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8화
대형 서리 거인의 등장에 유현은 더욱 정신이 없어졌다.
녀석은 기존 서리 거인보다 더 강하고 더 거대했다.
당장에 눈앞에서 팔을 휘두르는 녀석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대형 서리 거인의 피부는 주인인 게오른의 그것을 본뜨기라도 한 듯, 어지간한 무기는 죄다 튕겨 낼 정도로 단단했다.
더 이상 거인에게 사용할 룬석도 없다. 그리고 룬석 없이 이 대형 서리 거인들을 쓰러뜨릴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우워어어어!!
대형 서리 거인들이 본격적으로 파괴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팔을 휘저을 때마다 가르드 전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레안은? 어디 있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게오른의 왼손에 레안이 붙들린 것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으리라.
레안이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살아 있다 하더라도 곧 게오른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도 모자라 멍하니 주저앉은 링우그의 뒤로 대형 서리 거인 한 마리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안 돼.’
지금 당장 눈앞의 서리 거인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죽는 것은 이쪽이 된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움을 줄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가장 큰 전력의 축을 담당하던 프리첸도, 곤둘보르도 죽었다.
‘끝……이라고?’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정말로 끝이란 말인가.
이 이야기의 핵심까지 파고든 것은 유현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게오른의 앞에 선 것도, 지난 32년 동안 유현이 최초였다.
그럼에도 실패했다.
가장 중요한 한 걸음. 그것이 결국 이야기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까득.
유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은, 전생에서 몇 번이고 겪지 않았던가.
비록 그 과정에서 고통받았을지언정, 자신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래.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고통은 느낄지언정, 이것을 극복하고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눈앞에 대형 서리 거인이 주먹을 쥐는 것이 보인다. 기존의 녀석보다 움직임은 느리지만,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거지 녀석도 충분히 빨랐다. 반응하지 못하면 죽는다.
받아치는 것도 흘려내는 것도 안 된다. 그렇다면 피해야 한다. 하지만, 떨리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쿠웅. 쿠웅.
멀리서부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또 다른 대형 서리 거인인가? 아니다. 대형 서리 거인에 비해 보폭이 짧고 속도가 더 빠르다.
발소리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대형 서리 거인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는 순간.
콰득! 거대한 대검이 서리 거인의 목을 꿰뚫었다. 크기만 4m에 달하는 서리 거인의 머리가 허공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유현은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피……올드?”
그를 도와준 것은 다름이 아닌 거대한 석상인 피올드였다.
머리에 뒤집어쓴 면사와 갑옷 형태의 드레스. 그리고 양손에 쥔 거대한 대검까지.
그녀가 대체 왜? 아니, 그보다 저 상태로 움직일 수 있던 거였나?
“갑자기, 왜? 열쇠검은? 마법진을 지켜야 한다고…….”
[필멸자여.]
피올드는 유현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대가 이겼다.]
“무슨…….”
[레안을, 믿겠다는 거다.]
믿겠다고? 이제 와서?
유현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웃기지 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열쇠검을 줄 거라면 처음부터 줬으면 얼마나 좋았는가. 고작 그깟 알량한 자존심이니 미래에 기대니 어쩌니, 그런 것 때문에 죽지 않았어야 할 사람들이 죽었다.
프리첸도, 그의 수하들도, 곤둘보르도.
그들의 죽음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지만, 유현은 안다. 피올드는 그저 자신의 선택을 내렸을 뿐이라는 걸. 그녀 또한 자신의 사정이 있고, 거기에 기대어 선택을 내렸다는 걸.
오히려 지금이라도 이쪽을 도우러 와 준 그녀의 행동에 고마워해야 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피올드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만약에 그녀가 하루라도 먼저 선택을 내렸다면, 어쩌면 지금 죽은 사람 중에서 절반 이상은 살아남을 수도 있었으니까.
프리첸도, 곤둘보르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두 사람의 희생 덕분에 피올드가 움직일 수 있었다. 프리첸이 죽었기에 레안이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고, 곤둘보르가 있어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싸움을 끝으로 소멸할 테니.]
끝까지 남아서 속죄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만. 그녀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언니들이 남겨 준 힘을 모두 소모하며 육신을 움직이기까지 했다.
이미 바깥까지 나온 이상 그녀는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길을 열겠다.]
피올드는 검을 쥐고서, 다른 서리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형 서리 거인들도 피올드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잠깐만. 피올드가 왔다면, 열쇠검은 누가 가지고 있는 거지?
유현이 그것을 확인하려던 순간, 그제야 낯익은 얼굴이 전장을 가로지르는 걸 볼 수 있었다.
“헨더?”
자신을 향해 마녀라 외치고, 싸우겠다고 각오한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신은 살겠다고 외치던 청년.
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품 안에 보자기로 싸인 무언가를 들고 뛰고 있었다.
헨더가 향하는 곳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링우그였다.
“링우그! 야 이 새끼야!”
“헨……더?”
링우그가 멍한 얼굴로 헨더를 올려다봤다. 그는 이곳에 헨더가 찾아온 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뭐 하는 거야 이 멍청한 새끼야!”
“헨더? 너 진짜 헨더야?”
“그러면 진짜지 가짜겠냐! 링우그! 지금 이 꼴이 대체 뭐냐고!”
헨더는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링우그를 노려봤다. 오히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울고 싶은 것은 링우그일 텐데도, 링우그는 헨더의 눈물 때문에 더욱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네가 말했잖아! 명예로운 싸움이라고! 그리고 승리해서 돌아올 거라고! 그런데 이게 뭐냐! 이 꼴을 봐! 다 죽기 직전이잖아! 그리고 네 꼴은 어떤데! 명예롭게 싸우기로 했으면, 끝까지 용감하게 싸워야 할 거 아니야! 그게 가르드의 전사 아니었어!?”
헨더는 링우그의 저런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죽어도, 그래도 만족하게 웃는 얼굴로 죽었다면 이해해 줄 생각이었다. 저렇게 바보 같은 얼굴로 자신의 죽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녀석은, 적어도 그가 알던 링우그가 아니었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필멸자여! 지금 그럴 시간이 없다!]
“알아! 제기랄! 내가 왜 이런 곳에 와서 고생을 해야 하는 건데! 나는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인데!”
헨더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마을에서 홀로 가만히 앉아 시간을 죽이던 그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목소리의 인도를 따라 헨더가 도달한 곳은, 지금까지 가르디안의 누구도 알지 못했던 제단의 존재.
그리고, 그곳에서 열쇠검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는 거대한 석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다섯 자매의 막내 피올드라 소개했으며, 이 열쇠검의 소유권을 일시적으로 넘길 테니 부디 레안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헨더는 아직도 자신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장에도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도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링우그! 레안님은?! 레안님은 어디에 있어?”
이 검을 어서 레안에게 전해야만 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것을 위해 피올드가 자신의 목숨을 태워 가며 서리 거인들을 쓰러뜨리고 길을 열고 있었다.
그 순간, 지면이 한 차례 크게 요동쳤다.
“뭐, 뭐야!”
헨더가 뭐라고 당황하기도 전에 얼음을 뚫고 튀어나온 서리 거인이 헨더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헨더! 위험해!”
링우그가 그런 헨더를 붙잡으며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정신을 차린 헨더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에 기겁했다. 하지만 그의 몸의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피는, 링우그의 것이었다.
“리, 링우그! 얌마! 정신 차려!”
“헨더…….”
“야 이, 미친 새끼야! 네가 왜 몸을 날리는 건데! 사, 상처를 봐! 위험하다고!”
“몰라……. 그냥, 몸이……먼저 나갔어…….”
“마, 말하지 마! 링우그! 지혈이 먼저야!”
“미안해. 헨더……. 너한테, 사과를……하고 싶었는데…….”
“야! 닥쳐! 닥치라고! 너 안 죽어! 안 죽으니까 입 다물라고!”
헨더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링우그의 상처를 손으로 압박했다. 그러는 사이에 서리 거인이 헨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험해!”
벨라가 철퇴를 휘둘렀다. 서리 거인은 한쪽 팔로 철퇴를 막고, 나머지 팔로 벨라를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이윽고 서리 거인이 헨더와 링우그를 향해 접근했을 때, 유현이 서리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남은 힘을 죄다 쥐어 짜낸 유현은 서리 거인의 목에 검을 박아 넣고 그대로 옆으로 그었다.
콰득! 서리 거인의 목이 잘려 나갔다. 동시에 유현은 서리 거인의 육체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힘이.’
조금 전 그것으로 모든 힘을 소모했다. 더 이상 검을 쥐는 것도, 그리고 일어설 힘도 없었다.
하지만, 적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대형 서리 거인 말고도, 아직 융합하지 않은 일부 서리 거인들이 이쪽을 목표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도 아는 것이다. 이 열쇠검의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부탁해요…….”
유현이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헨더가 눈물을 흘리면서 유현에게 검을 건네줬다.
“이제 당신밖에 없어요. 제발, 링우그를, 저희를……구해 주세요.”
그렇게 마녀라고 불렀지만, 사실 헨더는 유현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다만 이 모습을 한 자가 싫었다. 케이라의 모습을 한 텔러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자꾸만 그의 기억에 밟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수도 없었다.
친구가, 링우그가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는 누군가를 잃는 것은 싫다.
만약에 정말로 위대한 다섯 자매가 그녀를 이곳으로 보낸 거라면.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끝낼 수 있는 것이 유현이라면.
“부탁합니다. 제발…….”
“…….”
터억.
유현은 말없이 링우그가 건넨 열쇠검을 쥐었다.
* * *
열쇠검을 쥐었다고 대단한 힘이 용솟음치며 흘러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단지 이것을 쥘 수 있도록, 레안에게 운반을 할 수 있도록 허가만 떨어졌을 뿐. 실질적인 열쇠검의 소유권은 오직 레안만 쥘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현은 그 검을 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저것을, 레안에게 전해 줄 수만 있다면.
‘일어서.’
싸움이 시작한 이후로 쉬지 않고 전력 질주로 달린 것만 같은 짙은 탈력감이 전신을 내달리고 있었다.
검에서 오러를 뽑아낼 힘도,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지만.
그래도 유현은 의지만으로 그것을 해냈다.
‘의지.’
그것을 깨닫는 순간, 유현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서수민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새하얀 설원을 영사기에 비추는 스크린처럼, 유현은 자신을 향해 웃으며 기술을 가르쳐 주는 서수민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만약, 그대가 지니고 있는 모든 힘을 잃고 맨몸만 남게 됐을 때, 내가 가르쳐 준 이 칠마흑천신공을 사용할 수 있을까?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유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한 답을 내놓았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초식과 형태, 기술을 펼치는 지식이 남아도 몸이 따라 주지 않으니까요.
-맞다. 한 줌도 없는 내공으로 뭘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된 기술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지. 몸은 동작을 따라 할지언정, 결국 받쳐 주는 내공이 없으니까. 그런데 내공이 없다고 정말 그게 불가능할까?
-그게 무슨 의미죠?
-그대도 보지 않았나. 내가 이 가녀린 몸으로, 내공조차 제대로 쌓지 못했던 육신으로 성령을 상대했던 것을. 그때 내 힘은 어땠지?
-엄청 대단했었죠. 어떻게 그런 힘을 사용할 수 있던 건지 신기할 정도로.
-그게 바로 의념의 힘이다.
서수민은 풋풋하게 웃으면서 유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의념이란 자신의 육체와 부족한 내공마저도 초월하지. 인간의 의지란 그렇게나 강력한 것이다.
-의념의 힘으로, 힘이 다 소모돼도 그것을 끌어올 수 있다는 건가요?
-그래. 오히려 그 이상도 가능하지. 그대가 무언가를 반드시 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내가 말한 대로, 그대는 별조차 쥘 수 있게 될 거다.
‘그래. 그랬어. 반드시 이기겠다는…… 굴하지 않는 의지.’
서수민은 말했다. 자신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단 모든 것을 비울 필요가 있다고.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유현이 이곳으로 오면서 유일하게 쥐고 있는 이야기, [정신집중]이 빛을 발했다.
유현의 시야가 확장되고 보는 것이 달라졌다. 싸늘한 대기 중에 떠다니는 작고 희미한 것들이 눈에 밟혔다. 그 숫자는 너무 많아서 저 멀리서 휘몰아치는 서릿발 같은 눈보다도 많았다.
‘보여. 그리고 느껴져.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그것이 이 세상의 근간으로 추정되는 이야기임을 깨달은 유현은 곧바로 다음 행동으로 들어갔다.
한 줌의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은 유현의 몸으로, 거대한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허공을 맴도는 세계를 이루는 근간인 이야기가 거대한 흐름을 만들며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야기는 내부에 어떠한 충돌도 없이 순수한 힘으로 변모했다. 힘은 유현의 의지를 따라 움직였다.
‘칠마흑천신공.’
그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은 평소에 펼쳤던 검은 내공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에 흩뿌려진 눈과도 같은, 순백의 흰색.
정순한 기운은 본래의 주인이 지닌 기질로 변화조차 하지 않은 채, 순수한 힘 그 자체로 발현됐다.
그 새하얀 기운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유현의 몸을 맴돌았다.
제 일마.
변초식(變招式) 난분분(亂紛紛).
유현의 등 뒤로 글자로 이루어진 꽃이 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