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53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예?”
“강혜림, 그러니까…… 흑뢰군주가 누구라고?”
“마천후 강혜림이요.”
“강혜림이라면 내가 아는…… 그런데 마천후? 검후가 아니라 마천후라고? 그리고 군주라니…….”
유현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설명이 더 필요했다.
흑뢰군주가 자신이 아는 강혜림과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미가 말 한 강혜림은 분명 유현이 알던 강혜림이 맞았다.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 강혜림의 칭호가 바뀌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런데, 마천후니 흑뢰군주니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가을하늘처럼 시리도록 아름다운 청아한 뇌기를 사용하던 것이 강혜림이 아니던가. 천뢰검은 그런 고결한 무공이지 절대 흑이니 마라는 것이 붙을 기술이 아니었다.
“아는 것이 있으면 더 말해봐.”
“저, 그게 그러니까…….”
지미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흑뢰군주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혼성계의 변방에 존재하는 마을의 10살짜리 꼬마아이가 흑뢰군주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지미는 괜히 구세주인 유현에게 보답할 길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에 다급하게 외쳤다.
“누, 누나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누나가?”
“네, 네. 저희 누나는 되게 똑똑해요. 머리가 좋아서 뭐든지 알고 있거든요. 아마 흑뢰군주에 대해서도 누나는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누나는 어디 있지?”
“마을에, 마을에 있었는데 군단의 병사들이 쳐들어와서 다 잡아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구해야겠군.”
유현의 말에 지미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본 유현은 정말로 강한 사람이었다.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1초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에 병사 셋을 손쉽게 쓰러뜨렸으니 믿을 수 있었다.
“마을 방향은?”
“저, 저쪽이요.”
지미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마을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유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미를 한쪽 팔로 안아들었다.
“엇?”
“꽉 잡아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현의 몸 주위로 검은 기운이 일어났다. 방금 전 추격대 셋을 쓰러뜨릴 때 보았던 어둠이었다.
칠마흑천신공의 고강한 기운을 두른 유현의 몸이 하늘 높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고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유현은 지미가 가리킨 방향에서 불빛을 발견했다. 그것이 불에 타고 있는 마을이라는 것은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유현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중력의 의지를 거스르듯 잠시 제자리에 고정된 유현의 신형이 이윽고 마을을 향해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지미는 눈을 멀쩡히 뜨기 힘든 풍압에 유현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마을에서 금역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이 훨씬 넘었지만, 돌아갈 때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 * *
“반란군에 가담한 녀석들이다! 저항하면 본보기로 몇 놈 죽여!”
“이 굼벵이 같은 놈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빨리 움직여!”
군단의 병사들이 생포한 마을 사람들을 붙잡아 한곳으로 몰아넣었다.
마을 시민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법이 사라지고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 자신들보다 훨씬 더 강한 군단의 병사들은 멀리 떨어진 흑뢰군주보다 훨씬 더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몇 명이 본보기로 처형당한 것을 본 순간, 그들은 저항의 의지를 상실했다.
“다 모았나?”
“예. 도망친 몇 녀석을 제외하면 거의 다 된 거 같습니다.”
“도망친 놈이 있다고?”
이들을 이끄는 대장이 눈살을 찌푸리자 부관이 황급히 둘러댔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꼬맹이라서 추격대 녀석들이 쫓으러 갔거든요. 금방 잡아올 겁니다.”
“아이라 하더라도 절대 놓치지 마라. 이곳에 반란군이 숨어 있다는 말을 들은 이상, 아이도 노인도 심문의 대상일 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장은 마을 구석에 몰아넣은 포로들에게 다가갔다. 갑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불길을 등진 채 다가오니 포로들의 입장에선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이 마을에 반란군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어쩌면 반란군이 아닐 수도 있고, 그저 녀석들에게 가담을 한 꼬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 운이 없게도 잘못된 소문이 퍼졌던 걸지도 모르지.”
“저, 저희들은 반란군이니 그런 건 모릅니다.”
마을에 거주하는 최연장자가 나서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그저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이 지역의 패자인 흑뢰군주님께 거역하겠습니까?”
“그러면 이곳에 반란군이 없다 이 말인가?”
“누구에게 물어도 그럴 겁니다. 저희는 정말로 금시초문입니다.”
대장이 다른 사람들을 노려보자 모두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 정말입니다! 저희는 모르는 일이에요!”
“반란군이라니! 그런 건 당치도 않는 소립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거 참.”
대장은 난처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반응을 보면 정말로 억울해 하는 게 맞군. 하긴, 이런 변방의 마을에 반란군이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야.”
“그, 그러면 저희를 살려 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대장은 사람들의 기대감에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그의 눈동자에 마을을 불태우는 화염보다 훨씬 더 뜨거운 불길이 이글거렸다.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장난으로 왔다고 생각하나? 잘못된 정보? 반란군이 없어? 아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정말로 중요한 건 그런 소문이 이런 변방의 마을에서 났다는 것이다.”
“그, 그런…….”
“반란군이 있다는 소문이 나온 순간, 이곳은 반란군의 거처가 된다. 아이도 노인도 할 것 없다. 너희들이 정말로 무고해도 소용없다. 우리가 반란군이라고 하면, 너희는 반란군이 되는 거야.”
터무니없는 폭거에 가까운 말에 마을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그건 부당합니다!”
사람 중에서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명처럼 외쳤다.
대장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반항하는 자를 쓰윽 보더니 손끝을 까닥였다.
촤악!
반발하며 일어났던 남자의 머리가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근처에서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부당하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힘을 갖고 나서부터다. 아직도 5년 전 세상을 생각하고 있나? 법이고 규율이고 그딴 것이 무너진 지가 언제인데, 언제까지 그런 구닥다리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을 생각이지?”
대폭발 이후로 세상은 바뀌었다.
이제 힘을 지닌 자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21세기의 도덕이고 윤리는 더는 힘을 얻지 못했다. 그런 말을 내뱉고 호응을 얻고 싶으면 그만한 실력을 지녀야만 한다.
“힘이 없으면 정복당하고 지배당한다. 강자에게 고개를 숙인 시점에서 너희들은 이미 목숨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억울한가? 그러면 강해졌어야지. 이따위 변방에서 패배자들끼리 상처를 핥아 주면서 지내면 뭐가 되는 줄 알았다면 착각도 유분수다.”
대장은 자신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반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경멸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억울하면 약해 빠진 네놈들의 실력을 탓해라.”
“좋은 말이야.”
“뭐?”
누가 감히 자신이 말하는데 겁도 없이 끼어든단 말인가.
대장은 이윽고 목소리가 마을 사람들이 아닌,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대장이 보게 된 것은 검은 정장을 입고 얼굴에 기이한 가면을 쓴 남자였다.
가면은 마치 악마를 형상화한 것처럼 생겼다. 머리 위로 뿔이 있었고, 이빨은 날카롭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가면에 새겨진 4개의 눈동자였다.
붉게 빛나는 악마의 안광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대장은 죽음이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환상을 봤다.
“지미!”
“누, 누나!”
유현의 품에 안겨 있던 지미가 내려와 자신의 누나에게 달려갔다. 대장은 10살짜리 꼬마가 자신을 지나가는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네놈은, 누구냐?”
“조금 전에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유현은 대장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을 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시선이 불에 타오르는 마을 주변에 머물렀다. 피를 흩뿌린 채 죽어 있는 시체들이 몇몇 보였다.
그들의 원혼은 성불하지 못한 채 마을과 함께 타고 있었다.
무차별적인 살육.
그가 자리를 비운 5년 사이에 세상은 너무나도 변해 버렸다.
“그래. 힘이 있는 녀석이 정의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 나가는 세상을 막고자 했다. 삶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생명의 무게가 가벼이 여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종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나가니까.
하지만, 과연 지금의 현실이 종말과 비교해서 더 나은가는 의문이 든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현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 느낄 수 있었다.
종말이 질서를 가진 혼돈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혼돈을 가진 질서의 시대였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가만히 있어야 하고 말이지.”
“우, 우릴 건드리면……!”
목숨의 위기를 느낀 대장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군주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군주? 흑뢰군주?”
“그렇다!”
감히 군주님을 그런 식으로 낮잡아 부르는 유현의 태도에 대장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 자리에 그의 명줄을 쥔 사람이 누구임을 떠올리며 대장은 분노를 억눌렀다.
“그쪽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그냥 지나가라! 우리는 오직 이 마을 사람들에게만 볼일이 있으니까!”
“왜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당신 정도나 되는 강자가 이런 마을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대장이 보기에 유현은 아무리 낮잡아 봐도 초월자는 돼 보였다. 그가 예전에 먼발치에서 초월자급 강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가 풍겼던 분위기가 지금 유현과 딱 비슷했다.
덤비면 죽는다. 그러니 최대한 흑뢰군주의 이름을 이용해 겁박을 줘서 보낼 생각이었다.
“뭐, 그쪽 말마따나 내가 이 마을 사람도 아니고, 사실상 외인이긴 하지.”
“그러니까……!”
“그런데, 이제 상관이 있게 됐는데?”
가면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유현이 손을 들어 올려 지미와 그의 누나를 가리켰다.
“내가 그 아이와 누나에게 볼일이 있거든.”
“그, 그렇다면 이 두 사람만 보내 주고…….”
“그리고, 그 뒤의 사람들 전부.”
“뭣…….”
“나와 관련이 있게 됐어. 지금 부로 말이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대장은 입술을 짓씹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강자다. 그러니 어떻게든 충돌을 피해야만 했다. 저 정도의 강자라면 이 근방에서 흑뢰군주의 악명을 모를 리는 없을 테니, 그 이름만 팔면 충분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장은 고민했다. 이대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풀어 줘야 하는 것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는 명령을 받았다. 반란군을 색출해서 모조리 죽이라고. 그 명령을 받은 순간, 반란군이 없어도 반드시 행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는 죽는 건 자신이 된다. 명령 불이행, 상관 모독죄, 무능함. 시체의 묘비명에 붙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대장이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금까지 그의 명령을 잘 이행해 온 부하들은 대장이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모두 살기를 일으키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유현은 소리 내서 웃었다.
“나한테 덤비게?”
“…….”
“뭐, 좋아. 사실 내가 말 안 했는데, 너희들이 마을 사람들을 다 풀어 주고 사죄를 해서 돌아가려고 해도 나는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어.”
“……대체 왜?”
“내가 너희들보다 강하니까.”
유현이 가볍게 오른손을 휘저었다. 강풍이 휘몰아치며 마을을 집어삼킨 거대한 화마를 그대로 찢어 버렸다. 순식간에 주위의 불길이 꺼지며 밤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4개의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러니 불만 없겠지?”
약해 빠진 너희들의 실력을 탓해라.
대장은 유현이 하지 않은 뒷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모두 쳐라!”
군단의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유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와라.”
아포리아의 악마가 두 팔을 벌리며 불나방들을 맞이했다.
* * *
“커흐윽! 컥!”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시체의 산.
마을을 침략하고 불로 태우며 사람들을 웃으면서 죽인 군단 병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꼭대기에서 네 개의 눈을 지닌 악마가 병사들의 대장의 목을 쥔 채 서 있었다.
“사, 살려…….”
뚜둑!
유현은 더 들을 가치조차 없다는 듯 대장의 목을 꺾었다.
고요한 사위에 목이 꺾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귓가를 울렸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유현을 올려다봤다. 분명 자신들의 마을을 구해 준 은인이 맞지만, 그 흉악한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악마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 그러면…….”
그 악마가 이쪽을 돌아봤다.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잔영이 어둠 속에 남았다.
“이야기를 해 보지. 지난 5년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