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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63화 (363/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63화

“당신은……정말로 가혹한 사람이로군요.”

“내가 가혹한 걸까, 아니면 이 현실이 가혹한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유현은 굳이 가짜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각오를 끝마친 이상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확고하시다니 어쩔 수 없죠.”

“막지 않는 건가?”

“저는 고작 저 녀석들의 수준으로 당신을 막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고집을 부려 가면서 명령을 내려 봤자 이쪽만 피해를 입을 뿐. 그럴수록 반란군들은 더욱 격렬하게 움직일 거고요.”

“현명한 선택이야.”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는 유현을 향해, 가짜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노려봤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습니다.”

“감내하던 바였잖아. 너도, 나도.”

“그렇죠.”

그 사실을 견디기 힘든 것인지 가짜는 이를 으득 갈며 주먹을 쥐었다.

고작 말로 통할 상대였으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본인이 나섰지만, 결국 이 꼴이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강혜림에겐 상처뿐인 결말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는 도플갱어입니다.”

그는 다짜고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유현은 놀라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려 줬다.

“처음에 저는 아무런 형상도 없었습니다. 그저 검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 저를 주워 준 것이, 지금의 흑뢰군주님인 강혜림 아가씨였습니다. 동료와 싸우고 그들이 등을 돌렸을 때, 그녀의 곁에는 저밖에 없었죠. 그녀가 저를 주운 것은, 아마 애완동물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을 겁니다. 심심풀이. 딱 그게 전부였겠죠.”

“…….”

“그때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당신의 모습을 한 가짜가 나타났죠.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어디서 뭘 주워들었는지, 대충 이야기를 주워 담아 모습을 흉내 내며 그녀를 이용하려고 들었죠. 모습이 없던 저는 그 광경을 전부 지켜봤습니다.”

유현이 모르는 지난 5년 사이 강혜림이 겪었던 이야기가, 도플갱어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가씨의 힘을 이용해서 제 잇속을 챙기려고 했었죠. 문제는 아가씨였습니다. 갈 곳 없이 정신이 한계까지 몰린 그녀는 그런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했습니다. 그 쓰레기 같은 녀석을 극진히 모시려고 했죠.”

강혜림은 상대가 진짜이고 가짜이고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눈앞의 유현을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찢어질 것 같은 마음이 진정됐을 테니까.

하지만, 도플갱어는 그 광경을 잠자코 볼 수 없었다.

“그 쓰레기 녀석은 결국 선을 넘으려고 했습니다. 그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죠. 그래서 제가 나섰습니다. 당신의 모습으로 변해, 그 쓰레기를 죽였습니다.”

도플갱어는 아직도 그때 강혜림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공허한 눈동자로 피투성이가 된 쓰레기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윽고 자신을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반겨 줬으니까.

도플갱어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는 걸.

그때부터였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자신이 강유현이 되어 주기로.

“정신이 망가지고 광증에 미쳐 버린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벅찼으니까요. 결국,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가짜로서, 진짜가 되지 못한 저로서, 그저 대역이라도 좋으니 최소한 그녀가 괴롭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도플갱어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을 노려봤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저 이야기로 만들어진, 유현의 모습을 흉내 내는 가짜일 뿐일지라도.

그녀를 향한 마음만큼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저는 당신이 증오스럽습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신이 차라리 죽길 바랐습니다. 이대로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

“그녀를 그렇게 만든 당신을, 그녀에게 상처를 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유현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눈앞의 자신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그들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됐다. 같은 모습을 했지만, 누구보다도 다른 길을 향하며 서로 평행선을 달렸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현이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가.”

“…….”

“가서 흑뢰군주에게 전해.”

유현은 지난 세월 동안 스러져야 할 것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야기 속에서 고통받는 존재일지라도 그들을 향한 구원의 길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어쩌면 자신은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지낸 것이 아닐까.

“내가…… 간다고.”

세상은 언제나 해피엔딩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언제까지고 모든 일이 잘 풀릴 수 없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당신은…….”

도플갱어는 유현의 얼굴을 보더니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유현은 지금 자신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용기가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도플갱어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숲 너머로 사라졌다.

무수히 느껴지던 군단의 기척이 삽시간에 멀어졌다.

유현은 그들이 완전히 떠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뭐가?]

“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그것은 자신에게 한탄하듯 하는 말일까. 아니면, 공감을 바라고 하는 말일까.

백련은 알 수 없었다.

“끔찍한 세상 속에서 삶을 관철하다 죽고, 다시 시작한 세상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지. 분명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는 받았다고 생각해. 근데 결국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순간, 오만 생각이 다 들더라.”

[유현아…….]

“회귀를 하게 된 것도 사실 내 의지가 아니기는 했어. 분명 이유가 있었지. 그래. 문득 궁금해졌어. 만약 이 모든 일을 누군가가 주도한 거라면, 그리고 그자가 지금 이 상황까지 전부 안배한 거라면. 그 뒷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될지. 내 여정에 끝이 있다면, 그곳엔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유현은 스스로 말해 놓고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과 그 결과로 인해 발생한 일들이,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한 결말이라니.

그래도 궁금하다고 생각한 것은 진심이었다.

회귀 전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이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이 마주한 이 모든 사건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게 무엇이라 하더라도, 분명 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거야.]

“……그런가.”

위로의 말을 꺼냈지만, 백련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지금 유현에게 한 말은 단지 순간의 기분만 낫게 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현실은 말만으로는 절대 바뀌지 않으니까.

* * *

자신의 모습을 취한 도플갱어를 만난 이후로.

유현은 흑뢰궁으로 향하는 동안 그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다.

덕분에 3번째 도시를 넘어 흑뢰궁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에는 검은 먹물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 틈새에 우르릉 소리와 함께 검은 번개가 간혹 꼬리를 남기며 내려쳤다.

그 모습이 검은 바다 위를 누비는 용처럼 보였다.

“저곳이…… 흑뢰궁.”

광활한 평야 위로 거대한 구조물이 눈에 확 띄었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흑뢰궁의 모습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듯 뻗어 있는 검은 왕관과 같은 첨탑들.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은 거대한 성벽이었고, 성벽의 위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즐비했다.

누군가 본다면 악취미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디자인이었지만, 유현에게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3중 성벽과 똑같이 생겼어.’

그뿐만이 아니다. 성벽에 솟아난 가시는 창이 아니라 뾰족한 작살이었다. 그 외에 다른 온갖 구조물들도 처음 보는 것이 아닌, 전부 유현의 기억의 서랍장 속에 담겨 있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징으로 우뚝 선 저 흑뢰궁은, 전부 유현을 향한 강혜림의 추억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었다.

아니, 저것을 과연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악몽과 한데 섞여서 뒤틀려 버린 저것은 강혜림이 미쳐 버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줬다.

유현은 마음을 다잡고 흑뢰궁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도 군단은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서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와아아아아!!!

유현이 흑뢰궁의 거대한 성문 앞 1km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거대한 함성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해방군들?”

처음에는 후방에서 군단이 기습을 가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통일되지 못한 복장과 무기들, 그리고 흑뢰궁을 향해 자신들이 나타났음을 세상에 알리기라도 하듯 떠나가라 내지르는 함성까지.

그들은 유현이 지금까지 지나왔던 도시에서 일어난 해방군들이었다.

“……대체, 어느새 저 정도 전력을 모은 거지?”

해방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유현은 자신이 나생문을 열고 흑검단을 쓰러뜨린 순간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으니까.

그걸 알기에 혼자서라도 빠르게 일을 끝내고자 최대한 신속하게 흑뢰궁으로 왔는데, 해방군의 움직임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구세주께서 저 앞에 계신다!”

“그분과 함께하자! 흑뢰군주를 무찌르자!”

그들은 유현을 알아보고는 더욱 기뻐하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 자리에 모인 해방군의 숫자만 무려 3만이 넘었다.

그중에서 절반 이상은 정말 순수하게 구세주인 유현을 따르기 위해 모인, 기존 해방군의 선전에 휩쓸린 사람들이었다.

정작 유현은 그들을 보자 입술이 바짝 탔다.

‘안 돼.’

유현의 시선이 흑뢰궁을 향했다.

흑뢰궁의 중심, 가장 높게 솟은 뾰족한 첨탑 꼭대기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유현이 눈에 힘을 줘 그 정체를 살피는 것보다 먼저, 그림자의 신형이 하늘로 높게 치솟아 오르며 먹구름에 잠겼다.

유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먹구름 속에서 몰아치는 검은 번개가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렬해졌다.

꽈르르릉!

흑뢰궁의 위에서 몰아치던 벽력성이 이윽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자 중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피해!”

유현의 다급한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쩌억 하고 먹구름이 열렸다.

번쩍!

콰르르르릉!

가장 먼저 눈을 뜨기 힘든 거대한 섬광이 폭탄처럼 터졌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은 무수한 검은 줄기, 흑뢰였다.

빛과 함께 번개가 몰아치고, 그 뒤를 이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천둥이 휩쓸었다.

흑뢰궁을 향해 돌진하던 해방군은 비명도 내지 못하고 쓸려 나갔다.

누군가는 비명을 내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단말마는 누구도 들어주는 이 없이 검은 번개가 공기를 찢으며 내지르는 귀성에 묻혔다.

먹구름과 지상을 잇는 무수한 검은 줄기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유현은 눈을 부릅뜬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윽고 무수히 떨어지던 흑뢰가 멈췄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검게 타오르는 대지뿐이었다.

휩쓸린 사람들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 말도 안 돼.”

“단 일격에…… 이 정도의 위력이라고?”

운이 좋아 살아남은 해방군은 그 대참사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3만이 넘던 해방군 중, 방금 그 번개의 폭풍에 휩쓸려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1만이 넘었다.

부상자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해방군의 전체 인원 중 사상자가 절반 이상이나 났다.

그 믿기지 않는 현실에 사람들은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어리석었어.”

살아남은 누군가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작 3만 명 따위로, 군주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이 정도 숫자라면 그래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냥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나름 이 중에서 강한 사람들도 더러 섞여 있었기 때문에 충분하고도 남을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때 하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레들이 많이도 모였네요.”

갈라진 먹구름 틈새에서 한 사람이 공중에 뜬 채 천천히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지만, 그 얼굴에 새겨진 미소는 너무나도 섬뜩하다.

노출도가 심한 검은 드레스와 흑단 같은 머리카락, 그리고 주위에 뱀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뇌기까지.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것은, 검에 물든 이카로스의 날개였다.

마천후 강혜림.

해방군에게 공포의 상징인 그녀가 폐허가 된 주위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모였다고 해서 감히 군주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꺄하하하하!

천둥을 닮은 웃음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강혜림은 미친 듯이 웃으며 자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귀여워라.”

그 고혹적인 미소에 해방군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유현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눈앞의 현실은 그가 지금까지 상상만 하던 이미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알던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라졌다.

“응?”

강혜림 또한 시선을 느꼈는지 유현을 바라봤다.

“아, 당신이었군요.”

강혜림은 유현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감히 유현 씨를 흉내 내는, 가짜가…….”

그것은 유현이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강혜림의 새하얀 손끝이 유현을 향했다.

“죽으세요.”

꽈르릉! 먹구름을 뚫고 검은 번개가 유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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