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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29화 (329/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9화

유현이 뿜어내는 청아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며 주변 일대를 집어삼켰다.

서리 거인들이 전부 자리에 멈춰 섰고, 기절해 있던 가르드인들이 하나 둘 눈을 떴다.

칠마흑천신공의 강렬한 기운이 하늘의 먹구름을 밀어내 어두운 하늘이 순간이지만 옅어졌다.

그 틈새를 비집고 별빛이 하계의 광경을 내려다봤다.

[와, 세상에.]

[아름답다.]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별들의 관심은 전부 유현을 향했다.

하계의 존재로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 청아한 아름다음과, 그 이상으로 눈을 휘둥그레 만들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까지.

단지, 그뿐일 텐데도 모두가 그 광경에 매료됐다.

그것은 백화 매니지먼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칠마흑천신공. 내가 가르쳐 준 기술이다.”

서수민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강혜림을 비롯한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현이 지금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 서수민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수민이 사용하는 내기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는데, 지금 유현이 보여 주는 것은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흰색이었다.

파괴력은 덜해 보이지만, 오히려 어떠한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은 정순함이 느껴졌다.

“저 기운의 색깔은 완전히 다른데…….”

“왜 내공이 흰색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저 모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보다 대체 어디서 저만한 힘이 남아 있었던 걸까요?”

“모든 힘을 소진한 게 맞다. 저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의념’ 때문이지. 육체를 초월한 정신의 힘. 그것으로 바깥의 힘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는 거야.”

“그, 그렇다면……!”

강혜림이 희망에 차서 외쳤다.

“지금 상태라면, 분명히 유현 씨가 전부 다 이길 수 있는 거죠?! 맞죠?!”

“안 돼.”

서수민의 단호한 대답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겨우 좋아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지만, 서수민은 정정할 것은 정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육체가 수많은 상처를 입었고 의념을 일깨웠다 해도, 이제 막 초입에 들어선 수준이야. 그런데 지금 저렇게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은, 본인의 한계를 넘어선 행동이라는 거지.”

“그렇다는 건…….”

“갓 태어난 아기가 두 다리로 달리는 꼴이야. 분명히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로 대단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거다. 길어도 1분. 그 이상은 안 돼.”

지금 저 힘을 사용하고 있는 유현이 누구보다도 가장 잘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터다.

그걸 알면서도 유현이 저렇게까지 무리하는 것은, 스스로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 그의 집념.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세계지만, 유현의 마음은 전해졌다. 그걸 알기에 서수민의 눈동자는 화면 속의 유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고작, 1분이라니.”

“너무 짧잖아.”

모두의 입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말에 서수민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1분은 짧지.”

저만한 힘을 견디고 있는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다. 1분 뒤 힘을 전부 소모한 뒤에 혹사한 육신이 어떻게 될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1분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울 거다.”

* * *

흩날리는 꽃잎에 서리 거인들이 멈춰 섰다.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서리 거인들이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 새하얀 꽃잎에 닿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이상으로 유현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손에 쥔 저 보자기에 휩싸인 검. 저것이 레안에 손에 쥐어지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끝이었으니까.

그러니 막는다.

서리 거인들이 유현의 앞에 벽을 이루었다.

“비켜.”

유현이 자리를 박찼다.

동시에 꽃향기가 풍기며 그 신형이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뚫고 나간다.

그 의지를 구현하듯 새하얀 꽃잎 일부가 뭉치더니 거대한 창이 되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일점돌파.

꽃잎의 창에 닿은 서리 거인들이 봄바람의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서리 거인들은 재생하지 못했다. 육체가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데미지였다.

서리 거인의 진영에 거대한 길이 생겼다.

그 뚫린 길을 통해 유현이 내달렸다.

크오오오오!!!

위기를 직감한 게오른이 입을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입에서 나온 것은 단순히 외침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서리를 머금은 바람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며 유현을 집어삼키듯 해일처럼 밀려왔다.

앞서 나가던 백색의 창은 서리 바람을 뚫지 못하고 얼어붙더니 이윽고 파편처럼 흩어졌다.

타락했다 하더라도 게오른은 성령. 그의 숨결은 이야기조차 얼려 버리는 끔찍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닿으면 죽는다. 유현은 그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분명 늦고 만다. 이대로 저것을 뚫고 가야만 했다.

일점으로 뚫고 나가는 것은 안 된다. 힘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더 늘리면 되는 것이었다.

하나로 안 된다면 두 개를. 두 개로 안 된다면 세 개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등 뒤의 꽃잎이 날개처럼 펼쳐지며 이내 다시 창의 형태를 만든다. 하나 둘 셋, 이윽고 9개로 늘어난 꽃잎의 창이 맹렬히 회전했다.

칠마흑천신공 일마 변초식 화점천.

아홉 줄기의 소용돌이가 하나로 합쳐져 공간을 꿰뚫었다. 서리 바람과 맞닥뜨린 두 기운이 크게 충돌하는 순간 화점천은 더욱 강하고 멀리 뻗어져 나갔다.

‘이거였어.’

유현은 이 순간, 자신이 펼친 기술을 보며 그토록 닿지 못했던 경지에 올랐음을 깨달았다.

서수민이 보여줬던 진정한 화점천. 그것이 이번에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펼쳐졌다.

그것이 만족감을 느낄 새도 없이, 유현은 갈라지는 서리 바람의 중심을 내달렸다.

서리 바람의 기운을 맞아 더욱 강해진 서리 거인들이 유현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겁다.’

분명 몸은 날아갈 것 같은데, 그래도 무거웠다. 세상이 모두 자신을 찍어 누르기 위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서리 거인들도, 게오른도, 손에 쥔 열쇠검도, 등에 업은 모두의 기대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족쇄가 되어 나아가는 몸에 제동을 걸었다.

이것이, 레안이 마주 보고 살아가던 세상. 그가 짊어지던 무게.

‘그래도, 멈출 수 없어.’

뚫고 나아가라.

벽이 있다면 벽을 부숴서라도 멈추지 마라.

촤악─!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두르자 새하얀 강기가 사방으로 격발됐다. 거기에 닿은 서리 거인들의 몸이 우수수 터져 나갔다. 대형 서리 거인도 한 합을 버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은지 서리 거인들이 다른 행동을 취했다.

서리 거인들은 더욱 한곳으로 뭉쳤다. 작은 녀석들도, 대형 녀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형 서리 거인들이 모이고 합쳐지며 더욱 거대한 모습을 취한다. 그것은 게오른보다는 작았지만, 그것에 필적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빠직! 빠드득!

아무리 서리 거인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덩치를 유지하는 것은 벅찬지 움직일 때마다 몸에 금이 가고 있었다. 저 상태로 내지를 수 있는 것은 주먹질 한 번이 전부. 그 끝으로 불완전한 육체는 붕괴하고 만다.

그러나, 서리 거인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한순간 상대방의 발목을 붙들기만 하면 이쪽의 승리였다.

유현도 그것을 알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혹은 조금이라도 밀려나면 거기서 끝이라는 걸.

화점천은 방금 전 서리 바람을 뚫느라 힘을 소모했다. 지금 상태로는 저 최후의 서리 거인을 완전히 돌파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다.

“비켜어어어!!”

이번에 펼치는 절기는 2번째인 흑사뢰가 아닌 3번째 마룡회천의 변초식이었다.

칠마흑천신공 제 삼마 마룡회천.

변초식 천압묵파(天壓墨波).

유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그것이 이윽고 서리 거인의 몸에 닿는 순간, 거대한 압력이 서리 거인의 몸을 위에서 짓눌렀다.

짓눌린 서리 거인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다. 가까스로 유지하던 불완전한 육신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유현은 쓰러진 서리 거인을 넘어서며 높이 뛰어올랐다.

“레안!”

그 목소리를 들었을까.

게오른의 왼손에 쥐어진 레안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이윽고 자신의 몸을 쥐고 있는 게오른과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유현을 번갈아 발견했다.

“케이라!”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름을 외치는 것과 동시에.

유현의 아래에 깔려 있는 서리 거인의 몸이 분해되며, 다시 원래의 작은 서리 거인들이 튀어나와 유현을 향해 솟구쳤다.

그것은 어떻게든 게오른에게 유현을 보내지 않겠다는 얼어붙은 세계의 끔찍한 망집.

동시에 유현은 오른손에 쥔 검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 휘둘렀다.

게오른이 눈을 부릅떴다. 아직 팔뚝까지 남아 있는 오른팔과 왼팔을 교차시키며 자신의 가슴, 붉은 홍옥이 박혀 있는 곳을 보호했다.

유현이 내지른 새하얀 참격이 그런 게오른의 두 팔뚝을 잘랐지만, 거기까지였다.

참격은 홍옥에 닿지 못했다. 서리 거인들이 유현의 발목과 종아리, 팔을 붙잡으며 늘어진 것 때문에 검격이 흐트러졌다. 그 때문에 위력이 부족했다.

다음은 없다. 유현은 방금 그것으로 의념의 끝을 고했다. 몸을 휘감던 강렬한 힘이 모두 사라지며 허공에 녹아내리듯 흩어졌다.

[아, 세상에.]

[조금만 더 했으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령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게오른은 두 팔이 잘려 나갔지만, 유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 싸움은 결국 자신의 승리라는 듯, 그 눈동자에는 이쪽을 향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리 거인에게 붙잡혀 서서히 떨어지는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처음부터 네 상대는, 내가 아니었어.”

게오른의 잘려나간 왼쪽 팔. 거기에 붙들려 있던 레안이 자유를 찾으며 풀려났다.

레안의 몸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 속에서 레안은 이쪽을 바라보는 유현을 향해 팔을 뻗었다.

유현 또한 레안에게 팔을 뻗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검은 조금 전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하지만 괜찮다. 아직 왼손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검이 쥐어져 있었으니까.

“네 차례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유현은 레안을 향해 열쇠검을 던졌다.

레안은 열쇠검을 받았다. 서리 거인에게 붙들린 유현이 저 아래로 떨어진다. 그것에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열쇠검을 쥔 순간, 레안은 머릿속에 무수한 섬광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힘.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폭발적인 격류가 몸속에서 휘몰아쳤다.

까득.

레안은 버텼다. 어쭙잖은 의지로 이 검을 쥐었다면 그래도 힘에 휩쓸려 전신이 터졌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두 덕분에 겨우 여기까지 왔어.’

고통 속에서도 의지는 더욱 선명해졌다.

거대한 격류에 휩쓸리는 그의 마음은 오히려 쓸모없는 부산물을 뱉어 내고, 더욱 표면을 정교하게 깎아 내며 이윽고 하나의 찬란한 보석으로 탈바꿈했다.

‘이젠, 실패하지 않아.’

검을 쥐고, 그대로 뽑는다.

촤르륵! 검을 휘감은 천이 찢기며 열쇠검의 눈부신 자태가 드러났다.

이 겨울을 몰아내기 위한 찬란한 황금빛.

그것을 본 게오른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전사들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성령들도, 육신의 반이 스러져 제대로 서 있지 못하던 피올드도.

전부 그 영롱한 자태를 눈에 담았다.

“으아아아아!!”

이 지긋지긋한 지옥을 끝내기 위해, 레안은 그대로 열쇠검을 쥐고 수직으로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힘이 하늘을 향하듯.

황금빛 선이 그어지며 게오른의 몸을 좌우로 갈랐다. 게오른의 심장 부근에 박힌 홍옥이 황금빛 참격을 받으며 폭발하듯 깨졌다.

참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쭈욱 나아갔다. 게오른을 뚫고 그 너머, 하늘 높은 곳을 막고 있는 먹구름을 꿰뚫었다.

촤아악!

갈라진 먹구름의 틈새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은, 32년이나 지속된 지옥을 끝낼 여명의 빛이었다.

* * *

레안은 아무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아니,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앞에 한 중년인이 서 있었으니까.

“고맙구나.”

그는 레안을 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황금빛 수염과 황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빛과 거대한 풍채.

레안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안색을 굳혔다.

“게오른, 님?”

“아직도 나를 님이라고 불러 주는구나.”

“그건…….”

“그래. 안다. 내가 한 짓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국 이 모든 것을 행한 것은 나의 부주의 때문이었지.”

잠시 앉겠나.

게오른은 레안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어느덧 그는 커다란 바위를 깔고 있었다.

하얗던 풍경이 사라지며 이윽고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다만 레안이 기억하는 얼음의 절벽이 아니라, 무수한 풀이 가득 자라있는 아름다운 해안 절벽이었다.

“보이느냐?”

“옛 북대륙의 풍경이군요.”

“그래.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내가 가장 자부하는 세상이었지.”

게오른은 희비가 교차하는 눈동자로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를 내려다봤다.

“나는 자식이 갖고 싶었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게오른의 고백에 레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했다.

게오른은 레안의 그런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로이 웃었다.

위대한 전사가 모시는 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푸근한 모습이었다.

“당황하는 것도 이해한다. 너희들에게 내겐 신이고, 성령에 대해서 안다 하더라도 자식을 갖는 성령이라니, 들어 본 적이 없겠지.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금지됐으니까.”

게오른은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식을 갖고 싶었다.

피는 이어질 수 없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고 싶었다.

“그래. 나는 가족이 가지고 싶었어. 나를 따르는 가르드의 전사들, 그들이 자신의 아들과 딸의 탄생을 축하하며 내게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도록 빌었지. 나는 언제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단다. 저런 하계의 아이들이 부럽다고.”

그래서 게오른은 자신의 힘을 대부분 소모해서 후보자를 추리고, 그들에게 힘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비록 결혼을 하고 사랑을 통해 아이는 나을 수 없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넘겨받는 아이 또한 자신의 자식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단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 약해진 틈을 파고들어 그것을 악용하려 드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리라.

태초의 서, 코덱스의 파편.

그것이 가슴에 박힌 게오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하계로 떨어져 내려 재앙으로 군림했다.

“괴로운 나날이었다. 아주 끔찍했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토록 아끼던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단지 그뿐이었을까.

자신이 만들어낸 다섯 자매가 검을 들었고, 또 그녀들이 가르치기로 한 네 명의 후보자들이 그의 손에 죽었다.

훗날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자식이라고 부를지도 모를 아이들이.

그의 손에 차가운 얼음이 되어 흩어졌다.

“그런 나를, 네가 구원해 주었다.”

그래서였다.

게오른은 자신을 이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레안이 너무나도 고마웠고, 또 너무 미안했다.

결국, 레안은 고통 속에서 상처를 받은 끝에 이 자리에 섰다.

모든 일이 끝나도, 그가 과거에 겪었던 괴로움은 없던 것이 되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그런 게오른의 안타까움을 위로하듯, 레안은 조금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힘들고 괴로운 건 사실이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겠죠. 게오른님이 미안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가…… 그랬구나…….”

게오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 아이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걱정하는 자신의 행동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내 뒤를 이어, 이 세상을 잘 부탁한다. 지금의 너라면, 나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겠지.”

게오른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어차피 곧 사라질 몸이었단다.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서 고집을 부리고 있었을 뿐. 그것도 이제 끝이지.”

아직도 미련을 떨쳐 낼 수 없었지만, 게오른은 굳이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자신은 결국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망친 주범으로 기억되며 모두의 기억 속에서 천천히 잊혀질 몸이었다.

그저 하계에 살아갈 아이들에겐 미안한 마음만 가득할 따름이었다.

“이만 가 보마.”

게오른의 몸이 서서히 빛나는 활자로 변하며 발끝부터 사라졌다.

레안은 그 광경을 보며 뭐라고 말하려다 잠시 망설였다.

그는 무언가를 다짐하듯, 게오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

천천히 사라져가던 게오른은 그 말을 듣자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고마움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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