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46화
유현은 백련을 쥔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인간 상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죽음의 청기사는 전생에 유현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청기사가 지닌 마창이 온갖 죽음을 합쳐 놓은 저주를 내포한 채 복부를 꿰뚫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고통과 감촉이, 녀석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환통(幻痛).
지금은 과거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환상이었지만, 녀석을 마주한 순간 다시 현실이 될지 모를 고통이었다.
‘그래도 싸움을 피할 수는 없어.’
까드득.
손아귀에 힘을 주며 이쪽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죽음의 청기사를 노려본다.
해골 모양의 투구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안광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녀석은 말 그대로 죽음을 형상화한 존재.
죽음은 무자비하기에 상대방을 가리지 않는다.
‘차라리 전생에서 봤던 녀석보다 더 약했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유현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숨 막히는 압박감과 주위에 일렁이는 검은 아우라는 그야말로 죽음이 압축되어 형상화된 저주였다.
죽음의 청기사는 전생과 같은 힘을 지닌 채로 다시 현세에 강림했다.
유현이 청기사를 적수로 인정해서 긴장하듯 청기사 또한 유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청기사도 본능적으로 이 자리에서 자신이 가장 조심해야 할 존재가 유현임을 직감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하고, 이윽고 약속이라도 하듯 동시에 움직였다.
유현이 작살 형태의 백련을 고쳐 쥐었고, 청기사 또한 양손에 쥔 창과 낫을 유현에게 겨누었다.
“덤벼.”
아포리아의 가면을 쓴 유현이 청기사를 도발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청기사가 타고 있는 해골마가 제단의 계단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청기사의 등 뒤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유현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진 청기사가 양팔을 휘둘렀다. 낫과 창이 교차하며 유현을 향해 내리꽂혔다.
유현은 곧바로 백련을 그 중심에 찔러 넣으며 공격을 튕겨 냈다.
커다란 불똥이 튀기며 4개의 붉은 눈동자와 2개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를 주시했다.
“예전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야말로 쓰러뜨려 주마.
“복수의 시간이다.”
* * *
하아. 하아.
강혜림은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녀의 주위는 그야말로 폐허를 방불케 할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곳곳에 타거나 녹아내린 흔적이 역력했고, 그것은 전부 그녀가 지닌 천뢰검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이 뇌기의 폭풍을 받아 낸 적은 멀쩡했다.
전쟁의 적기사. 그는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치명적인 공격은 단 하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처는 순식간에 재생됐고, 흘러나오는 기세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해졌다.
‘그렇게 몰아세웠는데도 녀석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
오히려 지쳐 가는 것은 강혜림이었다. 검으로 벨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적기사는 그런 강혜림이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의 강자였다.
이윽고 적기사가 움직였다. 그의 팔뚝이 움찔 떨리는 순간 강혜림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거대한 붉은 참격이 강혜림이 있던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빨라! 그리고 강해!’
뇌기를 두르지 못한 일반적인 움직임으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초속의 일검.
그 일격은 가히 번개가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강혜림의 흔적마저 쫓으며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다.
적기사는 그런 존재였다.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았다.
그저 본인의 무력이 막강할 뿐.
강혜림은 적기사에게 파고들 틈을 발견하지 못했다. 적기사는 그 존재만으로 거대한 산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너무 높고 거대해서 고개를 아무리 들어 올려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태산.
사람이라면 마주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압도되며,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하지만, 강혜림은 달랐다.
“산이 뭐. 크고 강하면 그게 뭐 어떤데.”
그녀는 아직 검을 쥐고 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녀석은 산 따위가 아니다. 그저 말을 탄 적일 뿐이지.
산보다 더 거대한 존재감을 지녔다고? 아무리 휘둘러도 죽일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다면 그건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겁을 먹는다는 것이야말로 무능의 소치다.
검을 휘둘러 산을 벨 수 없다면, 벨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그만이다.
벤다. 눈앞에 있는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베어 넘긴다.
벤다. 베지 못한다는 생각은 없다.
벤다. 오로지 단칼에 적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과 의지를 품고서 검을 휘두른다.
그것이 바위라면 바위마저 갈라 버리고, 산이라면 산마저 베어 보이리라.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면, 그것이 설사 세상 그 자체라 하더라도 그녀는 검을 휘두를 것이다.
세상에 베일 것인가.
세상을 벨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단 하나의 답으로 정해져 있었다.
“덤벼.”
파츠츠츠.
강혜림의 의지에 영향을 받은 그녀의 뇌기가 더욱 고요해졌다. 스파크가 바깥으로 튀지 않고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가라앉았다.
적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이쪽을 향하는 강혜림의 모습 그 너머에서 여태껏 보지 못한 다른 거대한 무언가의 그림자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저 기세. 원래도 뇌기를 한계까지 다루며 위협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또 무슨 조화가 분 건지 한층 더 강해졌다.
“오지 않으면 내가 갈 거야.”
강혜림이 신형이 적기사를 향해 쏜살같이 쏘아졌다. 그녀의 검 끝이 번뜩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수십 개로 늘어나 적기사의 전신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적기사는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붉은 강기가 흩뿌려지며 뇌기와 충돌했다.
콰르릉. 공간이 진동하며 주변에 충격파가 연달아 터졌다.
이미 몇 번이고 주고받은 공격이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적기사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곳에 강혜림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스쳐 지나갔다.
적기사는 완전히 피하지 못해서 뺨에 큰 상흔을 입었다.
스윽.
적기사는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이전에도 상처를 입은 적은 있었지만, 그 상처 대부분은 그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했고, 생겨도 금세 회복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달랐다.
상처가 재생되지 않는다. 뺨을 타고 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적기사의 우묵한 시선이 강혜림의 검 끝을 향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정제된 뇌기. 그것이 압축되어 그야말로 뇌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다르다. 이 전과 다르게 지금은 저기에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강혜림은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의념’을 깨닫고 그 문을 두드린 것이다.
위험하다. 적기사는 처음으로 위기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강혜림을 가만히 놔뒀다간, 그녀가 완전히 의념을 깨우치게 되고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하악. 하악.”
적기사에겐 다행스러운 일이게도, 강혜림은 자신이 의념을 썼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그 힘을 끌어다 쓴 나머지 순간이지만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지 못하는 상황.
강혜림은 지금 반쯤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 있었다.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경계선에 서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딱 한 발자국. 그것만 내디디면 그녀는 그토록 넘지 못했던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
적기사는 그것을 눈치채고 강혜림을 방해하려고 했다.
[안 되지.]
그 순간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적기사의 주위가 새까맣게 변했다.
적기사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휘저었다. 그의 주위에 내려앉은 어둠이 붉은 검에 찢겨 나가고, 적기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 강혜림의 앞에 서 있는 역병 의사 가면을 쓴 기묘한 존재였다.
[주군의 아가씨가 벽을 넘어서려고 하는 데 방해를 하게 둘 수는 없다.]
데카르트의 악마.
적기사는 상대가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자는 눈앞에 있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 서 있었다. 보이지만 직접 만질 수 없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쪽을 향해 가하는 기묘한 술법은 이쪽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다, 당신은?”
[주군의 종. 데카르트의 악마라고 합니다. 아가씨를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저는…….”
[아가씨는 지금 곧 다음 벽을 넘어서기 위한, 그 중간 단계에 있습니다. 본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셨겠지만, 저는 압니다.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하십니까?]
“……맞아요.”
[그것은 아가씨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증표. 그러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가씨가 오롯이 벽을 넘어설 때까지 시간을 벌죠.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거면, 충분해요.”
[배려에 감사를.]
데카르트의 힘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상대방을 끝없는 꿈에 빠뜨리거나, 혹은 환상을 현실로 불러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중간한 대상에게나 제대로 먹히는 거지, 묵시록의 4기사급 정도 되는 적에게는 의미가 없다.
게다가 지금 그가 있는 이 악몽세계 자체가 파편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힘을 많이 억제하고 있었다. 모든 힘을 쥐어 짜내도 적기사를 상대로 10분 이상 견디기 힘들다.
10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다. 이런 촉박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데카르트는 슬쩍 강혜림을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겨우 찾아낸 다음 단계의 흔적을 열심히 쫓고 있었다.
10분이면 충분하겠어.
데카르트는 등 뒤로 까마귀 날개를 활짝 펼쳤다.
* * *
쿠르르릉!
서수민은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무형의 기운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던 대지가 바싹 마르더니 이윽고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흑기사가 지닌 권능은 ‘기근’이다.
그리고 이런 흑기사의 권능에 닿은 것은 생명이고 나발이고, 전부 노화를 겪어 사라지게 된다.
“흐음. 이거 참. 대체 어떤 원리로 저런 힘을 발동하는 건지 신기하구나.”
서수민이 지구에서 생활하며 컬렉터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아직도 컬렉터들이 사용하는 스킬이나 특성, 그밖에 특이한 권능이 매우 신기하게 다가왔다.
보이지 않으며 닿기만 해도 노화와 함께 풍화되어 사라지는 무시무시한 기운.
저울을 든 흑기사는 그것을 자신의 몸 주위에 두르며 주변을 계속 파괴하고 있었다.
“이런 술사 계열은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이런 상대는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지만, 힘이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고강한 내공은 흑기사에게 닿기도 전에 그대로 허공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흑기사의 노화는 물질과 비물질도 가리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내공이라 하더라도 저 ‘기근’에 닿는 순간 노화를 겪으며 사라지는 것이다.
“설마하니 강기마저 없애 버리는 권능이 있을 줄이야. 역시 세상은 넓구나.”
이대로 가면 평생이 지나도 흑기사를 쓰러뜨릴 수 없다. 흑기사는 기근이라는 권능을 다루는 것 이상으로 본연의 힘도 강했다. 말 그대로 거대한 힘을 이용해 찍어 누르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
서수민은 고민했다. 내공이고 의념이고 전부 흩어 버리는 저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였다.
전생의 유현은, 정확히 최도윤 일행은 기근의 흑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한 물건을 사용했다.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옵션이 붙어 있는 무기를 자밀라가 원거리에서 쏘아 내는 방식으로 일격에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서수민은 그 정도의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서수민은 기근의 권능을 손쉽게 피하면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양측 다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리는 교전이 지속되자 지금까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다윈이 나섰다.
“응? 아서라. 네가 상대할 녀석이 아니다.”
서수민은 그런 다윈을 말렸지만, 다윈은 묵묵히 기근의 흑기사에게 다가갔다.
흑기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구의 다윈을 보며 공격 대상을 바꿨다. 흑기사가 손을 뻗자 무형의 기운이 다윈을 향해 쏘아졌다.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노쇠해 먼지로 만들어 버리는 기근의 권능이었다.
다윈은 그것을 보고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자리에 가만히 섰다.
서수민이 피하라고 외치기도 전에.
기근이 다윈의 몸을 집어삼켰다.
“응?”
서수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윈은 기근의 권능에 적중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이 놀란 것은 흑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차 기근의 권능을 사용했지만, 다윈은 그것에 맞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수민은 그제야 다윈이 기근에도 끄떡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이냐?”
[나. 궁극의 생명체. 절대, 노화하지 않는다.]
다윈이 어눌한 말투로 답했다.
다윈의 악마는 모든 생명체가 도달하는 궁극의 형태다.
불사(不死)는 아니되 불로(不老).
천적은 없으며 그 수명은 영원하다.
그렇기에 가히 그는 ‘궁극’이라 칭할 수 있는 생명체였다.
서수민은 드디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방패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냐?”
끄덕끄덕.
“흐음. 뭐 좋다. 혼자 처리하고 싶지만, 굳이 도움을 주겠다는데 선의까지는 마다하지 않으마.”
서수민은 다윈의 악마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부탁하지.”
[얼마든지.]
다윈의 악마가 주먹을 불끈 쥐고 흑기사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