령이 있다는 것도.
그들에겐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강혜림의 완전한 죽음.
“그래서 날 이렇게 포위해서 협박을 하겠다고?”
“우리가 어찌 당신을 협박할 수 있겠소. 당신의 힘은 이미 아는 바인데. 마음만 먹으면 당신이 손짓 하나만 해도 주위에 있는 우리 모두가 죽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나선다고?”
“우릴 모두 죽일 거요? 그렇다면 그러시오. 그녀가 살아서, 언젠가 다시 우릴 괴롭히게 될 날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죽는 게 낫겠지.”
“…….”
그 말에 유현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했다. 강혜림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증오에 사로잡힌 이 사람들을 손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죄를 떠안겠다고 다짐한 순간, 이들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유현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비켜.”
“비킬 수 없소.”
“비키라고.”
“그렇게 하려면 우리 모두를 죽이고 가시오.”
단호하기까지 한 그의 대답에 유현은 슬슬 짜증이 났다. 더욱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은 상대방이 하는 모든 것들이 말뿐인 허세가 아니라는 거다.
그를 포위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죽음보다 더 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기에 어지간한 협박은 통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해방군은 절박했다.
강혜림이 멀쩡했을 때는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쓰러지고 기절해 있는 지금이야 말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일생일대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해방군은 필사적으로 유현을 막아 세웠다.
[틀렸어. 무슨 말을 해도 저들은 들어먹지 않을 거야.]
‘……두려움, 때문이겠지.’
흑뢰군주인 그녀가 바뀐다고 해도 저들은 믿지 않을 거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다시 자신들을 향해 칼을 겨누면 그때는 누가 책임을 져 주지?
증오의 굴레는 절대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서로 합의 하에 화해를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어느 한쪽이 완전히 죽는 것이다.
유현은 고민했다. 이대로 이 사람들을 뚫고 도망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담판을 지을지.
도망친다고 해서 저들이 쫓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죽을힘을 다해 집요하게 이쪽을 추적하겠지.
이 혼성계에 가야 할 곳마저 제대로 정하지 못한 마당에 귀찮은 혹까지 따라붙은 것은 전혀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갈등을 이 자리에서 끝내야 한다는 소리인데.
대체, 어떻게?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반드시 피가 흘러야만 둘 중 하나는 납득을 하고 물러나는 극한의 양자택일 속에서 유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나는…….”
유현이 무언가 대답하는 것보다 먼저.
멀리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유현은 반사적으로 발을 움직여 그것을 걷어찼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포가 유현의 발에 맞고 방향이 꺾여 먼 곳까지 날아갔다.
모두의 경악 어린 시선이 대포가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흑뢰궁의 성벽 위였다.
“흑뢰군주의 군단이다!”
“저 비열한 녀석들이 기습을!”
“흑뢰군주의 밑에 들어가 학살에 가담한 쓰레기들!”
해방군의 시선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흑뢰궁을 향했다.
그 성벽의 꼭대기, 모두의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유현은 그자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도플갱어?’
자신의 가짜 역할을 맡고 있던 그가,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채 군단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대체 왜?’
싸움은 끝났다. 흑뢰군주는 패배했고, 해방군은 그들이 바라는 자유를 얻기 직전이었다.
가장 큰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흑뢰군주를 잃은 군단은 더 이상 구심점을 잃은 상황이다. 군단은 군주가 있기에 군단이지, 군주가 없으면 그들은 그저 잡졸에 지나지 않으니까.
특히, 마라 파피야스가 보낸 두 명의 초월자와 정예 부대인 흑검단마저 모두 사라진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런 유현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도플갱어는 유현과 허공에서 눈을 마주치더니 씨익 웃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것 같은 그 비장한 미소에, 유현은 녀석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너…….”
“해방군은 들어라!”
유현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도플갱어가 외쳤다.
군단의 병사들과 해방군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흑뢰군주가 쓰러졌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나? 병신 같은 놈들! 그 년은 우리가 부리는 장기 말에 지나지 않았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대장군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해방군은 물론이거니와 성 바깥에서 전투를 준비하던 군단 측에서도 당혹스러운 소리가 연달아 나왔다.
도플갱어는 현재 유현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군단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대장군이라는 모습도 흑뢰군주가 군단을 직접 통치하기 귀찮아서 도플갱어에게 떠넘겨, 그가 군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거짓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군? 아직도 내가 그렇게 보이나?”
도플갱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습을 바꾸었다. 그의 형상이 흐물흐물하며 무너지더니 이윽고 전혀 별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흐, 흑뢰군주?!”
강혜림의 모습으로 씨익 웃은 도플갱어는 이번에는 전혀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곳곳에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아직도 그 년이 진짜 흑뢰군주로 보이나? 멍청한 놈들. 아직도 진짜가 뭔지도 모른 채 저들끼리 싸우는 꼴이 참 웃겨서 말이 안 나오는구나!”
“뭐,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전부, 가짜였단 말이야?”
“그래! 너희들은 전부 우리들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는 거다! 해방군도! 군단도! 전부 다! 우리가 섬기는 마라 파피야스님의 손에 놀아난 거지! 그런데 그걸! 저 빌어먹을 남자가 방해했다! 이 중요한 순간에 말이야!”
일부 해방군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그게 정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그들은 마라 파피야스라는 존재를 봤다.
조금 전까지, 유현에게 넘실거리는 검은 촉수를 들이밀며 주변 일대를 어둠으로 뒤덮던 거대한 존재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본 것이다.
유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우리가, 속고 있었다고?”
“조금 전 나타났던 그 괴물이 모든 일의 배후였어?”
해방군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운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들이 속아 왔다는 사실이 큰 충격을 줬다.
의심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대장군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정체와 목적을 다 밝히는지. 전부 밝힌다고 해서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지금까지 당해 오기만 한 그들의 분노는 어중간한 위로나 보상으로는 절대 꺼뜨릴 수 없었다.
“마라, 파피야스라고?”
“그 자식이…… 그 자식 때문에!”
그들은 검은 기운을 흩뿌리며 나타난 마라 파피야스와 그것을 막아 낸 제천대성 손오공의 모습을 전부 보았다.
대체 왜 그만한 존재들이 나타났는지 의문이 들었는데, 비로소 그 의문이 풀렸다.
두 존재의 등장과 대장군으로 변한 도플갱어의 목소리가 확신을 심어 줬다.
유현은 도플갱어가 대체 뭘 바라는지 알았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유현은 모두가 듣게끔 입을 열었다.
“어쩐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군주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성령이 나타나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전부, 네놈들 짓이었구나.”
유현이 자신의 말을 받아 주자 도플갱어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며 확신을 주듯이.
“아쉽구나! 조금만 더 있었다면 마라 파피야스께서 저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 버릴 수 있었는데!”
“대장군!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마라 파피야스라뇨! 이런 제길! 우릴 속인 거였어?!”
군단 내부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도플갱어는 그에 답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그는 성벽 위에 준비되어 있는 모든 대포를 해방군을 향해 겨누었다.
“이제 와서 깨달아도 늦었다! 전부 죽어라!”
포신이 이쪽을 향하자 해방군은 패닉에 빠졌다. 그렇다 할 방비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 순간, 유현이 움직였다. 허공섭물로 기절한 강혜림을 허공에 보호하듯 띄우며 백련을 쥐었다.
유현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멀리 떨어진 흑뢰궁의 성벽 위에 나타났다.
“죽어라!”
도플갱어는 그렇게 외치며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포를 유현에게 겨누며 쏘아 냈다.
촤자자작!
무수한 대포들이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성벽 위의 모든 대포를 베어낸 유현이 도플갱어의 앞에 섰다. 주위의 군단 병사들이 기겁하며 뿔뿔이 흩어지듯 도망쳤다.
단둘만 남게 되자 유현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플갱어에게 물었다.
“정말, 이걸로 된 거냐?”
“…….”
도플갱어는 씨익 웃는 얼굴로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말은 필요 없다고. 어서 찌르라고.
그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유현이 아니었다.
유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백련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팔을 뒤로 당겼다.
도플갱어, 가짜 강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가짜로 살아가며 평생 그녀만을 섬기고자 했다.
그녀가 바라는 모습을 취했지만, 그녀가 바라는 진짜는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진짜는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었으니까.
결국 진짜가 나타나고, 그녀가 흑뢰군주로서의 삶을 끝냈을 때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아마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납득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됐어.’
가짜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그녀가 지금까지 저질렀던 죄를 자신이 대신 떠안고 갈 수 있으니까.
비록 그 모든 증오를 다 가져갈 수 없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비록 가짜일지라도.
품은 마음만큼은 진짜였기에.
그는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아가씨. 당신이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앞으로의 삶은 힘들고 괴로운 일로 가득하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서 안심입니다.’
산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살다 보면, 계속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녀가 다시 활짝 웃는 날이 올 수도 있는 거니까.
그는 강혜림이 웃기를 바랐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없겠지만, 언젠가 그런 일이 이루어질 거라고 바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가짜였지만, 이 마음에 품은 고결한 의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그만의 것이었다.
누군가를 따라 하고, 그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던 자신이 지니고 있던 유일한 진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족쇄인 자신은 사라지는 것이 맞았다.
그녀의 모든 그림자를 거둬 내면서,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자.
“아가씨를, 부탁한다.”
유현은 검을 쥐고 도플갱어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섬뜩한 칼날의 감촉이 갑옷을 가르고 몸을 관통한다.
차가운 죽음의 감촉이었다.
도플갱어의 몸이 뒤로 넘어졌다. 그의 시야가 뒤집히며 하늘을 향했다.
“아아.”
먹구름이 사라진 흑뢰궁의 하늘은 이렇게나 시리도록 아름다웠구나.
도플갱어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유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그것을 끝으로 그의 육체가 무너지더니, 이윽고 검은 진흙의 형태로 변해 갔다.
그 최후를 끝까지 지켜본 유현은 주위를 둘러봤다.
흉악하게 생긴 흑뢰궁은 여전히 건재했다. 높이 뛰어올라 유현은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기가 성벽을 갈랐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흑뢰궁이 무참히 잘려 나갔다.
이 잔재를 남기지 않겠다는 듯.
유현은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며 그 잔해를 이 땅 위에 쌓고 또 쌓았다.
콰르릉. 모든 것이 무너지며 먼지구름이 뿌옇게 일어났다.
그래도 유현은 멈추지 않고 무기를 휘두르고 기운을 방출하며 주변 일대를 계속해서 부수고 파괴했다.
그 모습은 묵묵하고 조용했지만, 마치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흑뢰군주는 죽었다. 그리고 그녀를 이용하려고 하던 군단의 대장군도 죽었다.
그들의 삶은 여기서 종지부를 맞이했다. 그 이야기가 다시는 이용될 일은 없어야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으니까.
그래서 유현은 전부 부쉈다. 악몽을 부수고 또 부수며 잔해를 쌓았다.
이제 이곳은 금역이 되리라. 한때 세상을 악몽으로 뒤엎었던 악녀와 그런 악녀를 뒤에서 종용하던 괴물이 존재했던 성채는 누구의 입에도 회자되지 않을 거다.
그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이곳이야말로 누구도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이야기의 무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