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7화
레안은 검을 휘둘렀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황금빛 검기가 게오른의 가슴팍을 향해 내질러졌다. 게오른은 왼팔을 들어 올려 그것을 막았다.
레안의 검기는 게오른의 팔을 베지 못했지만, 그는 처음으로 눈에 이채를 띄었다.
‘녀석이 방어를 하기 시작했다.’
게오른은 지금까지 모든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 냈다. 그의 단단한 육신은 어떤 가르드 전사의 공격마저도 튕겨 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보여 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프리첸이 그의 발목에 상처를 낸 이후로, 게오른은 처음과 다르게 상당히 조심스럽게 변했다.
‘다른 서리 거인들과 다르게 게오른은 상처의 재생이 늦어.’
얼음으로 이루어진 몸이 바로 복구되는 것은 서리 거인의 특징일 뿐, 게오른의 육신은 오히려 금이 간 상처 부분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표면은 단단하지만, 그것이 한 번 무너지는 순간 육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안정해진다.
게오른의 약점을 알아낸 레안은 더욱 공격에 열을 올렸다.
‘프리첸이 상처를 만든 발목은 노릴 수 없다. 게오른도 일단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게오른의 신체에 다른 부분에 상처를 만들어야 했다.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프리첸은 죽기 전에 그것을 해냈다. 레안은 그것에서 희망을 봤다.
프리첸이 했듯이, 자신 또한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어넣으며.
레안은 게오른을 향한 공세에 열을 올렸다.
‘몰아붙여.’
눈부신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차가운 냉기를 뜨거운 숨결로 밀어내며 레안은 한 번이라도 더 많은 검을 휘둘렀다.
게오른이 다시 서리검을 휘두르게 두면 안 된다. 녀석이 서리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면, 그때는 이쪽의 패배가 확실해진다.
그것을 알기에 레안은 게오른을 향해 쉼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의지를, 더 강한 의지를.
필요한 것은 이 마음이 꺾이지 않는 것.
한계까지 몰아세운 육체가 산소를 갈구하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그래도 레안은 멈추지 않았다.
더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곧 죽는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검을 더 휘두르리라.
* * *
“세상에.”
“점점, 강해지고 있어.”
프리첸의 시체를 후방으로 인솔하던 일부 생존자들은 레안이 게오른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전 게오른에게 한 방에 쓰러졌던 것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레안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들 멍때리지 말고 어서 움직여요!”
그때 유현의 일갈이 그들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남은 사람들은 곧바로 이를 악물고 본대의 수비 진영으로 합류했다.
“케이라 누나!”
“케이라!”
링우그와 벨라가 그런 유현을 반겨 줬다. 유현이 아직 살아 있다는 기쁨도 잠시, 그들은 편하게 눈을 감은 프리첸의 시체를 보더니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프리첸……. 편한 얼굴로 갔구나.”
벨라는 프리첸의 얼굴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프리첸이 가르디안에서 좋은 취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악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저 제멋대로일 뿐인 남자였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저 망나니는 대체 마지막에 무엇을 본 걸까. 이 얼어붙은 세상에서, 구원의 땅의 끝자락이라도 본 것일까?
어쩌면 그곳에 자신의 남편도,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까?
빠득.
벨라는 이를 악물고 철퇴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위에는 아직도 서리 거인들이 가득했으니까.
“룬석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 이대로 가면 전열이 붕괴하는 것도 순식간이야.”
“일단은 레안이 게오른을 밀어붙이고 있어요. 하지만 이대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레안은 지금 자신의 힘을 최대한 쥐어짜 내는 중이었다. 저 상태가 오래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심지어 게오른은 아직도 건재했다.
완전히 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상황을 겨우 6대 4 정도로 끌어올린 것이 전부.
그것도 이쪽이 4이며, 그마저도 오래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레안의 분투가 끝나는 순간, 다시 상황은 나락을 향해 치닫게 될 테니까.
‘방법이, 없는 건가?’
레안이 후보자로서 완전한 힘을 각성하지 않는 이상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안이 완전한 힘을 얻으려면 열쇠검이 필요하다. 열쇠검 없이 그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프리첸처럼 극한의 순간에 의념을 검에 담아 휘두르는 것뿐이다.
실제로 레안은 점점 프리첸의 그 과정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는 프리첸이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을 봤다. 그가 어떻게 기를 운용하고, 오러를 뿜어내고, 의지를 내뱉었는지.
레안은 그 뒷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봤다.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황금빛 검기가 서서히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빛은 더욱 눈부셨고, 압축된 힘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단순한 오러를 뛰어넘은, 오러 블레이드.
흔히들 검강이라고 부르는 것이 게오른의 두 팔뚝을 쉼 없이 후려쳤다.
‘부족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검강으로도 게오른의 피부에 제대로 된 상흔을 남길 수 없다.
프리첸이 했던 것처럼, 그 또한 이 기운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야만 했다.
레안의 입술을 비집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상한 내장 때문에 목구멍을 타고 자꾸 피가 넘쳤다.
눈이 붉게 물들고, 전신의 실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극한의 고통 속에서 레안은 눈앞에 눈부신 섬광이 연달아 폭발하는 것을 봤다.
쩌적.
상처가.
게오른이 방어로 일변하던 두 팔뚝에 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레안은 더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격발시킨 검강으로 게오른의 팔뚝을 헤집었다.
콰지직!
이윽고 금이 가던 게오른의 두 팔뚝에 거대한 검상이 새겨졌다.
크오오오오!
게오른이 또다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레안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가고자 했다.
이로써 게오른은 두 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한쪽 발목도 망가졌다.
녀석의 가슴, 혹은 목. 이번에는 그곳을 노려야만 했다.
하지만.
크와아아아아!
게오른은 레안의 예상과 다르게 수비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양 팔뚝에 검흔이 새겨진 이후, 곧바로 서리검을 쥔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빠드득! 서리검을 쥔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자, 팔뚝에 새겨진 상처가 더욱 벌어졌다.
육체를 구성하는 얼음 조각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게오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게오른은 그대로 서리검을 역수로 쥔 채,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쿠웅───!!!
서리검이 땅속 깊이 박혔다.
그리고, 안쪽부터 거대한 충격을 터뜨리며 주위에 거대한 지진을 일으켰다.
일격으로 북 대륙을 가를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모든 힘을 사방으로 분산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대지가 갈라지고, 지층이 불완전하게 뒤틀린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거대한 충격에 휩쓸린 가르드 전사들과 서리 거인들이 날아가 지면을 뒹굴었다.
“위험해!”
곤둘보르가 허공에 재빠르게 룬을 새기며 거대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러나, 즉석에서 만들어 낸 조잡한 방어막은 충격파에 닿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곤둘보르가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일대에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쩌적. 쿠웅!
게오른의 오른팔이 조금 전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오른팔을 희생한 여파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순식간에 게오른을 중심으로 부채꼴 방향의 모든 것들이 초토화됐으니까.
눈이 먼지처럼 일어나 주위의 상황은 쉽게 식별이 불가능했지만, 게오른은 자신의 지척에 쓰러져 있는 레안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레안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또 무슨 짓을 했는지, 녀석은 전신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게오른은 지면에 쓰러진 레안을 향해 남은 왼손을 뻗었다.
* * *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분명, 레안이 게오른에게 거대한 상처를 입힌 것까지는 봤다. 그의 검기가 검강이 되고, 거기에 강렬한 의념이 깃든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이후.
게오른이 분노에 찬 노성을 터뜨린 이후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가 폭발했고, 거대한 충격이 주변 일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기절하고, 서리 거인들도 충격에 가까이 있던 녀석들은 전신이 분쇄되어 죽었다.
‘맞아. 곤둘보르.’
곤둘보르가 충격파를 방어 마법으로 막아 냈다.
그 덕분에 충격의 크기가 줄어들게 됐고,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곤둘보르. 어디에요? 링우그? 벨라 아주머니!”
유현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주변의 참상을 볼 수 있었다. 가뭄의 논밭처럼 징그럽게 갈라진 대지와 그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곤둘보르!”
유현은 바닥에 쓰러진 곤둘보르의 몸을 뒤집었다. 그의 입가는 피투성이였고, 하얗던 수염도 피에 젖어 있었다.
“곤둘보르! 정신 차려요!”
“쿨럭! 쿨럭! 스, 스승님?”
“정신이 들어요?!”
“죄송합니다. 스승님. 이 제자가 부족해서.”
“곤둘보르!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불민한 제자가, 그래도 어떻게든 노력은 해 봤는데, 결국 여기까지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유현은 곤둘보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의 환영.
곤둘보르는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엄격히 가르치셨죠. 이 힘을 이용해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셨고요. 저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었습니다. 아뇨, 그저 두려워서 겁쟁이처럼 숨어만 지냈어요.”
숨을 헐떡이면서 곤둘보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며, 곤둘보르는 유현을 향해 말했다.
“지금도 무섭습니다. 괴물 같은 녀석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저, 저는 살고 싶었습니다. 이 힘만 있으면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말이죠 스승님, 결국 저는 당신의 제자였나 봅니다.”
마지막의 순간에 곤둘보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전쟁에 나섰다.
그는 지니고 있는 모든 마력을 쥐어짜 내며 서리 거인들과 맞서 싸웠고, 사람들을 살렸다.
스승님의 말씀은 그의 마음 한편에 미련으로 남았지만.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곤둘보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스승님 말씀대로, 누군가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썩 나쁜 기분이 아니네요.”
“곤둘보르…….”
“차라리 이런 걸 더 빨리 알았다면, 그때는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제자가 불민해서, 죄송합니다. 그게, 제 미련이었어요. 그래도 스승님께,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니에요. 곤둘보르.”
유현은 그런 곤둘보르를 향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어 주었다.
“당신은, 자랑스러운 저의 제자랍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곤둘보르는 그렇게 힘없이 웃다가, 편하게 눈을 감았다.
그는 더 이상 숨을 헐떡이지도,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오오오.
소리가 들린다.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몸을 재생시킨 서리 거인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있었다. 반면 가르드 전사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리 거인들이 완전히 일어나면 모두 죽고 만다. 그 전에 막아야 했다.
‘곤둘보르 할아버지. 푹 쉬세요.’
유현은 그의 시체를 바닥에 뉘며 검을 뽑고 서리 거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몸이 멀쩡한 지금이라도 최대한 많은 서리 거인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까.
파앗!
유현이 떠나가고 남은 자리에서, 기절해 있던 링우그는 손끝을 바르르 떨며 감았던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지?’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링우그는 근처에 쓰러져 있는 곤둘보르를 발견했다.
“할아버지? 곤둘보르 할아버지. 일어나요.”
그에게 기어가 어깨를 쥐고 흔들지만, 곤둘보르는 눈을 뜨지 않았다.
평소라면 짜증을 내면서 뭐라고 외쳤을 그가, 지금은 조용했다. 링우그는 몇 번이고 곤둘보르를 깨우려고 흔들었다.
터억.
“링우그. 그만해.”
“벨라 아줌마…….”
“마법사님은 죽었어.”
“…….”
링우그는 벨라의 말에 뭐라 답하지 못했다.
분명, 이 전쟁에서 누군가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희생이 없는 전쟁은 없다고, 그것이 어쩌면 자신일 거라고 각오까지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전쟁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끔찍했다.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링우그는 자신의 마음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과 다시는 웃으며 떠들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상실감을 불러일으켰다.
“헨더의 말이, 맞았어요.”
“…….”
“명예고 영광이고, 그런 건 없다고.”
링우그의 두 눈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겨진 자는, 너무나도 괴롭고 힘들다는 걸.”
“그래도…… 우린 싸울 수밖에 없단다.”
벨라는 바닥에 떨어진 철퇴를 오른손에, 주인을 잃은 양날도끼를 왼손에 쥐었다. 피로 물든 도끼의 주인은, 어디로 사라졌고 또 어떤 꿈을 품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전쟁은 시작됐고, 결국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기를 휘둘러야만 했다.
이제 명예와 영광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종의 투쟁이지.
그때 바닥에 널브러진 서리 거인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가까이에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는 것보다, 서로를 향해 천천히 뭉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광경에 뭐라고 외치는 것보다도 먼저, 뭉친 서리 거인들의 육신이 서로 동화되더니 하나로 합쳐졌다.
보통 서리 거인의 크기는 5~7m 정도.
하지만 녀석은, 막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30m는 될 정도로 거대했다.
“하, 하하.”
정신을 차린 가르드 전사 중 하나가 그 광경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이겨.”
곳곳에서 대형 서리 거인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 큰 절망을 지닌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