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66화
싸움은 끝났다.
유현은 쓰러진 강혜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초점이 제대로 접히지 않는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유현은 그녀의 바로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강혜림은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반겨 줬다.
“아, 유현 씨. 돌아오셨군요.”
“…….”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예요? 저와 만나서 반갑지 않으신 거예요?”
“아니요.”
유현은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이며 답했다.
“반갑습니다. 너무나도.”
“그렇죠?”
강혜림은 손을 들어 올리며 유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유현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닿은 강혜림의 손을 조심히 쥐었다.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온기가 조금씩이지만 빠져나가고 있었다.
싸울 때는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았던 감정의 격류가,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둑이 무너지듯 터진다.
“혜림 씨. 저는…….”
“쉿.”
유현의 뺨을 어루만지던 강혜림의 손끝이 유현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지금은 그저, 이렇게 있고 싶어요.”
비스듬히 베인 그녀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피가 아니라 텍스트였다. 마치 텔러의 그것처럼, 강혜림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텍스트가 천천히 허공으로 흩어졌다.
광증에서 벗어난 그녀는 다시 예전의 그녀로 되돌아왔다.
되돌아왔지만, 그녀의 생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가면을 벗은 유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강혜림은 그 모습을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울지 마세요. 유현 씨.”
“아닙니다. 저는, 저는 단지…….”
“유현 씨는 그저, 본인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그래요. 잘못한 것은…… 저겠죠.”
고개를 돌린 강혜림의 시선이, 머나먼 평야의 너머 해방군을 향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미쳐 버린 채 사람들을 죽였어요. 어쩌면 이건, 제게 참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모르겠네요. 검후로서가 아닌, 악녀 마천후로서…… 이렇게 죽는 거니까요.”
“…….”
유현은 강혜림의 말에 그렇다 할 반박도 위로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저지른 죄를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새기며, 결국 그녀를 검을 베서 이 꼴로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약속을 했는데.
계속 함께 있기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먼저 어긴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죽고 싶은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애써 웃으면서 강한 척을 하고 있다고 해도, 죽음을 앞둔 지금 무엇보다도 마음이 심란한 것은 그녀일 텐데.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는데, 그것이 이렇게나 지키기 힘든 각오였다는 것이 슬펐다.
“저를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전부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조금만 더 생각을 했다면. 아니면, 조금만 더 강했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전부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다. 제 잘못입니다. 혜림 씨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다 결국 타락해 버린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위로의 말이란 이렇게나 단순하고 조잡한 것이라서.
유현은 자신에게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 배려를 모를 리가 없는 강혜림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유현 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는걸요.”
강혜림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초월자의 강력한 생명력이 결국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유현 씨. 잠시, 제가 몸을 일으키도록 도와주시겠어요?”
“…….”
“부탁이에요.”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등을 받쳐 주며 상반신을 일으키게 도와줬다.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받쳐 주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유현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강혜림은 이 상황이 꿈에 그리던 모습이던 것처럼 기뻐했다.
“기뻐요.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말, 유현 씨를 다시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네…… 저도, 혜림 씨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강혜림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저, 웃기죠? 지금까지 이렇게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행복하다니. 정말 몹쓸 여자죠? 웃으면 안 되는데. 행복하면 안 되는데.”
“아니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혜림 씨는…… 이미, 죗값을 치렀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
“유현 씨.”
“네.”
“잠시 얼굴 좀 가까이 가져와 주실래요?”
“…….”
숨결이 가까이 느껴질 정도로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강혜림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유현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유현 씨.”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현을 보며 강혜림은 갓 봉오리를 피워 내는 화사한 꽃처럼 웃었다.
“좋아해요.”
* * *
하늘의 먹구름이 걷혔다.
그 틈새를 비집고 지금까지 흑뢰궁의 마력에 가려진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중 일부는 강혜림을 껴안고 있는 유현에게도 내리쬈다.
강혜림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더는 숨을 쉬지 않았다. 유현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시체를 붙들었다.
멀리서 싸움이 끝난 걸 확인한 해방군이 천천히 접근해 왔다.
흑뢰궁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군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끝났지만, 그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로를 죽여. 복수를 이행해. 가족의 원수를 갚아. 살기 위해 죽여.
“그만해.”
유현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싸우라고.”
하지만, 서로를 확인한 해방군과 군단은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흑뢰군주가, 마천후 강혜림이 죽어도…… 결국 이 해묵은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다시 싸움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결국 이런 갈등은, 어느 한쪽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세상에서 지워질 수 없었다.
“그만해───!!!”
유현의 고함과 함께 주위로 강한 힘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흑뢰궁 바깥이 도열하던 군단도, 흑뢰궁으로 몰려가려던 해방군도 공포에 질려 자리에 얼어붙었다.
유현은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 이상, 그녀와 나를 욕보이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유현은 죽은 강혜림의 시체를 붙든 채 계속 가만히 자리에 있었다.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눈치를 볼 때, 갑자기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그러면 안 되지.]
동시에 먹구름의 사이로 내려오던 햇빛이 뚝 끊겼다.
[모처럼 내가 이렇게까지 판을 깔았는데, 여기서 멈추면 재미가 없잖아?]
유현은 그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평온하게 눈을 감은 강혜림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시체는 상처 부위부터 해서 천천히 텍스트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으니까.
[무시하는 거야? 세상에, 내가 이렇게 찬밥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
[아니면, 죽은 시체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뭐라도 달라질 거 같아? 웃기는 이야기야. 죽인 건 너잖아? 그녀는 마지막에 검을 휘두르는 손에 힘을 뺏는데, 너는 그러지 않았잖아. 이럴 줄 모르고 그런 거야?]
귓가에 울리지만,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목소리에 유현은 자신의 정신이 점점 더 아래로 잠겨 가는 것 같았다.
[힘들지 않아? 괴롭지 않아? 내가 도와줄 수 있어.]
“…….”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잊고, 네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도 있어. 그곳에서 너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네가 바라는 이상향을 즐기면 되는 거야.]
목소리와 함께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먹구름의 틈새로 검은 촉수 같은 것이 천천히 내려왔다.
[나와 함께하자. 그렇게 하면 너는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영혼을 넘어서 그 본질마저 타락시키는 유혹.
유현은 그 말에 끝까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 마라 파피야스는 그 침묵을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촉수를 길게 뻗어 유현을 향했다.
세상을 타락시키는 악동은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렸다.
검후를 마천후로 타락시키고,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이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무대를 준비해 왔다.
자신을 방해할 석가모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자신이 타락시키지 못한 유일한 존재. 자신의 흠이자 역린. 그자가 사라지면서 마라 파피야스는 통쾌함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유현을 노렸다. 그 선각자가 죽어 가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를, 자신의 권속으로 삼아 타락시키고자 했다.
[전부, 끝이다.]
[누구 마음대로?]
[뭐?]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황금빛 기둥이 떨어졌다.
쿠웅! 빛나는 기둥은 마라 파피야스가 뻗은 모든 촉수를 찢어발기며 지면에 박혔다.
그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봉이었다. 마라 파피야스는 그 무기의 주인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제천대성!!!]
동시에 거대한 황금빛 하나가 떨어져 내리며 자신이 투척한 여의금고봉 옆에 착지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황금갑옷을 입은 돌원숭이. 제천대성 손오공은 먹구름 너머에 숨어 있는 마라를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육천의 악동, 아주 제멋대로 설쳤더군.]
[손오공. 네가 왜 나를 방해하는 거지?]
[왜냐고?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너야말로 석가모니를 욕보이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 같은데,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는군.]
[이제 죽어 버린 그 땡중 녀석은 너도 미워하지 않았나? 아직도 오행산의 아래에 깔리던 시절을 잊은 거냐!]
[이봐. 그 이후의 내 이야기를 잊었어?]
손오공의 털이 바람을 맞아 강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일렁였다.
그의 덩치가 산처럼 거대해지며 지면에 박힌 거대한 여의금고봉을 뽑아 들었다.
사나운 눈동자의 중심에 황금빛 섬광이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삼장과 함께 여행을 끝낸 내가 투전승불의 자리에 올랐다는 걸.]
제천대성. 아니, 투전승불 손오공은 마라 파피야스를 향해 여의봉을 겨누었다.
[그 더러운 입으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고 꺼져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네놈을 흠씬 때려눕혀 줄 테니까.]
[감당할 수 있겠어?]
[감당할 수 없었으면 처음부터 이러지도 않았지. 잊었나? 나 돌원숭이야. 네 녀석이 악동이라 불릴 때부터 천계삼십육천의 악몽으로 군림한 위대한 존재.]
[이젠 사라진 석가의 명령을 따르는 주제에!]
[말 똑바로 하지. 난 명령이 아니라 그저 부탁을 받았을 뿐이야.]
그래, 부탁이었다.
손오공은 아직도 5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 갑자기 찾아온 석가모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한 부탁을.
거대한 손오공의 손가락이 유현을 가리켰다.
[마라 파피야스. 네놈은 절대로 이 녀석을 건드릴 수 없다.]
[……후회하게 될 거다.]
마라 파피야스는 으르렁거리듯 경고를 날리고 그대로 사라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군단과 해방군은 그 광경을 멍하니 구경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존재들이 연달아 나타나니 그들의 머리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귀찮은 녀석도 쫓아냈고, 남은 건…….]
제천대성은 유현을 내려다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직도 강혜림의 시체를 붙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이미 마음이 망가진 사람의 그것이었으니까.
[애송아. 네가 아무리 그렇게 붙잡고 있어도, 이미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가 초월자였다 해도 마찬가지. 시체가 바로 사라지지 않은 것은 그녀의 이야기가 방대했기 때문이지, 이미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주워 담을 수 없어.]
“…….”
[쯧. 그분은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죽어 가면서까지 이 녀석을 도와달라고 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군.]
“…….”
[어이. 내 말 들리기는 하나?]
손오공이 유현에게 계속 말을 걸 때, 유현은 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것을 듣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강혜림을 베는 순간, 이 세상은 유현에게 또 하나의 업적을 부여했다.
악명 높은 흑뢰군주를 쓰러뜨리고, 그 밑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 구원자.
그 이야기가 유현에게 스며들었다.
동시에 초월자의 수준을 넘어서 아슬아슬하게 경계에 걸쳐져 있던 유현은.
벽 너머에 도달하게 됐다.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들고, 그 위에 무수한 글자를 지닌 거대한 책이 펼쳐진다.
그 속에서 유현은 홀로 서 있었다.
전생에서 보았던 광경. 이야기의 지평선에 도달한 유현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는 무엇이냐.]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이건 기회였다. 지금의 그는 전생에 억지로 만들어지는 허접한 성령의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스스로 업과 격을 쌓고 벽을 넘어 하나의 좌(座)에 도달하게 됐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원하는 일을 더 쉽게 달성할 수도 있었다.
다시 얻을 수 있는 별의 자리를 앞두고.
유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인간이야.”
인간 강유현.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했다.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결국에 절망하면서도 그의 눈은 하늘을 올려다봤었다.
[진심인가?]
“그래.”
발은 땅을 딛고 있었지만, 눈은 언제나 하늘의 별을 향했다.
이 손을 능히 뻗어 별을 쥐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그는 별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으로서, 모두에게 멸시받는 존재로서 별을 쥐고 우뚝 서서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을 뿐이다.
목소리는 이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전처럼 대답은 충분히 들었다며 다시 유현을 원래 세계로 보냈다.
시야가 밝아지며 현실이 보인다.
이야기의 지평선에서 돌아온 유현은 서서히 텍스트가 되어 흩어지는 강혜림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이윽고 강혜림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을 향했다.
타락해서 검게 물들었던 그녀의 책은 어느덧 다시 예전의 빛을 되찾았다. 금색이 아닌, 찬란한 무지갯빛을. 하지만 이제 그 빛마저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죽음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유현은 오엘로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은 아직 파편의 제대로 된 힘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코덱스란 곧 세계이며, 그 코덱스의 파편은 결국 세상의 일부다.
세상의 일부를 지녔으면서 고작 다른 사람의 책밖에 볼 수 없는 것은, 그의 생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젠 다르다.
유현이 손을 뻗어 강혜림의 책을 쥐었다. 빛을 잃고 사라지려는 책의 감촉을 뚜렷하게 느끼며 유현은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네가 정말로 나를 선택했다면,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내 명령을 따라라.’
그것에 호응을 하듯 손에 쥔 강혜림의 책이 점점 더 밝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던, 오로지 유현에게만 보였던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기 시작했다.
“저건, 책?”
“갑자기 어디서 저런걸?”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해방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것은 제천대성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강렬한 빛을 내는 책은 이윽고 무수한 가루로 변했다.
아니, 그것은 가루가 아니었다.
강혜림의 책을 구성하던 그것은 텍스트였다. 이 세상의 근간이자,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역사의 이야기.
그것이 눈을 감은 강혜림의 상처에 스며들었다.
손오공은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상처가, 낫고 있어?’
그의 화안금정으로도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미처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혼성계에서 죽어 버린 존재는 어떤 텍스트를 이어 붙여도 절대로 재생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모습은, 유현이 보여 주는 이 기묘한 광경은 그런 혼성계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제천대성은 그 순간, 석가모니가 왜 자신에게 유현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현은 무언가 달랐다. 그가 지금까지 만나 온 그 누구보다도 특별했다.
석가모니는, 언제나 홀로 고행의 길을 걷던 그 남자는 여기까지 내다봤던 거란 말인가.
‘하지만, 부족하다.’
강혜림의 상처는 많이 회복됐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를, 초월자가 넘어선 군주라는 존재를 다시 되살리기엔 한 권의 책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것은 유현도 느끼고 있던 바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방도를 찾고자 했다.
‘책이, 이야기가 더 필요해.’
그것도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강혜림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그걸 구하지? 그녀와 관련된 책을, 이런 곳에서 구할 수 있을 리가.
그 순간, 유현은 자신의 품 안이 빛나는 것을 느꼈다.
‘이건?’
품 안에서 꺼내든 그것은, 한때 선각자가 그에게 선물해 줬던 자그마한 연꽃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안에 있던 것일까.
유현의 손에 쥐어진 연꽃은 만개와 동시에 흐트러지더니 꽃잎이 강혜림의 몸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유현과 강혜림의 머리 위에 빛의 문이 열렸다.
축복하듯 내려오는 빛의 사이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것은…… 유현에게도 낯이 익은 제목의 책이었다.
[검후전기]
유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그가 강혜림을 만나고 처음으로 텔러로서 만들어 낸 최초의 이야기.
‘아, 그랬구나.’
유현은 이 빛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떨어지는 책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서재였다.
“혜림 씨가…… 내 서재를 가지고 있었어.”
선각자가 남긴 연꽃이 유현의 강렬한 염원에 반응해 그녀가 지니고 있던 서재를 연 것이다.
활짝 열린 서재의 문 사이로 떨어지는 책은 지금까지 유현이 강혜림과 함께해 온 이야기가 담긴 것들.
그것이 망막에 맺힐 때마다 유현의 뇌리로 강혜림과 함께했던 광경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과자를 사 먹다가 걸려서 혼이 나는 그녀의 모습.
위험을 무릅쓰고 환상체와 싸워 승리를 쟁취한 모습.
자신에게 잘했냐며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던 모습.
그 모든 기억이.
아름다웠던 추억이.
눈처럼, 꽃잎처럼 내렸다.
“아.”
유현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수히 떨어지는 책들이 텍스트로 변해 강혜림의 몸에 스며들었다.
사람들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경건하고 장엄하며 또 아름답기까지 한 그 모습을.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황금빛 책의 틈새에서 강혜림을 안아 들고 서 있는 유현의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날.
흑뢰군주의 폭정이 끝나고 그녀의 압제가 먹구름처럼 사라진 날, 혼성계에 새로운 군주가 탄생했다.
현장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가 머릿속으로 같은 이름을 떠올렸다.
[책더미 군주]라는…… 새로운 변화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