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42화
모든 것이 골동품으로 뒤덮인 세계.
낡아 빠진 다양한 물건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이고 쌓여 기괴한 성채를 구성하는 그 꼭대기에 3개의 머리를 지닌 거대한 뱀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메피스토펠레스!]
분노가 가득 담긴 사탄의 일갈에, 골동품 성채의 왕좌에 앉아 있던 메피스토펠레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나의 세계에 어서 와 친구. 뿔이 잔뜩 나 있네.”
[최근 아주 재미있는 짓을 해 줬더군.]
사탄은 메피스토펠레스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같은 대성군 소속의 군주라 해도, 메피스토가 한 짓은 선을 넘었다.
[내가 경고했지. 내가 하는 일에 신경 끄고 건드리지 말라고. 그런데 나 몰래 그런 짓을 꾸며?]
“흠. 내가 요즘 기억력이 나빠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물가물한데.”
[아직도 장난칠 기분이 든다면, 내가 기억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사탄의 본신으로부터 소름 끼치는 냉기가 흘러나와 골동품 성채를 뒤덮었다.
삽시간에 여러 골동품에 서리가 내렸고, 일부는 얼음으로 변해 산산이 부서졌다. 메피스토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지팡이로 가볍게 땅을 퉁 쳤다.
메피스토로부터 뿜어져 나온 별의 기운이 사탄의 냉기를 밀어냈다. 사탄의 세 머리는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벌렸다. 3개의 입에서 거대한 냉기가 모이는 순간.
[그만.]
메피스토도 이윽고 본신을 드러냈다. 중세 귀족 같은 모습을 한 화신체를 벗어던진 그는 거대한 검은 짐승의 모습을 띠었다.
[이 이상 나의 보금자리를 부수지 말아 주겠어? 이렇게 만드는 데까지만 해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다시 복구하려면 또 한세월 걸릴 거야.]
[메피스토!]
[나 귀 안 먹었으니까 이름 안 불러도 돼. 그보다 너 지금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검은 짐승이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지었다.
[네가 눈여겨보는 강유현 텔러가 책벌레와 마주쳤더군.]
[……뭐라고?]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야. 네가 찾아오기 바로 전까지 녀석의 시화를 보고 있었거든. 그리고 지금 지구에서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더라고. 한번 보겠어?]
메피스토는 그렇게 말하며 현재 강릉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사탄에게 보여 줬다.
사탄은 그 광경을 보며 세 쌍의 눈을 부릅뜨더니 메피스토를 죽일 듯이 쏘아봤다.
[네놈 짓이냐?]
[하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네. 내가? 이봐 사탄. 아무리 내가 미워도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너무하지 않아?]
[그러면 지금 벌어지는 사태는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지?]
[말했잖아. 책벌레가 나타났다고. 그리고 너도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다 파편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겠어?]
[…….]
[사탄. 아니, 루시퍼.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 또한 다른 ‘만들어진’ 녀석들과 달리 너와 같은 ‘기원’을 지니고 있어. 지금까지 이 세상의 흐름에 맞춰서 살아 왔지만, 내 머릿속 깊은 곳 기억의 저편에는, 아직도 그때의 지식이 남아 있다는 거야.]
[……그걸 알면서도 나를 방해하고 건드렸나?]
[방해? 말은 똑바로 하자. 나는 오히려 너를 도와준 거야.]
[뭐라고?]
사탄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유현에게 라플라스의 파편을 준 소문을 퍼뜨리고 그를 곤란하게 만든 주제에 도와줬다는 것은 무슨 뻔뻔한 말인가.
[생각해 봐. 너는 강유현 텔러가 이 굴레를 끊어 줄 해방자라고 생각해서 파편을 넘겨 준 거지? 그것도 파편 중에서도 가장 좋다고 알려진 라플라스를 말이야.]
[…….]
[부정하지 않는군. 평소의 너였다면 어떻게든 둘러댔을 텐데,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너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
메피스토는 그게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라플라스에 이어 맥스웰, 데카르트, 다윈을 얻었어. 그리고 그 부정형의 네 악마를 한데 모은 아포리아라는 새로운 악마마저 각성시켰지. 그래. 네 말마따나 녀석은 분명 해방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그렇다면 날 방해하지 마라.]
[아니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너도 알잖아?]
[파편을 저렇게 다루게 됐는데,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하지?]
[분명 강유현 텔러는 많은 파편을 모으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어. 그리고 이번에 또 대량의 파편을 회수했지. 하지만 아직 부족해. 아니, 오히려 너무 빨리 모아서 문제야.]
[……빠르다고?]
[모든 파편이 모여서 코덱스가 완성되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져야 해. 이대로 가면 코덱스는 1달도 걸리지 않아서 완성될 거야. 1달은 너무 짧아. 마땅한 준비를 갖추기엔, 턱없이 부족하지.]
[메피스토 너 설마…….]
[시간을 벌어야 해. 코덱스는 아직 완성돼서는 안 돼. 정말로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내 말을 들어.]
[그 녀석만큼 유능한 자는 없어!]
[너무 유능해서 문제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 ‘적당히’가 중요하다는 거야.]
사탄은 더는 메피스토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골동품으로 뒤덮인 행성을 떠났다.
[루시퍼. 어딜 가려는 거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시스템의 뜻을 거스른다고? 아무리 너라도 죽을 거야.]
사탄은 메피스토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필요하다면.]
[그녀가 슬퍼할 텐데?]
그녀라는 말에 우주 너머로 나아가려던 사탄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그 모습에 메피스토는 다시 화신체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봐. 넌 지금 엄청난 힘을 지녔어. 그런데도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만 하면 누구보다도 평화롭게 살 수 있어. 너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만.]
사탄의 목소리에 지금까지의 분노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듯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메피스토도 사탄이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 말하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지 뭐.”
메피스토는 두 손을 들며 항복의 자세를 취해 보였다.
이윽고 사탄의 거대한 본체가 아득한 우주 너머로 사라졌다. 메피스토는 골동품 왕좌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차피 바뀌는 건 없어. 친구.”
* * *
강릉에 펼쳐진 기묘한 막. 그것은 실시간으로 꿈틀거리며 크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이건 대체…….’
유현은 다시 강혜림과 서수민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염화는 여전히 닿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두 사람도 이 안쪽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기묘한 돔 형태의 막이 무엇이냐인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주군.]
그 순간 지면에 검은 활자가 모이더니 라플라스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유현의 앞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함에 몸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부디 저를 벌해 주십시오.]
“라플라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지?”
[일단 주군의 명령대로, 저는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싸움에 나섰습니다.]
라플라스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유현에게 전부 털어놨다.
권지아는 3명이나 되는 귀환자와 싸웠다. 하지만 밀릴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귀환자들을 어렵지 않게 쓰러뜨렸다. 라플라스가 도울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다음에 움직인 것은 언리쉬드의 간부들이었다.
그때는 라플라스도 나서서 그녀를 도왔다. 권지아는 갑자기 등장한 라플라스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유현이 도우라고 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납득했다.
[처음에는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중에 일부는 저의 눈이 먹히지 않는 자들이 더러 있었지만, 아가씨가 그들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끌 수 있었죠.]
“파편 소유자가 있었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되다니.”
[그 남자가 나선 것은 그때였습니다. 진청운. 주군께서 경고를 하셨던 남자입니다. 그는 제 눈으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파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힘은, 권지아 아가씨도 대항하기 힘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권지아가 만전이었다면 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3명이나 되는 귀환자와 더불어 언리쉬드의 간부들의 협공을 막으며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진청운은 애초에 그 점을 노렸다. 일부러 권지아의 힘을 빼고, 자신이 나서서 완전히 그녀를 제압한 것이다.
유현은 치밀어 오르는 살심을 억누르며 라플라스에게 물었다.
“진청운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파편을.]
라플라스는 그 광경을 잊을 수 없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아가씨에게 파편을 강제로 넘겼습니다.]
“뭐?”
[그리고, 동시에 검은 씨앗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아가씨의 몸에 닿는 순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거대한 막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지만,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나가며 주변 산맥과 일대 도시까지 집어 켰죠.]
“진청운은, 어떻게 됐지?”
[그 또한 저 안쪽에 있습니다. 저는 우선 주군께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최대한 빠르게 물러났는데, 그자는 저를 보면서도 잡으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주군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혜림 씨와 수민 씨는 봤나?”
[예. 두 아가씨 또한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데카르트와 다윈이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라플라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결국,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기괴한 형상은 진청운이 무언가를 노리고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저 안쪽에 무엇이 있을지는 유현도 몰랐다. 다만, 권지아에게 파편과 이야기의 씨앗이 반응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감안하면.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할 별세계가 펼쳐져 있으리라.
‘들어가야 해.’
이 안쪽에 일행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게다가 안쪽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일반 시민들까지 갇혀 있을 터.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 돔이 확장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영민아.”
[아, 네 형! 지금 어디세요?]
“강릉 쪽이다. 정리는 다 끝났냐?”
[예. 조금 전 끝나고 저도 지금 위로 올라가고 있어요.]
“바로 강릉으로 와라.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
[……어떤데요?]
“지아 씨가 함정에 빠졌고, 근처에 이상한 것이 생겼어. 거대한 돔 형태의 막인데, 외부에서 안쪽을 확인할 수가 없다. 사상세계가 폭주해서 세상을 침식한 형태보다 더 기이해. 혜림 씨와 수민 씨는 안쪽으로 들어간 것 같고, 통신이 먹히지 않는다. 나도 곧 돌입할 예정이고.”
[알았어요. 저도 바로 갈게요.]
“조심해라.”
그 연락을 끝으로 유현은 셀린에게 연락을 취하려다가 멈칫했다.
‘맞다. 이제 녀석은 내 서재를 관리하지 않지.’
유현이 돌아온 이후, 셀린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유현의 서재를 전부 다 넘겼다. 가만히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심하다고 했던가. 그녀가 얼마나 많은 회유와 협박을 받았을지 생각해 본 유현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했다.
셀린은 최대한 빠르게 지구로 발령받아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본사로 향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을 일은 요원했다.
‘어쩔 수 없지.’
유현은 기이한 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막은 너무나도 손쉽게 유현의 손을 허락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유현을 환영해 줬다.
유현은 마음을 다잡고 거대한 돔 안으로 들어갔다.
* * *
“……이건.”
마치 사상세계를 들어갔을 때와 같이, 몸이 얇은 무언가를 관통해서 들어간 감각을 느낀 이후.
눈을 뜨고 본 광경에 유현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뒤틀린 세계였다. 수십 개 이상의 세계의 파편이 서로 뒤섞이지 못한 채 각자의 형태로 존재하는 누더기 같은 꼴이다.
그중에서는 유현에게도 익숙한 일부 광경이 더러 보였다.
‘저것은 종말의 9번째 시련에서 나왔던 오벨리스크.’
그것만 있지 않았다.
13번째 시련이었던 벌레무리.
17번째 시련이었던 파멸의 십자가.
22번째 시련이었던 본 카타콤.
유현의 기억 속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종말의 시련들이 일부의 형태로나마 내부의 세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종말의 시련에 그치지 않아. 이 세상의 풍경 일부에는 사상세계의 것도 포함되어 있어. 무너진 전각, 서양식 건축물, 악취를 풍기는 늪지대까지. 모든 것이 섞인 거야.’
성령들조차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지 당황하고 있었다.
유현은 차분한 시선으로 이곳이 어딘지 분석했다.
라플라스는 진청운이 파편과 함께 씨앗을 사용했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파편으로 무언가 더 추가했다면, 이 세계는 권지아가 지금까지 겪어 온 600회차가 넘는 모든 기억이 뒤섞인 세계라는 말이 된다.
이야기의 씨앗을 활용했지만, 사상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이질적이고, 제네시스 시스템으로도 명확하게 정의가 되지 않는 이세계에 가깝다.
‘그래. 굳이 이름을 짓는다면, 회귀자의 악몽이라고 불러야겠군.’
이곳은 권지아의 모든 회차의 기억들이 뒤틀린 형태로 구현된 악몽의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