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5화
‘끝인가.’
전신에 고통이 내달린다. 눈밭에 추락해서 부러진 곳은 없었다. 게오른에게 맞기 전, 본능적으로 검을 세워서 최대한 힘을 흘려 낸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면으로 추락한 육신에 맴도는 통증, 그 이상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이 그의 몸을 잠식했다.
혼신의 일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게오른의 목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도 접근하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그마한 가능성조차도 자신에겐 만용이었던 걸까.
레안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서리 거인들을 발견했다.
일어서야 하는데.
검을 들고 맞서야 하는데.
몸에 힘이 없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다면.’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죽어 버린 그녀의 곁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레안!”
무겁게 가라앉는 세상 속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때였다.
“케이……라?”
어디지? 그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서리 거인들뿐. 그녀의 목소리를 들리지만,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죽기 전 환청이라도 들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끝나기도 전.
자신을 포위하던 서리 거인들이 하나둘 쓰러진다.
“레안! 괜찮아?!”
긴 흑발을 휘날리며, 서리 거인의 목을 베며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가 한때 가장 동경하고 또 사랑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케이라.”
그 그리운 이름을 입에 담지만, 레안은 여전히 옛날과 같은 열의를 끌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눈앞의 그녀는 자신이 알던 케이라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따라 할 뿐인, 그와 어떤 접점도 없는 존재.
“레안! 일어나!”
유현은 레안의 팔을 잡아끌며 그의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상태가……!’
레안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몸이 다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크게 꺾인 것이다.
한차례 입술을 깨문 유현은 레안에게 뭐라고 외치고자 했지만, 그보다도 주위에 깔린 서리 거인이 문제였다.
우워어어어!
놈들은 유현과 레안을 포위한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다.
저 멀리서 탐색꾼들과 곤둘보르가 이쪽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서리 거인에게 포위된 그들도 마땅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상태로는 서리 거인을 뚫고 갈 수 없어.’
무엇보다 이 상황을 더욱 절망케 만드는 것은 바로 게오른의 존재였다.
게오른은 조금 전 레안을 공격한 이후로 그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쪽이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게오른이 갑자기 달려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쿠구구궁.
그 예상대로.
지금까지 가만히 서 있던 게오른이 발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게, 게오른이 움직인다!”
“레안님은! 레안님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체고가 200m에 달하는 거인이 움직이는 모습은 전장의 어디에 있어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구의 발이 한 걸음 내디딜 때 나는 충격은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느껴졌으리라.
게오른이 움직이는 순간, 지금까지 기대감에 휩싸였던 사람들이 절망에 빠졌다.
‘안 돼.’
유현은 이를 악물었다. 주위의 서리 거인들만 해도 벅찬데, 이제 와서 게오른까지 나서면 어떻게 막으란 말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든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아니. 방법은 없나.’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다.
어디를 가도, 얼어붙은 대지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밖에 없는 이곳이야말로 지옥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계속 지옥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최대한 레안이라도 지켜야…….’
유현이 그렇게 생각하려던 순간, 회색빛 오러가 유현의 앞을 가로막는 서리 거인들을 양분했다.
그 특이한 오러를 못 알아볼 유현이 아니었다.
“프리첸?! 대체 왜 당신이 여기에…….”
“뭐긴 뭐야! 당연히 구하러 왔지!”
프리첸은 자신의 친위대들을 이끌고 적진의 한가운데까지 뛰어들었다.
레안과 유현을 구하기 위해서.
“하하! 레안!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야말로 피로에 찌든 개새끼가 따로 없어!”
“프리……첸?”
레안도 프리첸이 설마 자신을 구하러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당신이 대체 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러 온 거냐고.
레안은 그 뒷말을 애써 삼켰다.
프리첸은 그런 레안의 모습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에 서리 거인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평소의 거만함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레안이 하고자 하는 말은, 프리첸도 알 수 있었다.
“잊었냐 레안? 네가 그랬잖아. 이 싸움이 끝나면 서로 술 한잔하자고.”
“술……? 프리첸. 너 설마…….”
고작.
고작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친위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거라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 속에서?
“레안. 솔직히 나는 기뻤다.”
프리첸은 도끼로 가까이 다가오는 서리 거인의 머리를 수직으로 쪼갰다.
“내가 모두에게 미움받고 있다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 나에게 너는 말했지. 살아남은 뒤에, 술을 마시자고.”
“너…….”
“나는 그게, 정말로 기뻤다.”
빈말도, 과장도 아니었다.
프리첸은 레안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해 줬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자신이 인정하고 있던 이 남자가, 누구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대상 또한 자신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기뻐서.
프리첸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레안. 너는 살아야 한다. 너만큼은, 반드시 살아야 해.”
그러니 이 남자가 이곳에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것이 설사 아주 약간의 유예를 버는 것일 뿐이라도. 그 행동만으로 이 남자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이어 나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래도 좋았으니까.
“회색 늑대 기사단이여!”
프리첸은 도끼를 들어올렸다.
그에 호응하듯 친위대들이 프리첸의 양옆으로 도열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 따윈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프리첸을 따를 수 있다는 가슴 벅찬 흥분으로 점철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소중한 전우이자 친구들이여!”
한때는 무능한 황태자이자, 멸망한 제국의 잔재라고 불렸지만.
아군과 친위대들에겐 위대한 혈통이며 찬양받는 자.
그들이 따르는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광을, 함께하자!”
명예로운 싸움을 위해.
목숨을 다 바치자.
“왜…….”
“슬픈 얼굴 마쇼.”
프리첸의 곁에서 누구보다 오랫동안 그를 섬겨 온 남자가 유현을 향해 웃어 보였다.
“우리도 뭐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니까.”
“그러면…….”
“그래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하는 게 낫지. 후회는 하지 않소.”
곁에 선 동료들이 하나둘 말을 받았다.
“하하! 역시 그렇겠지. 우리 같은 구시대의 잔재가 살아남으면 뭘 하겠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목숨이 미래를 위한 초석으로 삼는다면야 뭐. 나쁠 건 없잖아?”
“어차피 우리 망나니 황제님. 우리 아니면 따라 줄 사람도 없고. 불쌍하니까 같이 가 줘야지.”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도, 거부하지 않는다.
워어어어어어!!
서리 거인들이 달려들었다. 프리첸이 앞서나가고 그 친위대들이 뒤를 따랐다.
“가자!”
“다 죽여!”
이제는 죽어 없어진 제국민의 외침이 친위대의 귓가에 뚜렷하게 들렸다.
그들이 가는 곳이 그저 지옥을 향한 핏빛 길일 진데도.
저 남자의 등 뒤를 따르는 그들에겐, 이 길이야말로 황실의 영광스러운 알현실로 향하는 붉은 융단이었다.
솔직히 알고 있다. 승산은 없다는 걸.
그들은 강하지만, 저만한 서리 거인들을 상대로 싸워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너머,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게오른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도 망설임은 없다.
서리 거인들을 베고, 쓰러뜨리고, 하나씩 넘어가면서.
누군가 상처 입고, 피를 흘리고, 하나둘 쓰러지면서도.
가기로 다짐했으니까.
“크하하하하!”
가장 최선두에서 싸워 나가던 프리첸은 게오른의 앞에 당도했다.
그의 희번득한 눈동자가 게오른을 올려다봤다. 게오른은 프리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재, 계속 레안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결국, 끝까지 나 같은 것은 보지도 않는다 이거지?”
그렇다면 좋다. 어디 공격을 맞고도 이쪽을 안 보나 보자.
“이래도!”
콰앙!
도끼에 맺힌 오러가 게오른의 발목을 후려쳤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두 번을. 두 번으로 부족하면 세 번을.
여기 눈앞에 세상을 저주로 집어삼켜, 영락해 버린 자신들의 신이 있다.
하지만, 프리첸에게 게오른은 신 같은 것이 아니었다.
레베카의 원수.
사랑하는 그녀와 헤어지게 만든 장본인.
그 복수의 대상을 향한 증오심을 담아 도끼를 휘둘렀다.
“이래도 안 봐!”
잔상을 남기며 무수히 흩뿌려지는 공격에 게오른이 고개를 숙였다. 평범한 공격은 그의 단단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육신에 상처조차 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가 내려다본 것은, 그 평범함을 넘어선 프리첸의 집념 때문이었다.
쾅!
공격이.
쾅! 쾅!
발목을 타고 흐르는 충격이.
콰아앙! 콰앙!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콰직!
레안의 황금빛 검기로도 베어 내지 못했던 게오른의 단단한 피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첸은 그것을 보고 근육을 더욱 쥐어 짜냈다. 가슴에 새겨진 의지를 속으로 삼키고서 영혼의 한 줌까지 끌어 올렸다.
근육이 쥐가 날 정도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오러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강렬한 의지가 회색빛 오러에 둘러진다.
의념.
아직은 그 초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단계였지만, 프리첸의 강렬한 복수심과 집착은 자신의 의지를 힘에 불어넣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휘두른다.
콰드드득!
도끼가 금을 가격하며 게오른의 발목에 거대한 상처를 만들었다.
크오오오오───!!!
게오른이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멀쩡히 서 있던 게오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천지가 흔들리는 충격에 휩싸인 프리첸은 기뻐서 웃었다.
봐라. 내가 저 괴물에게 상처를 입혔다.
자신이 한껏 벌레처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자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란 말인가!
번뜩!
게오른의 붉은 안광이 이윽고 프리첸을 향했다. 그의 오른손이 하늘을 향하더니 이윽고 거대한 냉기를 뿜어내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거대한 서리검.
200m의 거구에 어울리는, 검신만 100m가 넘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게오른은 프리첸을 향해 있는 힘껏 서리검을 내리쳤다.
쩌억───!
그리고,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으아아악!”
“모두 균형을 잡아!”
눈이 반으로 잘리고, 그 아래에 깔려 있던 거대한 빙산이 갈라졌다. 얼어붙은 안돌림 호수가 반으로 쪼개졌다. 호수 너머의 눈보라가 갈라지고 참격은 얼어붙은 산맥까지 이어졌다.
순식간에 까마득한 나락의 절벽이 게오른의 앞에 입을 벌렸다.
그 틈새로 서리 거인들이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몇몇 운이 없는 가르드인들도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오직 한 존재를 죽이기 위해 내리친 일격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위력.
그러나,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인지 프리첸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크핫!”
흩날리는 얼음의 파편과 눈가루의 사이에서, 왼팔이 잘려 나간 프리첸은 겨우 쓰러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어깻죽지부터 사라진 자리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그 상처로 냉기가 침범하는 고통 속에서도 프리첸은 눈을 감지 않고 게오른을 노려봤다.
뒤이은 거대한 충격파 때문에 입술을 비집고 피가 흘러나왔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끼도 허공에 붕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그는 아직 싸울 수 있었다.
‘도끼를 쥐어.’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프리첸은 도끼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는 발견했다.
조금 전 일격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진 펜던트 목걸이가 그의 목에서 벗어나 튕겨 나가는 것을.
목걸이는 갈라진 저 얼음의 심연 아래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
그 찰나의 순간에 프리첸은 봤다.
저 위에, 게오른이 왼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펼쳐진 게오른의 손바닥에서부터 얼음의 창날이 튀어나와 그를 향해 쏘아졌다.
피할 수 없다. 받아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끼를 쥐고, 그것을 휘둘러야 했다.
조금 전 느꼈던 그 감각. 자신의 강렬한 의지가 오러에 반응해서 더욱 한 차례 높은 힘을 이끌어 냈던 그때의 감각.
그것을 다시 일깨울 수 있다면 저 공격을 받아칠 수 있다.
그리고, 반격도 꾀할 수 있다.
그래.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직 나에겐 오른팔이 남아 있었다. 설사 두 팔이 잘려도 입으로 도끼를 물고 싸울 수 있었다.
펜던트 따위, 저 절벽 아래로 떨어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녀는 죽었다. 사랑하는 레베카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이 펜던트를 찾으려 했던 것은, 그저 과거에 사로잡힌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무기를 쥐고 싸워야 했다.
싸워야…….
“아. 정말이지.”
쿨럭.
목구멍에서 피가 울컥 흘러넘쳤다.
“나란 녀석도. 마지막까지, 참 미련하다니까.”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에 잡힌 감촉은 확실히 느껴진다.
프리첸이 남은 오른손으로 쥔 것은 튕겨 나간 무기가 아니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갑지만 따뜻한 얇은 금속의 감촉.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프리첸이 손에 쥔 것은 레베카의 목걸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복부를 뚫고 튀어나온 무수한 얼음 창이 보였다. 치명상이다. 이건 회복할 수 없었다.
미련하게도,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하녀의 사진 따위가 대체 뭐라고.
“이까짓 게 대체 뭐라고.”
그녀는 이미 죽었는데.
그 흔적이라는 것도, 그저 자신이 애써 붙잡는 환상에 불과한데.
자신은 이다지도 미련하게도 이것에 집착한단 말인가.
그래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지어진 것은, 안도감에 잠긴 미소였다.
“이번엔…… 놓치지 않았어.”
다리가 풀려 무릎을 꿇었다. 뚫린 상처로부터 피가 하염없이 흘렀다.
새하얀 얼음의 땅이 붉게 물들었다.
“프리첸님!”
“모두 프리첸님을 구해!”
아직 생존한 잔여 친위대들이 프리첸을 부축하며 그를 뒤로 호송했다. 게오른이 재차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멀리서 날아온 커다란 화염구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곤둘보르의 지원 공격이었다. 화염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게오른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황제님!”
“프리첸님! 정신 차리십시오!”
부하들이 애타게 이름을 부르지만, 그 소리는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희미하다.
프리첸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세상 속에서, 프리첸이 떠올리는 것은 레베카의 모습이었다.
슬픈 일에 눈물을 흘리고, 기쁜 일이 있으면 숨기지 않고 함께 기뻐해 주던 그녀의 미소를.
자신이 어긋나는 길을 가려 하면 망설임 없이 꾸짖어 주던 그 단호한 눈동자를.
진심을 다한 고백에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던 그 얼굴을.
왜냐하면 나는.
그때부터 줄 곳.
제국이 멸망하고 모두가 죽음만을 앞둔 채 삶을 연명하고.
모든 것이 저 빙하의 아래에 묻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니까.”
과거에도
지금에도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영겁.
그녀를 사랑한다.
시간도 운명도, 심지어 신조차도 그것을 갈라놓을 수 없으리라.
촤아악!
눈앞에 빛이 터지며 못 보던 광경이 펼쳐진다.
푸른 들판이 가득한 광야.
서쪽 하늘 너머 구름과 함께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노을을 등진 채,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프리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너도,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녀는 처음부터 쭈욱, 그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이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가 자신을 만나러 찾아오기를.
지난 32년이라는 세월 동안.
‘레베카.’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어.
프리첸은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꿈에 그리던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온기가 느껴졌다.
격한 포옹을 하며 이마와 이마를 맞대며 서로 웃는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서 광야의 노을을 향해 함께 걸었다.
가자. 레베카. 영광의 땅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가서 노래하자. 사랑을 찬미하자.
그리고,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자.
이젠 걱정하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쭈욱, 함께할 테니까.
* * *
“프리첸.”
레안은 떨리는 입술로 프리첸의 이름을 불렀다.
프리첸은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상처와 고통 속에서 웃고 있었을까.
레안은 프리첸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를 향해 묵념했다.
“편히 쉬게. 위대한 황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