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65화
“후우. 일단 어떻게든 피해가 커지는 것만큼은 막아 냈나.”
유영민은 수십 킬로미터 너머 떨어져 있는 멸뢰옥을 깔끔하게 저격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멸뢰옥의 크기가 아무리 100m가 넘는다 하지만, 이 정도 떨어져 있으면 모래알보다 훨씬 더 작게 보이기 마련이다.
그 거리를 가로질러, 유영민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멸뢰옥의 중심을 꿰뚫었다.
멸뢰옥을 없앨 정도의 힘을 이 거리에서 저격을 하며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용병왕이라 불리는 그의 타고난 감과 실력, 스킬의 복합적인 작용 덕분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끝낸 유영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형. 지금은 만날 수 없어서.”
그라고 유현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유현과 만나서도, 우연히 마주쳐서도 안 됐다.
지금은 도와줬지만, 그게 유영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었다.
강혜림의 일은, 안타깝지만 유현의 손에 맡겨야 했다.
“나중에 봐요.”
언젠가 예전처럼 모두 함께 모이는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유영민은 망토를 펄럭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영민이? 근처에 있었나?’
유현은 유영민의 저격이 아주 멀리, 그의 감지할 수 있는 기감의 훨씬 바깥에서 날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없는 5년 동안, 강혜림이 강해진 만큼 유영민 또한 장족의 발전을 이뤄 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후속타는 이어지지 않았다. 방금 그걸로 끝이었던 걸까.
유영민이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보다도 먼저, 유현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지금이 기회야.’
위기의 순간, 의도치 않은 도움 덕분에 강혜림은 지금 빈틈이 크게 드러났다.
그녀가 또다시 무고한 사람들을 노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여야 한다.
쓰읍. 후우.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유현은 의식을 집중했다. 바락바락 악을 지르던 강혜림의 섬뜩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녀의 모습에서, 문득 옛날 순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유현은 이를 악물며 괴로움을 억지로 떨쳐 냈다.
어쩌면.
“그때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미래는 바뀌지 않았을까.
동료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이, 강혜림이 망가지는 일도 없이.
서로 함께, 예전처럼 붙어 다니면서 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을까.
이뤄질 수 없는 머나먼 꿈이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선명하다.
유현은 그 모든 미혹을 끊어 내며 강혜림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 모습을 본 강혜림이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아. 나도 이제 봐주지 않겠어.”
강혜림은 더 이상 번개를 뿜어내지도, 해방군을 노리지도 않았다. 유영민이 방해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힘을 낭비하는 꼴이었으니까.
그 대신 그녀의 주위에 꿈틀거리던 모든 뇌기가 여러 갈래로 압축되더니 각자 검의 형상을 띄었다. 강혜림은 그중 한 자루를 쥐었다.
그녀 또한 손에 칠흑같이 새까만 검을 쥐고 유현을 겨누었다. 나머지 검들은 여전히 그녀 주위에 떠다녔다.
흑뢰군주라는 칭호 이전에 그녀는 마천후였고, 마천후라는 칭호 이전에 그녀는 검후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주력은 언제나 손에 쥔 검이었다.
쿠웅!
강혜림이 지면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맨발이 땅을 박찼다.
그녀의 신형이 검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직후 그녀가 내디딘 지면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다. 말도 안 되는 각력과 그것이 자아내는 추진력, 그 모든 에너지가 검 끝에 모여 유현의 목을 노리듯 폭발했다.
유현은 백련을 비스듬하게 세워 그녀의 검격을 막았다. 콰가가각! 최대한 흘려 냈음에도, 유현의 주위의 대지가 파도처럼 뒤집혔다. 대지가 갈라지고,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초월자를 넘어선 자들의 싸움은 그런 것이었다.
단순히 검을 나누는 것이 아닌, 세상을 뒤흔드는 의지와 의지가 뒤엉키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유현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강혜림을 주시하며 검을 뻗었다.
서로의 검이 충돌한다.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엉키면서 흔들리고, 때로는 찔러 들어간다.
오로지 상대를 벤다는 의지가 충돌하며 허공에 섬뜩한 예광(銳光)을 번뜩였다.
‘무겁다.’
1초에 백번이 넘는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유현은 자신의 팔과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궁극이라 할 수 있는 다윈의 육체를 지녔음에도 몸이 삐걱거렸다. 강혜림은 그만큼 강했다.
단 일 검. 그녀가 검후로서 제대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한 합만 교환했을 뿐인데도 팔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녀가 이렇게나 훌륭하게 성장을 했는데, 그 검을 겨누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마주 본다.’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미혹에 빠져 타락하고, 영락한 그녀의 모습일지라도.
그 모습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확실하게 응시한다.
도망치지 않고 등을 돌리지 않은 채.
자리에 우뚝 서서 그녀에게 검을 겨눈다.
그러기로 다짐했으니까.
그러니 검을 휘둘러라. 마음을 다잡고 발을 내딛어라.
카앙!
검은 도신과 새하얀 검신이 서로 뒤엉키며 충돌한다. 둘의 검격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대지가 잘려 나갔다.
몸을 뒤흔드는 강렬한 충돌 속에서 유현은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발.
그가 내디뎌야 할 걸음은 많았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콰앙! 콰드득!
의념과 의념이 충돌했을 때, 이번에 밀려난 것은 강혜림이었다. 그녀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가며 유현에게서 멀어졌다.
허공에서 자세를 잡은 강혜림이 지면에 착지했다. 그녀의 두 다리가 주르륵 밀려났기에 강혜림은 칼을 들어 지면이 박아 넣음으로써 더 멀리까지 튕겨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익!”
강혜림은 자신이 밀려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눈을 부릅뜨며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유현에게 뻗었다.
동시에 그녀의 주위에 도열해 있던 무수한 검은 검들이 유현을 향해 소용돌이를 그리며 화살처럼 쏘아졌다.
하나하나가 그녀의 뇌기를 한계까지 압축한 필살의 일격들. 검은 짐승들이 유현을 향해 포악한 발톱을 들이밀었다.
나선흑검(螺旋黑劍).
죽음을 형상화한 광경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유현의 마음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포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나선흑검을 응시했다.
‘보인다.’
공간을 빽빽하게 채우며 날아오는 나선흑검은 도저히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자그마한 개미 한 마리라 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가루처럼 분쇄시킬 수 있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유현은 아주 작고 미약하지만, 사방에서 조여 오는 그 공격의 틈새를 파고들 수 있는 한 줄기의 길을 보았다.
유현의 눈이 선을 쫓고 발이 그 위를 밟았다.
동시에 유현의 몸이 그 거대한 폭풍에 저항하듯이 앞을 향했다.
카가가가가각!
일부는 튕겨 내고, 또 일부는 흘려 내고 일부는 피한다.
하지만, 검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다 튕겨 낼 수 없었다.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러지 못하는 경우에는 몸으로 때운다. 급소만 아니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촤악!
의념을 두른 호신강기를 뚫고 검이 어깨를 가른다. 일부는 팔뚝을 스치고, 또 어떤 것은 허벅지를 벤다.
콰득!
가면의 한쪽 뿔이 검에 잘려 나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맨몸으로 거대한 파도와 맞서는 것 같은 기분. 눈을 뜨고 마주 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휘몰아치는 폭풍의 속에서, 유현은 중심을 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집중력을 조금만 잃어도 그대로 이 거대한 격류에 휩쓸릴 것이다.
전신에 충격과 통증이 내달리지만, 그래도 유현은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과거의 추억이 아른아른 보일 것만 같음에도 그는 눈을 감지 않고 현실을 직시했다.
“죽어! 제발 좀 죽으란 말이야!”
강혜림이 반쯤 공포가 섞인 비명을 지르며 검을 쏘아 냈다. 무수한 공격을 견디면서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유현의 모습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대체, 왜?
왜 쓰러지지 않는 건데.
저런 쓰레기들이 뭐가 좋다고, 대체 무슨 대의를 품었다고 나에게 이렇게까지 맞서는 건데.
대답해.
대답해 봐요.
“유현 씨!”
본능적으로 나온 말을 뒤늦게 깨달은 강혜림은 스스로 당황했다.
“어? 나, 왜…… 가짜에게 유현 씨라고…….”
그 마음이 이윽고 빈틈을 만들었다. 유현은 휘몰아치는 나선검진의 틈새를 뚫고 강혜림의 앞에 섰다.
강혜림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유현을 응시했다.
“나, 나는…….”
“칼 들어.”
유현은 강혜림이 무언가 말하려는 것을 차갑게 끊어 냈다.
“아직도 되지도 않는 감정에 호소하려는 거냐? 흑뢰군주.”
“……!”
강혜림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아아아아아!! 아니야! 네가, 네가 진짜 유현 씨일 리가 없어!”
허공에 무수한 검은 선들이 그어진다. 유현은 그것을 피하고 막고, 흘려 내며 그녀와의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입으로는 현실을 부정하며 손은 현실을 끊어 내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현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모습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또 그리워하던 그 남자의 그것과 똑같았으니까.
“나는……!”
유현의 손이 뻗어져 온다. 강혜림은 그것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발이 유현의 발목을 후려 찼다. 유현은 몸이 회전하는 와중에 허공에서 균형을 잡으며 강혜림의 관자놀이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강혜림이 상체를 숙이며 공격을 피하고 칼을 찔렀다.
검만 교차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먹과 주먹, 발과 발이 서로 충돌한다.
가까이 붙은 두 사람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변했다.
“나는 단지……!”
강혜림의 눈에 과거의 광경이 담겼다.
함께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던 광경이.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네자 유현이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헝클던 광경이.
자신을 향해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주는 그의 모습이.
눈물과 함께 떨어졌다.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꿈을 꿨다. 그 남자와 함께 웃고 있는 자신이 행복해 하는 꿈을.
그 꿈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꿈에서 깬 현실은 너무나도 삭막하고 외로웠으니까.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건데!”
“적어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았어야지.”
야속할 정도로 싸늘한 유현의 목소리에 강혜림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절절히 전해졌다.
있잖아요. 유현 씨.
우리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유현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반파된 아포리아의 가면 사이로, 유현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강혜림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담긴 흔들림 없는 의지가, 그녀가 알던 그 남자와 똑같아서.
강혜림은 입술을 깨물며 손에 쥔 검에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왜!!!”
원통함과 분노를 담아 검을 쥔다.
떠났으면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지금까지 나를 내버려 뒀으면서 왜 이제야 찾아오는 건데? 왜 더 빨리 만나러 오지 않은 건데?
“대체, 왜!!!”
나한테 잘해 주지 말았어야지.
손을 내밀어 주지 말았어야지.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지.
-저는, 적어도 당신을 버리거나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때 약속했잖아. 떠나지 않는다고,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왜 내게 검을 휘두르는 건데?
뭐라 대답을 해 봐요.
변명이라도 좋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요.
“강유혀어어어언!!!”
그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무수히 스쳐 지나간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각자 자세를 취했다.
이번 한 번의 일격으로 모든 것을 끝낼 생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서로의 검 끝에 맺힌 기운이 한계까지 압축되는 순간, 하늘을 향해 쳐든 두 사람의 검이 이윽고 아래로 향한다.
건곤일척의 싸움.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강혜림은 마지막까지 유현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충격으로 가면이 부서지고 상처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이 남자의 시선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랬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이 남자가 흔들리는 일은 없겠지.
그 모습은,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던 것이라서.
강혜림은 힘없는 미소를 흘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촤악!
세상을 반으로 가를듯한 서로의 검격이 교차하듯 스쳐 지나간다.
유현의 일격은 정확히 강혜림을 사선으로 베었다.
하지만 그녀, 강혜림의 일격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유현에게서 벗어나 그 너머의 풍경을 베었다.
쿨럭.
강혜림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피를 토했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격통이 내달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서서히 뒤로 기운다.
뒤늦게 눈을 크게 뜨는 유현의 모습이 보인다.
‘아.’
강혜림은 쓰러지는 와중에 문득 옛날에 받았던 질문을 떠올렸다.
-선택해라.
-세상에 베일 것인가.
-세상을 벨 것인가.
‘나는…….’
그녀는 세상을 베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베고 죽여서, 더는 자신을 죽일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베어서라도, 그것이 설사 세상이라 하더라도 전부 베어서 자신이 오롯이 설 거라고 다짐했었다.
‘전부…… 착각이었구나.’
그녀는 세상을 베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유현을 벨 수 없었다.
세상을 벨 것인가. 세상에 베일 것인가.
단 두 갈래의 길에서 그녀가 고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세상에 베였다.
그게 전부였다.
‘세상에 베인다는 것이, 이렇게나 슬프고, 또 이렇게나 무겁다는 걸.’
그동안 멀게 느껴졌던 세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여태껏 멸시했던 세상이 이렇게나 거대하면서 또 고요하다는 것을.
밀려오는 졸음 속에서 강혜림은 처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