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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26화 (326/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6화

레안은 프리첸의 시체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마시기로 했는데.”

그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돼 버렸다.

하지만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은 프리첸을 보면, 레안은 그를 질책하거나 탓할 수 없었다.

저렇게 편하게 간 남자에게 행동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의 명예를 먹칠하는 행위였다.

그러니 보내 주자.

그의 의지를 대신 이어받자.

“게오른.”

레안은 검을 뽑았다. 정면에 게오른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발목에 새겨진 상처가 너무 커서, 게오른은 이제 걸을 수조차 없었다.

프리첸이 마지막에 남긴 상처. 그것이 이 절망스러운 시국에 또 하나의 희망을 남겼다.

“이제 누군가가 죽는 것은, 지긋지긋해.”

그의 검에서 황금빛 오러가 터져 나왔다.

* * *

“어, 어떡해요! 이러다 유현 씨가 죽겠어요!”

셀린의 도움으로 유배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던 강혜림이 발을 동동 굴렀다. 권지아는 화면 속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다.”

2천 명이나 되는 가르드인이 전쟁에 나섰지만, 그들은 자신이 준비한 것을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미리 가져온 룬석 덕분에 그 붕괴를 최대한 미루고 있었지만, 게오른이 나선 시점에서 그것조차 이제 끝이었다.

게오른이 내지른 일격.

그것은 말 그대로 땅과 하늘을 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전력 중에서 가장 큰 축을 담당하고 있던 황제 프리첸까지 죽고 말았다.

여기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 광경을 다른 성령님들께 보여 주는 것은 안 될까요?”

“뭐?”

“당장 이 모습을 시화로 보여 주면, 기존 유현 형의 서재 성령들이 다 몰려올 거 아니에요? 거기서 어떻게든 후원을 받아서 그것으로 강해진다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유영민이 떠올린 아이디어는 얼핏 보면 그럴싸했다.

모두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셀린을 돌아봤다. 그의 말마따나 그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담아서.

셀린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저희가 볼 수 있던 것도 대체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선배님이 겪는 것을 전송받아서 해당 서재로 우회해서 보는 겁니다. 선배의 서재를 개방한다 하더라도 해당 서재의 시청령들께 보여 줄 수 있을지는…….”

보여 줄 수 있다고 해도 문제다. 지금 유현에게 성령들이 후원을 해 준다 하더라도 해당 포인트는 유현의 서재, 즉 셀린에게로 들어온다.

셀린이 그 포인트를 지금의 유현에게 건네줄 수 있는 방법도 요원했다.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저희가 이렇게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저쪽 세계에서도 지금까지 멈춰 있던 이야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저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성령들이 혹시라도 유현을 불쌍히 여겨 포인트를 후원해 줄지도 몰랐다.

물론 성령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가능성에 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지금 선배의 상태로는…….”

“아니,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때 서수민의 확신에 찬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서수민은 여전히 화면 너머 검을 쥐고 서리 거인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유현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빼앗겼다 하더라도, 그가 지니고 있던 것은 단순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칠마흑천신공.

그녀가 유현에게 가르친 기술을.

지금의 유현이 펼칠 수만 있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것은 이야기가 아닌, 유현이 스스로 깨닫고 익히게 된 자신만의 기술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살아서 돌아와 달라고.

모두가 간절히 빌었다.

* * *

봐라. 그러니 내가 경고하지 않았느냐.

위대한 다섯 자매의 막내 피올드는, 산맥 너머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전쟁을 반대했다. 애초에 이것은 단순히 가르드인들이 모인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격을 가진 자. 이 거대한 운명이 선택한 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처음부터 해결 자체가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발버둥 치고 있구나.’

피올드는 막 쓰러진 프리첸을 보며 아쉬움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프리첸이 마지막에 보여 준 공격은 그녀도 순간이지만, 감탄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저 게오른의 발목에 큰 상처를 남겼으니까.

그것은 32년 전, 그녀와 언니들, 그리고 네 명의 후보자들도 해내지 못한 성과였다.

‘하지만, 저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프리첸이라 불리던 남자 또한, 결국에는 자격을 지닌 자가 아니었던 것이지.’

그가 보였던 불꽃은 눈부셨지만, 결국 일시적인 것.

자격을 지닌 자의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격을 지닌 자는 언제나 뜨거운 불꽃으로 타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자가 그 시체를 껴안고 오열한다.

소중한 동료가 죽자 분노한 전사가 무리하게 서리 거인에게 달려들다 죽어 갔다.

피올드는 그 모든 광경과 죽음을 묵묵히 바라만 봤다.

어쩌면.

열쇠검을 레안에게 넘겼다면 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정신 차려라 피올드. 지금 고작 잔정 때문에 모든 대의를 물거품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냐.’

피올드는 자신을 질책했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철저한 계산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열쇠검의 자격을 판단했다.

레안은 아직도 열쇠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저 상태에선 아무리 열쇠검이 손에 쥐어져 있다 하더라도 게오른을 쓰러뜨릴 수 없다.

결국,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피올드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면, 레안이 정말로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큰언니를 잃고 나서도 32년 동안 계속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피올드도 마냥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기대했다. 큰언니의 선택이 틀리질 않기를. 레안이라는 남자가 제대로 된 자격을 보여 줄 수 있기를.

32년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이다.

그 끝이 바로 지금이었다.

‘결국에는, 나의 기대란 이렇게나 덧없는 것이었구나.’

전쟁은 막을 수 없다. 결국 이 싸움은 가르디안의 패배로 끝날 것이다.

이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

하지만, 그래도 가르디안은 남게 될 것이다. 아직 생존자는 500명 이상이나 있었으니까.

분명 그들이 계속 자식을 낳고 또 살아 가다 보면, 언젠가는 열쇠검을 얻을 자격을 지닐 사람이 나올 것이다.

큰언니의 제자이며 마법진을 보수하는 곤둘보르가 없어서 본래 예상보다 마법진의 유예 기간이 줄어들 터, 그래도 열쇠검의 힘으로 유지되는 이곳은 아직도 최소 50년은 건재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기다리면 된다.

‘기다려야 한다.’

피올드 혼자 이곳에 남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둘째 언니부터 넷째 언니까지.

그녀들이 결국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가면서까지 자신에게 힘을 남겨 준 이유가 무엇인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각자 20년 이상을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언니들은 자신의 남은 수명을 전부 피올드에게 넘겼다.

이 끔찍한 세상에 혼자 남기게 되어 미안하다며.

그래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하고, 막내인 그녀가 꼭 살아남아서 이 세상이 빛을 되찾는 것을 봤으면 한다며.

‘언니들. 저는 때로는 당신들이 증오스럽기도 합니다.’

왜 저를 혼자 남기셨습니까.

왜 이 끔찍한 세상에서, 희망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 긴 세월을 홀로 보내게 하신 겁니까.

더욱 피올드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가 이 사명을 그만둘 수 없다는 그 막막함.

그것이 일종의 굴레가 되어 그녀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았다.

이 세상은 버려졌다.

게오른이 타락한 순간부터, 그리고 그를 막지 못한 이후부터.

결국, 희망은 없던 것이다.

이제는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잠시 생각하던 피올드는, 그 이후에 벌어진 예상 밖의 상황이 자기도 모르게 당황했다.

‘뭐지?’

하늘의 별이, 구름에 가려져서 절대로 보이지 않았던 별빛이 느껴졌다.

피올드의 시선이 전쟁터를 넘어서 그 위로 향했다. 하늘 높이 깔려 있는 눈을 머금은 먹구름을 뚫고 그 너머를.

‘별빛이…… 성령들이…….’

이제는 버려진 이 세상에, 성령들이 하나둘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 빛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그 숫자는 극히 미비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이 세상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여명의 은광이었다.

[뭐지? 여긴 어디야?]

[갑자기 새로운 서재 열려서 와 봤는데.]

하나둘.

얼어붙은 세상에 성령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자기 새롭게 나타난 정체불명의 서재에 당황했고,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펼쳐지는 전쟁에 재차 놀랐다.

보기만 해도 피부가 사늘해지는 얼어붙은 땅 위에서, 얼음으로 이루어진 서리 거인들과 북부 민족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잠깐. 여기, 게오른의 땅 아니야?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그보다 이 전쟁은 대체 또 뭐고?]

전후 사정을 모르는 성령들의 입장에서는 이 전쟁도, 저 얼어붙은 거대한 거인의 존재도 여전히 의문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처럼 펼쳐진 이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기에, 성령들은 서재를 나가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혹은 누군가는 좋은 볼거리가 있다면서 다른 성령들을 부르기도 했다.

꽁꽁 얼어 있던 톱니바퀴들이 맞물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멈췄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야기의 심장이 서서히 박동한다.

피올드는 그 경악스러운 광경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과거에는 이러지 않았다. 지난 32년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지금 벌어지는 전쟁. 그것을 만들도록 움직인 큰언니의 모습을 한 가증스러운 필멸자.

그녀다.

그녀가 이 세상에 변화를 몰고 왔다.

처음에는 자신을 기만하려고 온 녀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이쪽을 향해 외치던 그 모습은 단순한 필멸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래도 피올드는 그녀를 믿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금도 저 전쟁터에서 검을 쥐고 싸우고 있었다.

‘큰언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인 필멸자.’

큰언니 케이라.

유현이 지금 보여 주는 그 용감한 모습과 피올드가 과거에 동경하던 큰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너는 왜, 포기하지 않는 거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검을 휘두르는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피올드는 자기도 모르게 과거에 큰언니와 있던 일이 떠올렸다.

그래.

자매들이 후보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가르칠 때.

그때 분명, 피올드는 한밤중에 케이라에게 따로 찾아가서 따지듯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레안의 존재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큰언니는 어째서 저런 나약한 인간에게 자격을 주신 겁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자매라 하지만, 큰언니는 위대한 다섯 자매의 리더였다.

명백하게 위계가 나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런 피올드의 행동은 분명 자매라 하더라도 그녀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히 무례한 것이었다.

말을 한 피올드도 자신의 행동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큰언니가 자신을 질책한다면 받아들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올드는 자신이 한 말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케이라는 그런 피올드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레안은 나약하지 않단다.

-아니요. 그는 나약합니다. 몸도, 마음도 전부 약해 빠졌습니다. 대체 왜 언니가 그런 반푼이에게 매달려 있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피올드야. 너는 아직 모르겠구나. 세상에 그렇게 확정할 수 있는 건 없단다. 아무리 나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계기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변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그 계기는 언제 주어지는 겁니까! 그게 언제 다가올지 알고서 거기에 매달리는 거죠?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현실은 그러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그 가능성에 기대려고 해.

케이라는 마치 사라질 것만 같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피올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피올드. 네 말대로 인간은 나약하단다. 하지만 그들의 나약함엔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어.

-실패하는 아름다움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큰언니.

-하지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지.

-…….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거란다. 무너지고 실패해도, 그 눈에 담긴 총기를 발휘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품위라는 것을. 그것이 얼마나 눈부신지를.

큰언니는 왜 자신에게 그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하셨던 걸까.

그때의 피올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큰언니가 애써 둘러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언니들.’

큰언니는 레안을 믿어 달라고 말했다.

둘째, 셋째, 넷째 언니는 새로 태어날 가능성을 믿자고 말했다.

피올드는 이 순간 하나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에게 그때 웃으면서 가르침을 전해줬던 큰언니의 말씀을 따르기로.

‘열쇠검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아직 가르디안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 누구보다도 겁쟁이지만, 또 누구보다도 강렬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거늘, 이쪽으로 와다오.]

결심을 했다면 움직여야 한다.

이제 시간은 촌각을 다투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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