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30화
가르디안에서 생존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도시의 광장에 모여 있었다.
도시에는 평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제단에서 올라오는 온기는 사실상 열쇠검과 피올드의 덕분이었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법진이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혹시나 원정대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걱정이 드는 몇몇은 마을의 바깥에서 혹시 모를 생존자들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바깥에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러 갔던 사람들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 그쳤어!”
“그치다니? 뭐가?”
“눈이, 눈이 그쳤다고!”
그는 자신이 바깥에서 보고 온 것을 빠짐없이 말해 줬다.
눈이 그쳤다고. 차가운 바람이 더는 불어오지 않는다고. 하늘을 가득 뒤덮었던 먹구름이 연해지며 서서히 개이고 있었다고.
“이 지옥이, 저주가 끝났어! 원정대가 승리한 거야!”
그 희열에 가득 찬 외침에, 사람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향했다.
* * *
“정말로, 끝이야?”
“우리가 이긴 거지?”
게오른이 쓰러지고.
서리거인들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그대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살아남은 가르드의 전사들은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게오른의 시체가 있는 곳을 향했다.
그 앞에 선, 찬란한 황금빛 검을 쥔 남자의 등을.
한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걷힌 먹구름의 사이로 새하얀 빛이 기둥처럼 내려왔다. 빛이 레안의 모습을 비췄다.
비슷한 광경이 다른 곳에서도 펼쳐졌다. 곳곳에서 빛이 내려왔다. 갈라진 구름의 틈새로 떨어지는 그것은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따뜻한 태양의 온기였다.
모두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새하얀 김이 빛에 닿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난 혹독한 겨울이 계속됐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얼어붙은 대지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저길 봐!”
게오른의 시체 너머, 레안이 멍하니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단순히 얼음이 녹는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면에 펼쳐진 새하얀 허허벌판이 갈라지고 무너지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광활한 바다였다.
부서진 빙산들이 바다의 위에 떠다니고, 하늘에서 내린 빛이 그런 바다에 일파만파 튕겼다.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먹구름의 사이로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그들이 서 있던 곳,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싸우던 장소는 대륙의 최북단.
세상의 끝이었다.
“아.”
그토록 눈에 담고 싶었던 그들의 고향이 보이는 순간, 누군가가 그런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도망치고 도망치다, 마지막에 싸움을 택했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며, 전우의 시체를 넘어서 살아남은 끝에.
결국, 그들은 과거에 선조들이 그렇게 외치던 위대한 구원의 땅에 도착했다.
단순한 바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게 구원의 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단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이것이, 그들이 염원하던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 지옥의 끝에 있던 것은 절망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결국 희망을 마주했다.
[축하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시화에 담았습니다!]
[성령 게오른이 저주받은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동토의 저주가 해제됩니다.]
[시스템 창이 활성화됩니다.]
모든 이야기를 끝내자 시스템 창이 본격적으로 반응했다. 먹구름이 걷히고, 그 위의 별들이 가득해졌다. 가려진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청명한데, 그 위에 반짝이는 별빛은 눈부셨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고마워요.]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케이라?’
[당신에게 많은 짐을 지웠네요. 정말로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들의 세상은 구원받았어요.]
‘아니요. 당신의 덕분입니다. 케이라 씨가 안배를 남기지 않았다면, 저도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부탁이요?’
[네. 제 역할은 이제 끝이에요. 시스템과 맺은 계약도, 여기까지고요. 그러니 마지막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레안과 만나고 싶어요.]
‘……기꺼이요.’
유현이 그렇게 대답한 순간 그의 정신이 멀어졌다.
아니, 멀어진 것이 아니다. 케이라의 의체와 본래 자신의 모습이 분리된 것이었다.
유현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케이라는 그런 유현에게 엷게 웃어 보이고는 저 앞에 있는 레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불안정했고, 그 몸은 서서히 텍스트로 변해 흩어졌다.
그래도 케이라는 어떻게든 레안과 만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자신의 소멸을 유예했다.
본래라면 이뤄질 수 없는, 찰나의 기적.
유현은 그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케이……라?”
레안은 뒤에서 다가온 케이라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의 케이라가 유현이 아닌,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진짜 그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쉿.”
레안은 케이라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케이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레안의 입술에 자신의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사라지기 전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케이라는 레안의 입술에서 손가락을 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춰요. 우리.”
“……!”
그 말에 레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언젠가 그는, 위령제 때 케이라에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끄윽.
그는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필사적으로 참으려는 듯 목에 힘을 줬다. 울면 안 된다. 여기서 슬퍼하면 그녀를 볼 면목이 없다.
이윽고 감정을 가라앉힌 레안은 웃으면서 케이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응. 기꺼이.”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췄다.
대륙의 최북단. 절벽 너머로 아름다운 대해가 펼쳐진 무대의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고정하며 스텝을 밟았다.
모두가 그 눈부신 광경을 바라봤다.
빈말로도 아름다운 춤이라고 볼 수 없었다. 춤에 대해서 모르는 케이라와 그마저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하는 레안의 춤사위는 그저 서로를 껴안은 채 단조롭게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누구도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서로를 향해 행복하게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의 모습이, 주위에 흩날리는 새하얀 빛이, 마치 한순간의 꿈처럼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사라질 것 같아서.
사람들은 그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레안. 전 지금 정말로 행복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케이라.”
비록, 그 끝이 정해져 있더라도 두 사람은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즐겁게 웃으면서 떠들 수 있으니까.
이제는 사라지게 될 풍경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토록 기억될 거니까.
그러니 춤을 추자. 웃으면서 보내 주자.
스텝이 이어지고, 서로가 서로의 흐름을 보듬어 주고.
그렇게 모든 춤이 끝나는 순간.
“사랑해. 케이라.”
“저도요.”
케이라는 빛과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녀의 허리와 손을 잡고 있던 레안의 팔이 힘없이 허공을 맴돈다.
활자로 변한 케이라의 일부가 그대로 레안의 몸에 스며들었다.
두 사람의 춤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은 레안 혼자였다.
여운을 곱씹던 레안은 손끝에 남아 있는 케이라의 흔적을 주시하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전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레안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그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었군요.”
“보시다시피.”
“당신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유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현.”
“강유현이라. 좋은 이름이네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레안은 유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덕분에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었어요.”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이룬 거죠.”
“그래도…….”
“정 고마워하고 싶으면, 이것만 약속해 주세요.”
“그게 뭐죠?”
“레안. 당신은 이제 이 세상의 성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상처 입은 세상을 보듬으세요.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훌륭한 성령이 되세요. 제가 할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네. 얼마든지요.”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멋진 세상을 만들어 보일 각오로 가득했다.
모두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뒤에서 헨더의 외침이 들려왔다.
“링우그! 정신 차려 링우그!”
헨더는 아직도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링우그를 붙들고 있었다.
“봐. 이 멍청아. 싸움이 끝났어! 이 지옥도, 겨울도 끝났다고! 그러니까 눈 좀 떠!”
[괜찮다.]
그런 헨더를 대신해서 대답한 것은 피올드였다.
[그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죽겠지만,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위대한 자매님…….”
[그리고, 레안…….]
피올드의 몸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의 하반신은 부서졌고, 겨우 남은 몸뚱이는 대검을 지탱해서 버티고 있었다.
피올드의 얼굴을 가린 면사가 부서지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케이라의 모습과 닮았지만, 그보다는 더 앳된 모습. 피올드는 레안을 향해 웃어 보였다.
[훌륭하다.]
“피올드님도……도와주셔서, 모자란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너를 믿은 게 아니다. 그저, 큰언니를 믿었을 뿐이지. 내 선택은 언제나 틀렸어. 겨우 바꾼 마지막 선택마저도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냥 틀린 것만은 아니었구나.]
피올드는 그걸로 족했다. 큰언니와 마지막으로 해후를 나누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녀가 만족한 얼굴로 떠나간 것을 보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의 삶도 이제 곧 끝이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남은 힘을, 더 나은 곳에 써야 하지 않겠는가.
[큰언니. 그리고 언니들. 저도 지금 곧 따라가겠습니다.]
피올드의 몸이 부서졌다.
그녀가 쥐고 있던 검도 함께 무너지며 이윽고 새하얀 활자로 변했다.
허공을 흩날리는 피올드의 잔재는 헨더가 붙들고 있는 링우그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로 스며들었다.
벌어졌던 상처가 아물고, 창백하게 질렸던 링우그의 안색이 다시 원래 색을 되찾았다.
“리, 링우그! 야! 정신이 들어?!”
“헨……더?”
“그래. 그래 이 새끼야! 살았구나! 살았어!”
“싸움……은?”
“우리가 이겼어! 이겼다고! 이제 지긋지긋한 겨울은 끝이야!”
링우그는 그 희망적인 소식에 기뻐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유현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서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질적이라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걸 감안해도, 링우그는 자연스럽게 유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누나, 라고 부르면 이제 실례겠죠?”
“형이라고 불러.”
“헤헤.”
헨더의 부축을 받은 링우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으로 상처를 추스른 가르드 전사들이 하나둘 다가와서 섰다. 벨라가 두 팔로 링우그와 헨더를 껴안았다. 가르드 전사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면서 기뻐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레안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선이 느껴진다. 별들의 시선이. 이제는 그와 같은 자리에 선 사람들의 눈빛이.
레안의 몸이 황금빛에 휩싸였다. 완전한 성령이 된 그의 몸은, 더 이상 하계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등천(登天).
레안의 몸이 빛과 함께 위로 솟아올랐다.
새로운 성령의 탄생에, 주변에 몰려든 다른 성령들은 모두 그 광경을 지켜봤다.
누군가는 경계를, 또 누군가는 순수한 축복을.
별의 자리에 오른 레안은 주변 성령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모두에게 널리 알렸다.
[‘위대한 가르드의 수호자’. 레안이라고 한다.]
* * *
레안이 하늘로 올라가고, 시스템이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을 때.
유현의 옆에 커다란 창이 떠오르며 낯익은, 이제는 그리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유현 씨!
-선배!
-유현!
-형!
유현은 살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이 상황이 끝난 걸 알고 바로 연락을 취했단 말인가.
“여러분들? 대체 어떻게……?”
-그게, 이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네. 갑자기 연결이 돼서…….
그 말보다도 유현의 머릿속에 든 한 가지 생각.
“설마, 제가 그 모습으로 싸운 것도…….”
-……하하.
유현의 말에 모두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의체였다고는 하나, 유현에게는 아는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니, 살짝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유일하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강혜림이 눈치 없이 말했다.
-되게 예쁘셨어요! 유현 씨!
“……혜림 씨.”
-그런 모습으로 싸우다니. 그래도 힘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얼마나 잘 움직이시던지…….
“……혜림 씨는 제가 돌아가면 딱밤 예약입니다.”
-에엑?!
강혜림이 놀라고 자시고, 유현은 단호했다.
권지아와 서수민도 그런 말을 할까 고민했었는데, 강혜림이 먼저 지뢰를 밟아 준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를 살피던 권지아가 조심히 물었다.
-바로 돌아오지 않는 건가?
“저도 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죠.”
당장에 지니고 있는 대부분 이야기와 파편들. 그것을 돌려받아야 했으니까. 그리고 해후의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싶었고.
“그래도 우선 본사에 들렸다 가겠습니다.”
그런 유현의 오른손에는, 게오른의 심장에 박혀 있던 홍옥의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조각 안쪽에, 그가 그토록 찾던 코덱스의 파편이 담겨 있었다.
“당장에 처리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펜타그램의 부장 데미알로스.
이젠 그가 역공을 당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