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32화
펼쳐진 영상에서 데미알로스가 타락한 게오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이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데미알로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느낌을 받게 했다.
영상은 계속됐다.
데미알로스는 이후에도 게오른의 상태를 몇 번이고 확인하러 찾아왔고, 유배지에 온 텔러들이 이곳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수작을 부렸다.
그 모든 광경이, 게오른의 시선을 통해 모두에게 전달됐다.
“허.”
“세상에.”
글라칼리스에서 벌어진 일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든 텔러들에게 거대한 해일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본래 성령이었던 게오른이 무언가에 의해서 타락하고, 하계에 영락해서 세상을 파괴시키는 괴물이 됐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면서도 서서히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데미알로스는, 그곳을 유배지로 이용해서 지금까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해 왔다.
그 충격적인 진실에 대부분 텔러들이 기함했다.
“데미알로스 이 미친 새끼!”
성미가 불같은 셀레스티나는 데미알로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데미알로스가 지금 한 짓은 단순히 시화를 조작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텔러가 무려 하나의 세계를 망가뜨린 것이다. 이것은 엑소도스 녀석들도 하지 않는 미친 짓이었다.
무엇보다 데미알로스의 행동에 치가 떨리게 만드는 것은, 성령을 건드렸다는 것.
“이, 이 사실일 알려지면…….”
“성령님들이 본사를 보이콧 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알려져서는 안 돼.”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어. 이미 소문이 퍼졌을 거야.”
이사급 텔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들끼리 뭐라고 대화를 나눴다.
지금 데미알로스가 한 행동은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이대로 가면 천체주식회사가 붕괴할지도 모르는, 그런 사태.
천체주식회사 소속 텔러가 성령을 기만한 것도 모자라, 그 존재를 망가뜨리고 하나의 세상을 자기 멋대로 주물렀다는 것은 그 정도의 일이었다.
“당장 데미알로스를 죽여야 합니다!”
“이건 볼 것도 없습니다! 증거가 저렇게나 뚜렷하고 확고하지 않습니까!”
이 사건을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것을 선택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단순히 감추려고 하자니 이미 죽어 버린 게오른의 모습을 목격한 성령이 너무 많았다. 숨기다가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면, 본사는 오히려 성령들에게 괘씸하다는 이미지까지 심어 주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자니 너무 큰일이었다.
단순히 성령들이 이쪽을 탓하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엑소도스와 희극단패. 혼성계를 삼분하는 나머지 두 집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쪽을 필사적으로 물어뜯고 어떻게든 무너뜨릴 생각이리라.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데미알로스의 생사는 만장일치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롯피우트를 향했다.
이 모든 결정권은 회장에게 있었기에, 그들은 롯피우트의 말만 기다렸다.
“이거 참.”
롯피우트는 그 기대 어린 시선에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평소에 겉으로는 존경하네 어쩌네 하면서도, 눈동자 아래에서는 이 자리를 넘보기 위해서 시종일관 기회를 보던 놈들이다.
정작 사건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니 이제는 이쪽의 위명에 기대려고 한다.
능력은 있지만, 하나같이 패기가 없는 녀석들 투성이다.
“시끄러우니 다들 조용히 있어라.”
롯피우트의 말에 조금 전까지 재잘재잘 떠들던 이사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따지고 싶어도, 지금 롯피우트가 내뿜는 기세를 목도하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고 만다.
롯피우트도 겉으로는 여유를 가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은근하게 노기를 느끼고 있었다.
데미알로스. 고작 부장밖에 되지 않은 저 햇병아리 같은 녀석이 자신이 이룩하고 쌓아 온 본사를 근본부터 뒤흔들 뻔했다.
그 발칙함을 떠올리기만 해도 당장 녀석을 몇 번이고 쥐어 짜내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노련한 롯피우트는 자신의 감정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말하라.”
조금 전부터, 저 남자는 이 모든 사건과 관련 없다는 듯 표표히 웃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절망과 패닉의 나락에 빠져서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도 유현은 가만히 서 있었다.
거친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혼자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 우직한 섬 같이.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니, 끝까지 들어주마.”
그것은 아직 녀석이 드러내지 않은 패가 더 남 아있다는 소리.
롯피우트는 그런 유현의 속뜻을 헤아려, 직접 물어봤다.
회장님의 그 영예로운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장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아직 이 사건이라고 할 것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끝나지, 않았다고?”
“그게 지금 대체 무슨 소리지?”
모두의 시선이 다시 유현을 향했다.
데미알로스의 범행을 밝힌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니.
“여러분은 전부 데미알로스가 혼자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거야…….”
“증거가 이렇게나 명백한데.”
그 말고 뭐가 더 있냐는 소리였다.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시화실 소속 샤마트 과장이 대성군 극락정토와 함께 저지른 일이요. 지금 그 샤마트 과장은 폐기함에서 탈출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과연 누가 그런 샤마트 과장을 탈출시켰을까요?”
“그건…….”
“그리고, 더 묻겠습니다. 게오른은 비록 힘의 절반을 빼놨다 하더라도 성령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장급 텔러라 해도, 그런 존재를 감히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보십니까? 부장급 텔러가 성령을 그렇게 타락시킬 수 있습니까?”
“…….”
모두가 말이 없어졌다.
데미알로스가 몰고 올 파란 때문에 당황한 나머지, 가장 기본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을 넘겨짚고 말았다.
모두의 머리에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 아무리 데미알로스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저 정도의 일을 혼자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 조력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데미알로스의 조력자라면 최소 같은 부장급은 돼야 할 텐데, 그가 친하게 지내는 텔러 중에서 그만한 짓을 저지를 인물이 있던가?
“여러분들은 지금 다른 부장님 중에서 범인을 찾으시는 것 같군요.”
그들의 생각은 유현의 눈에도 뻔히 읽혔다. 그래도 나름 이성적이어야 할 그들이 저 정도로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낼 만큼, 이번 사건이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유현은 그들에게 정답을 주기로 했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셔도 될 텐데 말이죠.”
“더 높은 곳이라고?”
“설마……!”
일부 부장급 텔러의 시선이 임원들을 향했다.
중앙실 소속의 이사급 텔러들. 그들 중에서 데미알로스와 손을 잡은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다.
그것에 의문을 품는 것보다도 텔러들은 유현의 말에 납득을 했다.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유배지와 관련된 일은 단순히 부장급 텔러가 제멋대로 벌이기엔 선을 넘어도 제대로 넘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사급 텔러가 개입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충분한 가능성.
아니, 이것이 아니면 말이 되지 않을 정도.
“무, 무슨!”
“우리가 그랬단 말인가!”
일부 이사들이 의심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나쁜지 눈에 힘을 주며 유현을 노려봤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 자부심이 있는 자들이다. 지금까지 천체주식회사의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유현이라 하더라도, 감히 자신들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사님들 전부가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사님 중에서…… 이 일을 벌인 진짜 범인이 하나 숨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을 뿐이죠.”
“그게 누구라는 거지?”
“그것을 지금 알아보려고 합니다.”
유현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가만히 그것을 듣고만 있던 데미알로스는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는 이미 외통수에 몰렸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 모든 일은 자신의 선에서 끝내야만 했다.
스스스스.
데미알로스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삽시간에 빛의 고리를 잠식해 산산이 부셨다.
“엇?”
“저, 저 녀석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라 모두가 당황스러워했다. 데미알로스를 속박하는 것은 상당한 힘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끊어 낸 것이다.
데미알로스는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하는 것보다 먼저, 데미알로스가 움직였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칠 수는 없다.’
데미알로스는 자신의 수준을 잘 알았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하더라도, 부장급 텔러들과 이사진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법정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내부 감찰실과 외부의 수호실이 나서게 된다면 잡히는 것도 순식간이다.
데미알로스는 도망칠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도망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저 녀석과 함께 죽는다.’
지금까지 숨겨 놓은 모든 힘을 한꺼번에 개방했다. 데미알로스의 섬뜩한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이 멍청한 녀석은 자신이 갑자기 이렇게 기습을 당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인정한다. 강유현은 분명 대단하다.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재능과 가능성을 지닌 텔러다.
하지만, 녀석은 너무 설쳤다.
자신이 승리했다고 확신에 차서 방심하고 있는 지금, 시간으로는 0.1초도 걸리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이야말로 유일한 기회.
데미알로스의 오른손이 길게 늘어나며, 검은 관수가 되어 유현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터업!
“……!”
데미알로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내지른 비장의 일격이, 한 존재의 손에 막혔기 때문이다.
“야. 이거 선 제대로 넘네.”
붉은 머리카락과 자신이 그토록 무시했던 인간의 모습을 한 텔러.
이 자리에서만 놓고 보면 부장이 된 경력이 가장 짧아서 모두의 무시를 자주 받기 일쑤인 그녀가,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구속도 멋대로 해제하고, 이제 증인을 죽이려고 들어?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거, 확실히 자기가 잘못했다고 시인한 거 맞지?”
“셀……레스티나!”
“어. 그래. 내 이름 불러 줘서 고마운데.”
화르륵.
셀레스티나의 몸에서 붉은 화염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흡사하면서도, 파괴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불꽃.
그 광경을 본 일부 텔러들은 왜 셀레스티나가 부장의 자리에 올라갔는지 새삼 떠올렸다.
혹자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녀 스스로가 시화실을 가겠다고 선택하지 않았다면, 셀레스티나는 감찰실이나 아니면 수호실을 가게 됐을 거라고.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치이이익!
“크으으윽!”
데미알로스의 오른팔이 불에 타올랐다. 어떻게든 어둠처럼 검은 기운을 흘려내서 저항하려고 했지만, 셀레스티나의 성염(聖炎)은 그런 데미알로스의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함께 태워 버렸다.
셀레스티나는 다른 텔러들과 다르게 자신이 시화를 담당하던 계약자에게 ‘힘’을 선물 받은 존재.
그녀가 한때 시화를 보여 줬던 자는 한 세계의 영웅이라 불렸던 자였다.
“이렇게 다들 보는 앞에서 그렇게 움직이면, 예? 제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요. 이 문어 대가리야.”
그 힘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전투력만 놓고 보면 모든 부장급 중에서도 단연코 최강이었다.
셀레스티나가 주먹을 쥐고, 그대로 데미알로스의 얼굴에 메다꽂았다.
퍼억! 붉은 화염이 휩싸인 주먹이 데미알로스의 안면을 지져 버렸다. 데미알로스가 뭐라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셀레스티나의 주먹이 잔상을 남기며 그의 입을 후려쳤다.
촉수가 찢겨 나가고, 데미알로스가 녹색 피를 흘렸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이러고 싶었던 것을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
그런 데미알로스를 보며 셀레스티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포악한 미소에 같은 부장급 텔러들이 오한을 느끼며 몸서리칠 때, 유현이 나섰다.
“셀레스티나 부장님. 그는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범인이라 함부로 죽이면 안 됩니다.”
“나도 알아. 내가 바보인 줄 아니? 힘 조절은 했어. 그리고 너, 방금 죽을 뻔한 거 알지?”
“셀레스티나 부장님이 구해 주실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하여간 말은 잘해요.”
셀레스티나는 축 늘어진 데미알로스를 놓았다. 데미알로스는 자리에 주저앉듯 쓰러졌고, 이윽고 불꽃의 고리가 그의 몸을 속박했다.
조금 전의 것과는 달리,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셀레스티나 특제 구속구였다.
모두가 법정에서 벌어진 무력 사태에 난감함을 표하고 있을 때, 유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 방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데미알로스는 공범이 있다고 말을 한 셈이군요.”
“그래서, 그자가 누구란 말이지?”
“여러분들도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유배지에 대한 안건을 누구보다도 먼저 올렸고, 본사의 공문을 내리거나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으며 수정의 권한을 지녔으며, 게다가 이 사태를 가장 높은 곳에서 관망할 수 있는 분.”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쥔 게오른의 파편을 재차 발동시켰다.
처음 영상이 시작됐을 때 보였던 것은 게오른을 내려다보는 데미알로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보여 주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있던 일이었다.
유현이 일부러 보여 주지 않았던 진짜 범인이 담긴 영상.
“그러지 않습니까? 하타 전무 이사님.”
인자해 보이는 거북이 형태의 텔러, 하타 전무 이사가 게오른에게 무언가 말을 거는 모습이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모두가 입을 쩍 벌리며 하타를 향해 저게 정말이냐는 시선을 보냈다.
하타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늙은 거북이는 어떠한 동요도 없는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한 방 먹었군.”
그런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파앙!
하타 전무 이사가 바로 옆에 있는 롯피우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초신속의 일격이었다.
저렇게 늙은 텔러가 저 정도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그리고, 그 위력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는 것까지 누가 알았을까.
퍼엉!
하타의 주먹에 맞은 롯피우트의 머리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