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49화
눈을 떠 보니 훈련소 시절로 돌아온 것을 깨달은 권지아는 당황했다.
그녀는 분명 멸망한 지구에서 버티다가 100번째 시련을 넘어서, 그 이후 항거할 수 없는 재앙에 휩쓸려 죽었다.
그렇게 죽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인생 2회차의 시작이었지만, 권지아는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녀는 종말에서 살아남으며 과거의 유약하던 시절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었다.
새로운 삶. 새로운 기회.
권지아는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이제는 호구처럼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그 남자는 나보고 해 보라 했지. 그래. 왜 그렇게 모든 것을 알고 강하나 했는데, 회귀자라서 가능했던 거였어.’
이제 그 힘이 자신에게 넘어왔다.
‘나는 당신처럼 실패하지 않겠어.’
권지아는 기회를 허투루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두각을 드러냈다. 1회차의 그녀는 훈련소의 기초적인 것도 따라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든 것이 쉬웠다. 회귀 전의 기억과 지식, 경험이 아우러진 그녀는 압도적인 격차로 훈련소를 1등으로 수료했다.
이후에 수많은 클랜과 매니지먼트가 그녀에게 러브 콜을 보냈다.
권지아는 그중에서 가장 비전이 좋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원을 받으며 사상세계에서 환상체를 쓸어 담고 온갖 기연을 독차지했다.
남들이 만지지 못할 거금을 얻고 연신 유명세를 타며 명성을 떨쳤다.
모든 것이 너무 쉬웠다. 과거에 그토록 바라던 성공이라는 것이, 사실 이렇게나 얻기 쉬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지구에 재앙이 벌어졌다.
‘그때와 똑같아. 미래는 바뀌지 않는 건가?’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지니던 것들을 다 잃었다.
아니, 전부는 아니었다. 지난 5년 동안 쌓아 온 힘. 그것을 이용해 권지아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멤버를 꾸려 종말에 대항해 나갔다.
하지만, 종말의 시련은 아무리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쉽게 헤쳐 나가기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며 누군가가 죽어 나갔다. 그녀도 몇 번이고 죽을 뻔했다. 악을 다해 버텨 온 과거와 다르게 2회차의 그녀는 조금 방심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65번째 시련에서 죽었다.
‘겨우 얻은 기회인데, 이렇게 죽다니.’
권지아는 원통해 하면서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눈을 뜨고.
‘어?’
3회차가 시작됐다.
‘또, 라고?’
다시 주어진 기회. 권지아는 이것을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3회차에서 그녀는 이전보다 더 노력했다. 다 알고 있다는 자만심을 억누르고, 이번에는 절대 전처럼 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강해졌다.
그렇게 3회차의 그녀는 2회차 시절보다 훨씬 더 강해지고 유명해졌다. 그러나 권지아는 거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5년 뒤에 벌어질 멸망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살면서 이렇게까지 노력을 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5년 동안 준비한 그녀는 다시 종말을 맞이했고, 80번째 시련에서 죽었다.
철저히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소소하게 놓쳤던 것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사소하게 넘긴 것이 나중에 얼마나 큰 부메랑으로 돌아오는지, 그녀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노력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권지아는 그렇게 회차의 끝을 맞이했고.
4회차를 시작했다.
‘또……인가?’
권지아는 그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어받은 이 회귀의 횟수에는 끝이 없다는 걸.
그녀는 다시 5년 뒤를 준비했다. 이번에는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준비를 다짐했다.
그녀에게 반기를 들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방해할 기미가 보이는 사람은 가차 없이 차단했다.
5년 동안, 그녀는 철저하게 밑 작업을 했다. 종말에서 위험한 존재가 될 사람들을 미리 제거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을 포섭했다.
그렇게 종말이 왔다. 그녀는 시련을 하나씩 통과했다.
방해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죽였다. 그들에게 동정도 연민도 필요 없었다. 방해하면 죽이고, 혹시라도 앞일에 거슬릴 것 같으면 죽였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살리는 사람보다 죽이는 사람의 숫자가 10배 이상은 더 많았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피도 눈물도 없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세상에서 인간성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었다.
그렇게 권지아는 90번째 시련까지 무난하게 넘어가나 싶었지만.
푸욱.
‘어, 어째서?’
동료의 배신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때 정말로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2회차 3회차에서도 함께 했던 동료가 4회차에서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으니까.
무엇보다 마지막에 자신을 죽일 때 보여 준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그녀를 향한 혐오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4회차의 끝을 맞이하고.
원치 않는 5회차를 시작했다.
‘그래. 내가 사람들을 너무 믿었어.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어리석은 짓이었는데.’
5회차의 그녀는 이제 누구와도 함께 움직이지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루기로 다짐했다.
그녀는 그렇게 모든 것을 독식하며 나아갔다.
방해하는 사람은 죽였다. 자신에게 빌붙으려는 녀석들도 죽였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해도, 누군가가 도와달라고 빌어도 그들을 무시했다.
더는 동료 따윈 필요 없다. 회차를 반복하며 쌓아 온 경험과 정보만으로 이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90번째 시련을 넘어섰다.
이거다. 바로 이거였다. 이대로만 가면 다시 100번째 시련에 도전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려는 순간, 그녀는 주위에 자신을 포위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을 이끄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권지아를 향해 칼을 겨누며 외쳤다.
‘너는 지금까지 너무 많이 설쳤어.’
생존자들. 그중에서도 네임드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권지아가 혼자서 다 이루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강해지면 그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인데, 더 강해지면 자신들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그녀를 죽이기 위한 함정을 팠다.
권지아는 분노하며 생존자들과 맞서 싸웠다. 지금까지 대부분 기연을 독식한 그녀의 힘은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들도 이를 악물고 권지아를 죽이기 위해 싸웠다. 어차피 여기서 밀려나면 그녀에게 숙청당할 건 자명한 일. 그러니 죽기 전에 죽여야만 했다.
그렇게 성령들이 지켜보는 하늘 아래에서 치열한 싸움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그녀가 싸우는 사람만 수천 명이었다. 그중에서는 권지아보다 약해도 특출하다고 할 정도로 강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결국, 권지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죽어! 이 괴물아!’
남은 생존자들은 권지아를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부으며 그녀를 죽였다.
권지아는 5회차의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6회차가 시작됐다.
6번째를 시작한 권지아는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자신이 너무 정적을 제거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을 심어 줬다. 그녀는 이제 딱 필요한 정도로, 그것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사람을 죽였다.
이번에는 많은 사람을 살렸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강해지는 데 타협을 두지 않았지만, 이전처럼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구도자로 불렸다. 그렇게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번에는 98번째 시련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마의 99번째.
묵시록의 4기사를 이기지 못해 그녀는 죽고 말았다.
다시 눈을 뜬 권지아는, 7번째 삶을 강제로 시작하게 된 그녀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이 회귀 능력은 기회 따위가 아니야.’
이건 저주였다.
죽어도 죽어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저주.
그리고, 권지아는 왜 자신에게 이 힘을 넘겨준 남자가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겐 그자가 첫 만남이었겠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삶을 몇 번이고 계속 반복했던 것이다.
그 남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삶을 반복했던 걸까.
100번? 아니, 1,000번이 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실패했고,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다. 권지아 또한 자신이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웃기지 마!’
그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삶의 쇠사슬에 묶여서 평생 같은 삶만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더 노력하면 된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그만이다.
권지아는 다시 작전을 세웠다. 더 철저하게, 더 확실하게.
이번에야말로 시련의 끝을 보자고.
그렇게 다짐했다.
10회가 넘어갔다. 권지아는 아직 의욕을 잃지 않았다. 종말의 시련 90번째까지는 어떻게든 가게 됐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100회가 넘어갔다. 10회 이후로 그녀의 성공률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60번째도 넘기기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웠다. 그러다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맞이했다.
자신의 기억이 문제가 됐다. 그녀가 과거를 반복하며 쌓아 온 기억이, 혼성계의 특이점과 맞물려 세상에 더 큰 재앙을 몰고 왔다.
권지아는 결국 1회차부터 10회차까지의 기억을 봉인했다. 이때의 기억과 지식은 이제 그녀의 발목을 잡는 위험한 시한폭탄이었다. 핵심 기억을 없애 훗날 다가올 위험을 막기로 했다.
200회가 넘어갔다.
그녀는 폐인처럼 살았다. 200번의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200번의 삶. 뭘 해도 제대로 되지 않고 정신은 마모되고, 평범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됐다.
300회차가 넘었다.
권지아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자신의 본능을 극한으로 일깨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반복한 끝에 그녀는 1회차 시절, 아주 먼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나약하고 배려할 줄 알며 이타심이 강한 그런 성격으로.
하지만, 그녀가 지닌 회귀자의 특성은 그녀를 완전히 과거로 되돌리는 것을 막았다. 그렇게 권지아는 무뚝뚝하고 이성적이면서도 자신보다는 남을 생각하는 이타심으로 뭉친, 기묘한 회귀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400회. 500회. 600회를 넘어가고.
‘대체, 얼마나 이런 무의미한 삶을 반복해야 하는 거지.’
이제 종말에 도달하는 5년도 버티지 못했다. 뭘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의욕도 없고, 그저 본능대로 살아갔다.
세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이 세상은 언제나 정해진 길대로만 흘러갔다.
예전에는 흐름이 바뀌지 않게 하려고 많은 위험을 미연에 제거하고자 했지만.
이제는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보며 헛웃음만 나왔다.
아아. 그랬구나. 그 남자는, 결국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왔던 거구나.
처음에는 이런 능력을 지니고도 포기한 남자를 비웃었다. 하지만 권지아는 자신이 얼마나 생각이 짧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오히려 마지막에 100번째 시련을 넘어선 그 남자가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더 대단했었다.
죽고 싶었다. 살기 위해 얻은 힘은 역설적으로 삶의 끔찍함을 영혼 깊은 곳까지 주입했다. 권지아는 차라리 편하게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죽을 수 없다. 죽어야만 한다지만 살게 된다.
그렇다면 이 힘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런 방법도 모른다.
이윽고 남자를 향한 증오심이 샘솟았다. 왜 이런 걸 내게 넘긴 거야. 대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데.
그렇게 울부짖어도 소용없었다. 이 한탄도 벌써 몇백 번 이상이나 경험했다. 이제는 화낼 기력도 없었다. 뭘 해도 미래는 바뀌지 않고, 결과는 같을 테니까.
그녀의 눈물은 먼 과거에 말라 버렸다.
권지아는 훈련소의 수료식을 끝내고 터덜터덜 걸었다.
이 세상은 색채를 잃었다. 그 세상 속에서 권지아는 죽지 못해 살아가는, 숨만 쉬는 인형이었다.
누군가, 제발 이 지옥을 끝내 줬으면.
“잠깐만요!”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지금까지 이 길을 지나가면서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 있었지만, 기억할 가치도 없어서 머릿속에서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자신을 불러 세운 남자를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강유현이라고 합니다. 그쪽의 성함은…….”
“꺼져.”
그것이 그녀의 삶을 바꾸게 되는 첫 만남이었다.
* * *
권지아는 눈을 떴다.
또 새로운 회차가 시작된 걸까 하는 불안감이 담긴 시선이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의 몸을 묶고 있는 왕좌였다. 그녀는 아주 거대한 제단의 꼭대기에 있었다. 제단의 까마득한 저 아래, 유현이 종말의 청기사와 싸우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분명 언리쉬드와 맞서 싸우고 있었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끊기기라도 한 것처럼 가물가물하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 조합하자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지금 주위에 벌어지는 이 모든 사태는 전부 자신 때문에 벌어졌다.
천지사방에 펼쳐진 모든 것들은 그녀의 악몽이 현실로 튀어나온 재앙의 산물들.
스스로 기억을 봉인해 가면서 막고자 한 사태를, 그녀는 결국 막지 못했다.
‘또…… 인가. 나는 또 실패한 건가.’
욱신.
가슴이 아팠다.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제는 다 버렸다고 생각한 감정이 되살아나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눈물 따윈 이제 다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유현 때문이었다.
“유현.”
떨리는 목소리로 그 애증의 이름을 부르자 청기사와 대적하던 유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지아 씨!”
“나를…….”
권지아가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유현을 애타게 바라봤다.
“제발 나를…… 죽여 줘.”
“…….”
더는 이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 기쁨을 알기에, 그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을 떠올렸다.
성공할 거라는 기대감을 알기에, 실패했을 때의 절망감을 떠올렸다.
차라리.
차라리 몰랐다면.
그냥 예전처럼, 영혼 없는 인형처럼 살았으면.
이렇게 아프고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싫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유현의 답은, 너무나도 신랄했다.
“저는 지아 씨를 죽이지도 않을 거고, 여기서 죽지도 않을 겁니다.”
“너…….”
권지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냐고.
그 강함이, 그 눈부신 모습이, 자신이 지금까지 가져 본 적이 없는 것이라서.
권지아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보고 계세요.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초월적인 죽음을 마주하며.
유현은 무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