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43화
악몽의 세계가 강릉을 완전히 뒤덮자 협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기이한 돔은 강릉을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서서히 크기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양양, 평창, 동해시의 시민들에게 대피문자가 날아갔으며 컬렉터 소집령이 떨어졌다.
“하아. 이번엔 또 갑자기 무슨 일인지.”
이제는 어엿한 협회장의 자리에 오른 최중모는 이제 겨우 좀 사건들이 잠잠해진다 싶더니 갑자기 터져 버린 강릉 사태에 골머리를 감쌌다.
그의 시선은 실시간으로 드론이 촬영하고 있는 영상에 고정됐다.
광화문의 10중 사상세계 사태도 심각했지만, 이번에 터진 강릉 건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사상세계와 확연히 달랐다.
‘내부와의 통신은 완전히 단절됐다. 그리고 저 정체불명의 돔은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가고 있어.’
저 안쪽에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돔 자체가 심장처럼 끝없이 맥동하는 모습을 보면 안쪽에 있는 것이 적어도 평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상세계는 아니다. 그러면서 폭주하는 사상세계마냥 주위의 것을 집어삼키며 침식과 비슷한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폭주세계.
일반적인 사상세계가 아닌, 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것 같은 불길한 징조였다
* * *
유현은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강혜림과 서수민을 찾으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더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간 듯싶었다. 혹시나 싶어서 염화를 걸어 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세계라서 통신 자체가 먹히지 않는 건가.’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 거대한 악몽세계의 중심에 도착하게 되면 권지아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보다 상당히 복잡하군.’
모든 것들이 뒤섞인 이 악몽세계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거대한 미로였다. 온갖 기괴한 건축물들이 불규칙적으로 솟아 있었고, 일부 지형은 입체적으로 꼬여서 개미굴을 방불케 했다.
지도도 없고, 명확한 길도 모르는 유현은 일단 들어온 돔의 바깥을 등지고 최대한 안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바로 지아 씨의 악몽.’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봉인됐던 권지아의 기억이 깨어나고, 심지어 파편과 이야기의 씨앗까지 융합해서 하나의 거대한 재앙을 초래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핵을 제거해야 했다.
‘일반적인 사상세계와 달라서 클리어 조건이 없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권지아가 있다. 그녀가 벌인 짓이 아닌, 책벌레를 위시로 한 프라이티온의 짓이었지만, 이 세계의 근원은 결국 권지아다.
그녀의 기억이 이 세상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라면.
이 악몽세계를 없애려면 최악의 경우 권지아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후우. 아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아직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
벌써부터 속단하기엔 일렀다. 그래도 불안한 생각을 쉬이 떨쳐 내기 힘들었다.
유현은 걷고 또 걸었다. 기이하게 뒤틀린 이 세상은 분명 유현이 처음 보는 것들이어야 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흔적들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재료가 그토록 막고자 했던 종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이대로 이 악몽세계가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가며 지구 전체를 뒤덮게 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프라이티온의 목적 자체가 이것일지도 몰랐다. 권지아의 악몽을 현실로 불러와 지구에 덮어씌우는 것.
‘누가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둘 줄 알고?’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초를 치게 둘 수는 없었다.
유현의 두 눈동자가 강렬한 의지로 불타올랐다.
* * *
‘여긴 대체 어딜까.’
강혜림은 악몽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지금까지 무수한 사상세계를 클리어 해 온 그녀조차도 온갖 것들이 뒤섞인 악몽세계는 생소한 장소였다.
‘유현 씨는 지아 씨가 함정에 빠졌다고 말했어. 그렇다는 것은 이 세계 자체가 지아 씨와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
정말로?
강혜림은 머리로는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확신이 들었다.
강혜림이 아무리 모르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그녀도 유현의 곁에서 여러 가지 보고 들은 것들은 있었다.
무엇보다 얼핏 주변에 보이는 일부 풍경이, 유현의 과거에서 보았던 종말 이후의 지구와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러고 보면 지아 씨는 예전부터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거의 다 알고 있었어.’
그때의 강혜림은 그냥 권지아가 대단히 똑똑해서 그런 거라고 넘겼지만, 하나씩 꼬리를 물어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현이 이미 미래에서 과거로 넘어온 회귀자였다는 점.
그런 유현과 권지아가 남들에게 숨기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
권지아가 지금까지 보여 준 이상할 정도로 박식한 정보까지.
권지아. 그녀는 회귀자다.
강혜림은 곧바로 그런 해답을 내놓았다.
이윽고 강혜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지아 씨가 회귀자라 하더라도, 그녀는 우리 백화 매니지먼트의 동료야.’
예전이었다면 그녀를 질투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강혜림에게 권지아는 소중한 동료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회귀자라 해도 상관없었다. 구해야 할 이유는 변하지 않는다.
‘기다리세요. 지아 씨. 제가 바로 구하러 갈게요.’
강혜림은 전신에 뇌기를 두르며 자리를 박찼다.
* * *
“흐음. 참으로 이상한 세계로고.”
검은 장포를 입은 서수민은 악몽세계의 기괴한 구조에 묘한 탄사를 터뜨렸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나 기이한 세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중원 무림에 있던 시절, 아주 멀리 떨어진 세외무림이라 하더라도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으리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서수민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지금 서수민은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다윈의 악마]의 어깨 위에 다소곳이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
“대답하지 않는 것이냐. 참 재미없는 놈이로다.”
서수민은 과묵한 다윈을 보며 혀를 찼다. 그녀가 다윈을 찾게 된 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진도에서 파편 소유자들을 처리한 뒤의 일이었다.
다른 악마들과 다르게 다윈은 몸을 감추거나 그런 쪽으로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그 이상으로 서수민의 기감이 이미 초월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서수민은 자신을 지켜보는 다윈의 시선을 느꼈고, 그에게 나오라고 말했다.
다윈은 서수민이 혹시 위험할 때 그녀를 지키라는 명령만 들었을 뿐, 그밖에는 뭘 하라는 명령을 딱히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서수민이 시키는 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수민도 다윈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아 언니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이곳에 들어온 지도 어언 몇 시간이나 흘렀다.
꽤나 오랫동안 악몽세계를 돌아다닌 것 같은데도 그녀는 권지아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감각을 아무리 넓혀도 주위에 잡히는 것은 기이한 잡음이 전부.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뒤섞인 세상이라 특히 더 그런 건지도 모른다.
휘이이잉.
“후우. 또 인가.”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어서 서수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지 몇 시간, 단순히 무탈하게 탐색만 계속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는 환상체들이 그녀를 습격했고, 서수민은 벌써 수차례나 환상체들을 처치했다.
“이쯤 되면 대체 얼마나 더 싸우고 돌아다니길 반복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서수민은 적당히 몸을 풀며 싸움에 나서려고 했다. 그 순간 다윈이 손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제지했다.
“응? 무슨 뜻이냐? 네가 싸우겠다고?”
끄덕.
다윈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올라탄 서수민을 조심히 내리며 정면에서 다가오는 환상체 무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서수민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저 덩치가 직접 싸우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기회에 얼마나 강한지 지켜봐도 나쁘지 않았다.
키리리릭!
다가오는 환상체들은 랩터와 비슷하게 생긴 공룡이었다. 놈들은 선두에 선 거구의 다윈을 보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다윈은 그런 랩터들을 보며 자세를 잡았다.
‘호오? 저건…….’
서수민은 다윈의 자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저건 조금 전까지 그녀가 환상체들을 상대할 때 보여준 무공의 초식이었다.
다윈은 곧바로 랩터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투웅! 다윈의 솥뚜껑만 한 주먹이 허공을 때리자, 거대한 충격이 대기를 매질로 타고 흐르며 랩터 무리를 휩쓸었다.
순식간에 싸움이 끝나자 서수민은 팔짱을 풀고 손뼉을 쳤다.
“대단하구나. 내가 사용한 육합권을 그냥 보기만 하고 그대로 따라 하다니. 훌륭한 재능이야.”
칭찬을 받은 것이 기쁜지 다윈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서수민에게 다가왔다.
다윈이 서수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고, 서수민은 자연스럽게 다윈의 어깨 위에 올라가 앉았다.
기묘한 이 인조는 권지아를 찾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 * *
‘이거 상당히 골치 아픈데.’
유현은 아무리 걸어도 권지아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환상체들을 또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온갖 환상체들을 마주하게 됐다.
권지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구현되는 세상이다 보니 환상체들의 종류 또한 겹치는 것 없이 다양했다.
‘게다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
착각이 아니라면 주위를 돌아다니는 환상체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놈들과 마주치는 빈도 또한 엄청나게 늘어났다.
‘악몽세계에 휩쓸린 도시의 생존자들은 어떻게 된 거지?’
강릉은 채 대피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악몽세계에 삼켜졌다. 지금 이렇게 환상체가 돌아다니는 상황을 보면, 생존자들이 남아 있어도 그 숫자는 극히 미비할 것이다.
‘구하러 가려고 해도 원래 도시의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는 이상 이쪽에서 움직일 수도 없어.’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생존자 무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계속 지켜 줄 수는 없었다.
유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돔의 천장이 어둡게 펼쳐져 시야를 가로막았다.
라플라스의 눈을 사용해도 어디로 가야 무엇을 마주할 수 있는지 볼 수조차 없었다.
‘이 세상이 파편과 이야기의 씨앗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했었지. 그 여파 때문인가.’
이 안쪽에서는 미래를 볼 수 없다.
유현은 곧바로 라플라스의 힘을 해제하고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그때였다.
매애애애애.
어디선가 들려오는 양의 울음소리. 방향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분명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양의 울음소리가 맞았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고 말았다.
[유현아. 무슨 일이야?]
‘방금, 양의 울음소리 들었지?’
[엉? 어. 맞아. 들은 거 같았어. 그게 양 울음소리였구나. 그런데 그게 왜?]
유현은 이제까지 보여 준 적 없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매사에 여유를 잃지 않은 유현이 저런 반응을 보이자 백련도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젠장. 역시 양의 울음소리였어. 차라리 내가 잘못 들었으면 좋았으려만.’
[양 울음소리가 뭐 어때서?]
‘그냥 양이 아니야. 그것도 어린 양의 울음소리지.’
[그게 뭐 문제 될 게 있어?]
‘보통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
유현에게 이 양의 울음소리는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오래된 기억도 아니다. 이 양이 울고 나서 그 뒤에 벌어진 사태는, 유현이 종말에서도 막바지에 겪었던 시련과 직결되니까.
‘하지만, 이게 대체 왜?’
권지아는 시련을 절반 이상 넘어가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이 양의 울음소리는,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99번째의 시련에서 벌어지던 일종의 ‘전조 현상’이었다.
유현이 기억하기로는 권지아는 99번째 시련은커녕, 50번째 이상을 넘어간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고 했다.
권지아가 이런 거로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녀의 기억 속에 99번째 시련이 있다는 것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봉인됐던 회차의 기억이, 풀려났다.’
2~10회차의 권지아가 어디서 뭘 했는지는 유현도 모른다. 그녀의 기억은 봉인되어 있었고, 유현의 책을 보는 능력으로도 거기까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조금 전 어린 양의 울음소리로 유현은 확신했다. 권지아는 아주 초기 회차 때 99번째 시련까지 도달한 적이 있다는 걸.
‘그렇다면 진짜 큰일이야.’
[대체, 뭔데 그래?]
‘어린 양이 울었다는 것은 곧 다음에 그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니까.’
백련이 그게 뭔지 묻기도 전, 이번엔 허공에서 찌이익! 하고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 울음소리를 착각으로 치부하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번 소리는 무엇보다도 선명했다.
유현이 하나의 구절을 읊었다.
“어린 양이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찢었을 때,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리라.”
「오너라!」
쩌렁쩌렁한 소리가 악몽세계 전역을 울렸다. 동시에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거대한 힘의 파동이 멀리서 느껴졌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유현의 시선이 파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했다.
“99번째 시련. 묵시록의 기사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