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44화
유현은 아직도 99번째 시련의 순간을 기억한다.
하늘의 높은 곳에서 어린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그 이후에 봉인을 찢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생생히 울려 퍼지던 순간.
그 이후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월계관을 쓰고 새하얀 말을 탄 흰 말의 기수, 정복의 백기사였다.
정복의 백기사는 등장과 동시에 땅의 들짐승들을 부리며 주위로 질병을 뿌린다.
그가 쏘아 대는 화살은 눈으로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며, 맞으면 단순히 다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복합적인 병균에 감염되고 만다. 그 질병은 백기사를 죽이지 않는 이상 ‘절대’ 치료가 불가능하다.
“더 위험한 건, 녀석은 말 그대로 첫 번째 기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묵시록의 4기사(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정복의 백기사는 그 중 첫 번째 재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재앙이란 으레 그렇듯 뒤에 나오는 녀석들일수록 훨씬 더 강하고 위험하다.
“이대로 가면, 나머지 녀석들이 깨어나게 될 거야.”
백기사 다음엔 적기사가.
적기사 다음에는 흑기사가.
그리고, 가장 강한 녀석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죽음의 청기사.
그렇게 되면 지금 인류에겐 가망이 없다. 마지막 4번째인 죽음의 청기사가 나타나면 유현을 제외하고 놈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나머지 놈들이 다 나타나기 전에 막아야지. 그러니까 어서 지아 씨를 찾아야 해.”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봉인을 뜯는 시간은 순차적으로 정해져 있다. 청기사가 풀려나기 전까지는 아직 유예 시간이 있다는 것이고, 그 사이에 권지아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미적지근하게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주위에 무슨 피해를 일으킬지 몰라서 지금까지 자제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유현은 얼굴에 아포리아의 가면을 썼다. 노도와 같은 기운이 유현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주변 일대를 빠르게 휩쓸었다.
동시에 유현의 힘을 느낀 것인지 온갖 환상체들이 유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뜨거운 불길을 향해 날아드는 무수한 나방처럼, 환상체들은 유현이 두른 칠마흑천신공의 기운에 닿기 무섭게 텍스트가 되어 흩어졌다.
“비켜.”
유현은 그대로 기운을 몸에 두르고 악몽세계의 안쪽을 향해 길을 파괴하며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 * *
“언니. 무서워!”
“괜찮아. 지금 바깥에서 사람들이 구하러 와 줄 거야.”
강릉의 대피소.
강릉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이곳에 모여서 언제 올지 모를 구조대를 애타게 기다렸다.
갑자기 터진 재해는 그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어린 여동생을 둔 자매가 이곳까지 무사히 당도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 줬기 때문이었다.
“모두 진정하세요. 협회에서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컬렉터들을 보냈을 겁니다. 저희는 조용히 이곳에서 버티기만 하면 돼요.”
대피소 내부에는 몇몇 컬렉터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람들을 최대한 진정시킨 덕분에 아직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곧 구조대가 올 거라고, 그런 희망을 품으며 사람들은 어두운 대피소 안쪽에서 삼삼오오 모여 얌전히 기다렸다.
그 순간 바깥이 우르릉 울리며 커다란 목소리가 그들을 강타했다.
「오너라!」
환상체들이 돌아다니는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대피소 안쪽까지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
분명 언어는 인간의 것이었지만, 소리를 내뱉은 존재는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인간을 초월한 별개의 존재였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위험한 거 아니지? 여기 있으면 다들 죽는 거 아니야?”
백기사의 목소리에 담긴 힘이 애써 억눌렀던 사람들의 불안감을 촉발시켰다.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시민들의 사이에서 하나둘 동요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삽시간에 전염병처럼 번졌다.
“다들 진정하세요! 대피소는 안전합니다!”
“그러면 방금 그 소리는 뭔데?! 가, 가까운 곳에 위험한 괴물이 있는 거 아니야?”
“여기 있으면 다 죽을 거야! 차라리 모두 흩어지는 게 더 살아남을 가능성이 클지도……!”
“흩어지면 다 죽습니다! 모두 뭉쳐야 한다고요!”
“언니! 나 무서워!”
대피소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장으로 변했다.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눈을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안쪽에 계속 갇혀만 있다 보니 공포로 이성이 마비된 것이다. 컬렉터들은 그런 시민들을 제지했다. 일부는 미친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또 일부는 다 죽었다며 불안한 말만 내뱉었다.
콰직!
그때였다.
대피소의 한쪽 벽 귀퉁이가 무너지더니 이윽고 커다란 구멍 하나가 뻥 하고 뚫렸다.
모두의 시선이 무너진 벽을 향했다.
“말도 안 돼…….”
컬렉터 하나가 그 광경을 보며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피소는 어지간한 자연재해가 아닌 이상 환상체들로는 절대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초대형 환상체가 아닌 이상 대피소의 벽을 이렇게나 쉽게 허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너진 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거대 괴수 같은 것이 아닌, 한 손에는 활을 든 백마 탄 기사였다.
“고, 고작 하나가 대피소의 벽을 무너뜨렸다고?”
컬렉터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기사는 자신들로는 어떻게 항거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이라는 걸.
싸우면 죽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사는 마치 오물을 보는듯한 시선으로 대피소 내부를 훑어보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하는 환상체가 인간에게 호의적일 리가 있을까. 그보다 환상체가 저렇게나 노골적인 감정을 보여 주는 것도 그들에겐 처음이었다.
끼기긱.
이윽고 백기사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인간의 본능이 저 화살이 평범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것이 쏘아지면 내부에 있는 모두가 죽는다고, 다들 곧 다가올 파멸을 직감했다.
‘마, 막아야……!’
컬렉터들은 어떻게든 대응하려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도 컬렉터로서 여러 환상체들과 싸워 왔지만, 이렇게 격이 다른 존재를 마주한 적은 없기에 완전 얼어붙었다.
이윽고 백기사가 시위를 한계까지 당기고 손을 놓으려는 순간.
멀리서 날아온 새하얀 탄환이 백기사의 뒤통수를 때렸다.
“……!”
백기사의 분노에 얼굴이 획 돌아갔다. 그 광경을 본 컬렉터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백기사의 어깨너머, 기괴한 고층 구조물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을 향했다.
그곳에 검은 복장에 저격총을 쥔 유영민이 있었다.
“이거 참. 어디서 위험한 느낌이 들어서 황급히 오기는 했는데.”
기습에 실패한 유영민은 자신을 향하는 백기사의 강렬한 살기를 느끼며 탄환을 재장전했다.
“그래도 힘을 실어서 일격을 날린 건데, 먹히지 않았다고?”
녀석이 시민들을 죽이려 해서 급하게 쏜 거라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환상체는 일격에 쓰러뜨릴 위력이었다. 심지어 노린 곳은 모든 생명체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다. 그걸 맞고도 멀쩡하다는 것은.
“조금, 힘들어지겠어.”
유영민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윽고 장전을 끝낸 저격총을 재차 겨눈 유영민은 백기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퉁! 퉁! 퉁!
대 괴수 전용 특제 마탄이 뭉툭한 소리를 내며 쏘아졌다. 백기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녀석은 쏜살같은 움직임으로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아 냈다.
3발의 마탄과 3발의 화살이 정확히 정중앙에서 충돌했다.
콰과광! 거대한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폭연으로 시야가 가려졌지만, 유영민과 백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백기사가 탄 말이 투레질하며 그대로 허공을 밟고 뛰었다.
“미친, 페가수스도 아니고 저게 뭐야?!”
유영민은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몸은 확실히 그 움직임에 반응했다. 곧바로 신속한 탄환의 재장전과 더불어,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총구를 겨눴다.
‘빠르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백기사는 움직임이 불규칙적이고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빨랐다.
눈앞에 순식간에 무수한 흰색 선들이 그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던 둘의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졌다.
‘그래도 맞추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이번에 쏘아 내는 마탄은 관통에 특화된 녀석이다. 조금 전처럼 쉽게 격추하지는 못하리라.
총구가 눈부신 섬광을 토하며 불꽃을 뿜었다. 거기서 튀어나온 탄환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백기사의 미간을 노렸다.
완벽이 예측된 움직임. 그리고 이 거리에서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그렇게 예상하는 순간, 백기사의 몸에서 기이한 힘이 흘러나왔다.
‘무슨……!’
유영민이 쏘아 낸 관통탄이 백기사에게 닿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에 놀라기도 전에 백기사가 활을 쏘았다. 유영민은 황급히 몸을 날려 구조물 위에서 뛰어내렸다.
퍼석! 화살에 직격당한 구조물이 너무나도 쉽게 파괴됐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을 막아 내는 기이한 힘과 화살에 담긴, 대상을 파괴시키는 능력까지.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적보다도 강하다.
유영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 * *
매애애애애애.
어린 양이 두 번째 울음을 토했다. 그 직후 다시 찌이이익! 하는 소음과 함께 봉인이 찢어졌다.
「오너라!」
곧이어 두 번째 기사, 전쟁의 적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기사는 등장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생존자의 목을 치기 위해 말의 고삐를 돌렸다.
적기사의 역할은 검을 휘둘러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거두는 것.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싸움을 부추겨 이 땅에 평화를 빼앗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이윽고 적기사는 가장 강렬한 기척의 앞에 섰다.
“이건 또 뭐람.”
강혜림은 자신의 앞에 선 적기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권지아를 한시라도 빨리 구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적기사가 앞을 가로막으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강혜림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짜증과는 별개로 눈앞의 적기사는 그녀가 전력을 다해도 쉽게 쓰러뜨릴 수 없는 강자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싸움을 피하고 권지아를 찾는 데 집중하고 싶었지만, 적기사의 기세를 보아하니 그녀를 쉽게 보내 줄 것 같지 않았다.
‘……뒷일은 유현 씨에게 부탁해야 하나.’
그녀가 이곳에 들어 온 지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지금쯤이라면 유현도 이 악몽세계에 들어와 권지아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같이 움직여서 찾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강혜림이 뇌기를 일으켰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은청색으로 물들며 주변 공기가 뜨겁게 타올랐다.
방심은 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지는 건 이쪽이 될 거다.
꽈르릉!
강혜림이 번개를 두르고 적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찾았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던 유현은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
악몽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에, 딱 봐도 특별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멀쩡하게 생긴 구조물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저 안쪽에 권지아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유현은 상황을 재지도 않고 곧바로 유적지로 향했다.
끼기기긱.
커다란 입구를 지키듯 선 두 기의 문지기가 유현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반응했다.
10m가 넘는 기신(機神)이 서로 교차하듯 들고 있던 할버드를 고쳐 쥐며 유현을 향해 겨누었다.
유현이 지면을 박차며 뛰어오르고, 동시에 두 기의 기신이 유현을 향해 할버드를 휘둘렀다.
“비켜.”
검은 강기가 폭사했다.
칼날처럼 퍼진 강기가 기신의 할버드를 부수고 허리를 갈라 두 동강을 냈다.
유현은 무너지는 기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유적의 안쪽으로 향했다.
* * *
“음?”
다윈의 어깨를 타고 가던 서수민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은 허공에 흐르는 묘한 기운의 흐름을 읽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기감이, 곧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고 경고했다.
‘조금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2번이나 있었지.’
양의 울음소리와 함께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뒤를 잇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거대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직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날카로운 기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2번째로 끝이 아니라 그다음이 있으며 곧 나올 녀석은 훨씬 더 강하다는 걸.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다른 누군가와 싸우고 있어. 부딪치는 힘의 파동을 보면 영민이와 혜림 언니인가.’
유영민까지 왔다는 것은 유현도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
서수민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유현과 같이 권지아를 찾는 데 집중을 할지.
‘아니면, 곧 나올 3번째를 막을지.’
둘이서 수색하면 권지아를 찾는 데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하지만 서수민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유현이 나섰다면 권지아는 반드시 찾을 것이다. 그 남자라면 분명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3번째. 막아야겠네.”
그녀는 다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윈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서수민이 가자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다윈과 서수민이 도착한 곳은 사방이 가뭄을 맞이해 갈라진 메마른 땅이었다.
그 땅의 중심에 강렬한 이야기의 흐름이 소용돌이처럼 모이는 중이었다.
“온다.”
서수민이 그렇게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매애애애애.
어린 양의 울음소리와.
찌이이익!
세 번째 봉인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나타났다.
「오너라!」
무수한 이야기가 작은 점으로 압축되더니 이윽고 폭발하듯 팽창했다.
서수민은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거대해진 이야기에서 팔과 다리가 튀어나오며 이윽고 검을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머지 이야기가 조립되며 손에 저울을 든 기사가 되었다.
검은 말의 기수, 기근의 흑기사.
그가 등장하자 주변 공기가 바싹 말라붙었다. 대기 중의 수분이 완전히 증발하고, 피부에 닿는 공기가 거칠게 변했다.
서수민은 이쪽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흑기사를 보며 다윈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한 손에는 야구방망이를, 다른 한 손에는 묵룡검을 쥐며 씨익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션이라도 바르고 올 걸 그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