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54화
불길은 마을 전부를 태우지 않았다. 그 화마가 구석까지 미치기 전 유현이 불길을 모조리 끈 덕분에, 마을의 피해는 기적적으로 절반 아래에 그쳤다.
토르보 마을의 최연장자, 다른 사람들의 입에 촌장이라 오르내리는 사람의 집 또한 그중 하나였다.
“여, 여기 마실 거 있습니다.”
촌장은 떨리는 손으로 유현에게 물을 내왔다. 그는 시종일관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남자가 순식간에 흑뢰군주의 휘하 군단의 사병 수백을 쓸어 버리는 것을 봤는데,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촌장은 마음 같아서라도 유현을 마을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에겐 그럴 힘이 없었다.
게다가 유현은 마을의 은인이었다. 그가 어떤 모습을 하건, 어떤 힘을 지니건 목숨을 빚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늑대 무리가 사라지고, 호랑이가 들어와도 그들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제가 안 그래도 궁금한 것이 아주 많습니다.”
유현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여성을 보며 방긋 웃었다.
지미의 친누나, 케이트는 그런 유현의 미소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군단의 사병을 휩쓸 때만 해도 이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처럼 보였는데, 지금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예의 바른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것이 이 남자의 본모습일까 궁금해하면서도 케이트는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래서, 저에게 뭐가 궁금하신 거죠?”
케이트는 촌장에게 여긴 자신이 맡을 테니, 마음 졸이지 말고 자리를 떠나라고 눈짓을 주며 말했다.
촌장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결국 방 안에 남은 것은 유현과 케이트, 그리고 지미뿐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이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거든요.”
“지난 5년이라면…… 대폭발 이후로군요. 갑자기 그런 게 왜 궁금하신 거죠? 그 정도 실력을 지니셨으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인데.”
“오랫동안 자다가 깨어났거든요. 알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있고, 주변 풍경도 다르고, 주변 상식까지 모조리 바뀌었으니까요. 적잖게 당황하던 차에 여기 있는 지미를 만나게 된 거고요. 충분한 대답이 됐나요?”
“……네. 그래서 정확히 뭐가 궁금하신 건데요?”
“전부 다.”
“네? 전부 다요?”
“지미에게 대략적인 전말은 들었지만, 아직 세세한 부분에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거든요. 흑뢰군주는 또 뭐고, 성령들은 어떻게 됐고, 텔러들은 어디로 갔는지. 전부 다요.”
“알겠어요.”
케이트는 유현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전부 말해 줬다.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대폭발 이후로 지구는 완전하게 혼성계에 소속됐어요. 그 때문에 사상세계는 주변과 동화되어 이제 세상의 일부로 변했고, 지금까지 지구에 돌아다니던 텔러들은 더는 지구에서 시화를 할 수 없게 됐죠.”
“더 이상 사업장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군요.”
“맞아요. 지구는 이제 하계가 아니게 됐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완전한 상계에 소속된 것도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서 성령들의 접촉이 훨씬 더 원활하게 된 것은 사실이죠. 직접 계약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니까요.”
직접 계약.
지구가 완전히 혼성계에 접어들게 되면서 성령들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눈독 들이던 컬렉터들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기존에 포인트만, 그것도 텔러를 통해서 보내던 간접 후원은 대폭발 이후로 사라졌다.
그 대신 힘과 이야기, 온갖 도구들을 전해주는 직접 계약이 성행했고. 성령들은 자신들의 권속을 늘려나갔다.
“물론. 성령들의 눈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건 없었죠.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말로란 언제나 처참한 법이니까요.”
기존에 각성하지 못한 일반 사람들도 각성하게 됐지만, 모두가 성령의 선택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재능의 차이는 존재했다.
성령의 권속이 된 자들은 순식간에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갔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아래에 처박혔다.
직접 계약이 성행하게 된 이후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의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벌어졌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런 권속의 밑에 빌붙었다. 군주와 군단의 관계란 으레 그런 것이었다.
“이 마을은 그런 선택을 받지 못한 약자들이 변방에 모여서 만든 피난처 같은 곳이에요.”
“그런데, 군주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고요.”
“그럴 수밖에 없죠. 대성군과 일반 성군이 지배하지 않는 곳은 전부 군주의 땅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곳 혼성계에서 주인 없는 땅은 없어요.”
“그런데 반란군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그건 대체 뭡니까.”
케이트는 상당히 곤란한 질문임에도 가감 없이 답했다.
“뭐겠어요. 군주의 수탈이나 압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어난 거죠. 흑뢰군주 휘하 군단은 반란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신들을 해방군이라고 소개하고 있고요.”
“흐음. 그렇군요. 5년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나 변했다라…….”
“뭐 더 궁금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없지는 않죠. 흑뢰군주에 대해서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선에서 전부 설명을 해 주세요.”
“……흑뢰군주. 그러니까 마천후 강혜림은 이 주변 일대의 땅을 지배하는 군주 중 하나에요. 그 힘은 월등히 강해서 같은 군주급 존재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죠. 그런 자가 왜 핵심 구역도 아니고 이런 변방의 외진 곳을 지배하는 건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지만요.”
케이트가 말을 이었다.
“마천후 강혜림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가 멀쩡했던 시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한 컬렉터였다고 해요. 그때의 저는 지구 반대편에 있어서 몰랐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아무튼, 대폭발 이후 초창기에만 해도 마천후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해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리는 소문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바뀌었다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광증에 시달리더니 결국은…….”
케이트는 말을 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됐죠. 이유는 왜 그런지 저도 자세히 몰라요. 그녀와 함께하던 동료들도,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고요.”
“동료들……은 어떻게 됐죠?”
“누구요? 아, 마천후의 옛 동료들이요? 흠. 그 부분은 저도 아는 바가 없어요. 그냥 의견의 차이 때문에 싸우고 나서 흩어졌다는 소문만 무성했죠. 혼성계에서도 나름 멀리 퍼질 정도로 이목을 끄는 집단이었으니 더더욱 그랬을 지도요. 행방은 알 방법이 없어요.”
강혜림 말고도 권지아, 서수민, 유영민, 백서련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싶었지만, 케이트는 그 이상 몰랐다. 오히려 그녀가 여기까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해도 좋았다.
케이트의 말로 짐작건대 대폭발 이후 강혜림은 변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다른 일행들과 마찰을 빚게 됐고, 백화 매니지먼트가 찢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 때문인가…….’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유현은 자신이 백화 매니지먼트 사람들을 모두 모으고 그들의 구심점이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으니까.
“흑뢰군주는, 어떤 사람입니까.”
굳이 강혜림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적어도 자신이 알던 그녀와 흑뢰군주를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지금의 흑뢰군주는…… 그야말로 미치광이라고 해요. 자신만의 성에 틀어박혀서 사람들을 수탈하고,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은 사소한 반항만 해도 무자비하게 죽인다고 하더군요.”
반란군이 나타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때 검후라 불리며 촉망받던 강혜림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마천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군주의 자리에 군림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유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이 현실이 그것을 증명했다.
입맛이 쓰다.
유현은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케이트가 눈을 반개하며 물었다.
“……흑뢰군주와 아는 사이였나요?”
“옛날에.”
유현은 빈 잔을 탁자 위에 조용히 놓았다.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니. 당신 대체 누구죠?”
“강유현.”
“못 들어본 이름이네요.”
“모르면 어쩔 수 없고요.”
유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나름 인지도를 많이 쌓았다고 하지만, 5년이나 흘렀으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도 할 말이 없었다.
유명했던 연예인들도 활동하지 않고 1년만 지나도 대중은 그런 사람이 있었나 하는데, 유현은 그 5배나 되는 세월 동안 잠만 자듯 지냈다.
세상이 변화 없이 평탄하게 흘러갔다면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난 5년 사이에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과거에 유명했던 컬렉터니 텔러니 하는 것도,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가 와 닿지 않는다.
“어찌 됐든 저희를 구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유현 씨가 아니었다면, 저희는 전부 죽었을 거예요. 그…….”
케이트는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이 말을 꺼내도 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혹시라도 마을을 더 지켜 줄 수 있냐고 묻고 싶으신 겁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반란군을 색출하라고 보낸 군단의 사병이, 소식이 뚝 끊긴 채 돌아오지 않았다면 과연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마 반란군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면? 이제 더 큰 무리가 올 겁니다. 케이트 씨도 그걸 알고 있으니 계속 불안한 거고요.”
“그, 그러면…….”
“그렇다 해도 제가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하, 하지만……!”
유현은 싸늘한 목소리로 케이트의 말을 쳐냈다.
“제가 한 행동은 순수한 호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도와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제가 이전 상황에 끼어든 명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군단의 사병을 쓰러뜨린 것도 그들이 피에 취한 짐승들이라고 판단했기에 죽인 겁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녀석들은 살아 있어도 해가 될 뿐이니, 그 싹을 제거한 거죠.”
“……하지만, 아직 그런 자들은 많이 남아 있어요. 군단은 유현 씨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예요.”
“예. 압니다. 그러니 저는 그들과 싸우겠죠.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놈들과 싸우는 것과 당신들을 지켜 주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그건…….”
“아쉬운 마음은 저도 잘 압니다. 뭐, 기왕 도움을 받았으니 한 번 더 받고 싶은 욕심도 들겠죠. 그렇다 해도 저에게 매달리는 것은 썩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말해 주고 싶군요.”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바깥을 곁눈질했다.
“저는 당신들이 말하는 해방군에 들어갈 생각도 없습니다.”
“……네?”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유현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손에 놓인 빈 잔을 보여 줬다.
“발칙한 짓을 저지르셨군요. 물에 약 같은 것을 타다니.”
“그, 그건…….”
케이트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지미가 자신의 누나를 올려다봤다.
“누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약이라니…….”
“아, 아니야. 나도 그건 모르는…….”
“진짜 본인도 모르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촌장이 멋대로 저지른 짓인가.”
유현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케이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녀는 약을 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유현이 저렇게 말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멋대로 일을 저질렀다는 소리.
그녀는 다급해졌다.
“자, 잠시만요! 아무래도 저희 쪽 사람이 무슨 착각을…….”
“착각이고 자시고, 지금 바깥에 몰려 있는 사람들. 당신네 해방군 소속 아닌가? 은밀하게도 포위했군.”
유현은 바깥을 돌아다니는 기척을 느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 같지만 그의 날카로운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적의는 없지만, 그것은 아직 모를 일이다. 저들이 갑자기 돌변해서 그를 죽이려고 들지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이런 상황일수록 유현은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았다.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그런 세상이 오고 만 것이다.
“제, 제가 나가서 설득할게요!”
“그쪽의 무엇을 믿고?”
의자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선 유현은 케이트를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케이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내가 여기서 그 쪽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틀렸나?”
“……네. 맞아요.”
“본인이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은 반응만 봐도 알아. 그런데 다른 녀석들은 아니지.”
“저, 저는…….”
“그러게 내가 존대를 하고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을 때 잘했어야지.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거기서 지켜보고나 있어.”
그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그 말에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지미는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누나인 케이트와 유현을 번갈아 살폈다.
“구세주……님?”
“동생에게도 말해 두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놔둘 수는 없을 테니.”
유현은 그 말만 남기고 촌장의 집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 나가자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다수의 사람이었다. 마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들. 심지어 하나같이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복장은 다양하다. 갑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입은 사람도 있다.
그사이에 섞인 촌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유현이 분명 약을 먹었는데도 멀쩡히 걸어서 나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영 글러 먹었군.”
“투항해라.”
선두에 선 남자가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유현은 재밌는 말을 들었다며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이 촌장을 향했다.
“촌장. 이야기 안 해 줬어? 여기 침입한 병사들이 어떻게 됐는지.”
“그에겐 전부 들었다.”
“들었는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한다고?”
“그래 봤자 고작 300명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이 아닌가.”
“흠. 이상하다. 언제 300명이 고작이라고 불릴 정도가 됐지?”
5년 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달라진 기준점을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투항해라. 투항하면 그쪽을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러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제압하겠다.”
그 말에 실실 웃던 유현의 얼굴에 표정이 지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꼭 힘으로 제대로 보여 주지 않으면 자기가 잘난 것마냥 군다.
유현은 얼굴에 아포리아의 가면을 썼다.
4개의 붉은 눈동자가 안광을 토해 냈다.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