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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22화 (322/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2화

프리첸은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자신의 앞마당인 것마냥 너무 당당하게 걸어가니 오히려 뒤에서 몰래 따라가던 유현이 당황스러웠을 정도.

‘아무리 지리를 안다고 해도 황실 안쪽에 서리 거인이라도 숨어 있으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그런 걱정이 드는 것과 동시에,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프리첸의 실력을 생각하면 서리 거인은 위험할 것도 아니구나.’

서리 거인은 일반 탐색꾼들에게나 위험하지, 레안이나 프리첸 정도 되는 전사라면 그러지도 않았다.

유현은 그날 라히얀과 싸우던 프리첸의 실력을 떠올렸다.

그의 회색 오러가 담긴 도끼질 한 방이면 아무리 서리 거인이라 하더라도 쉽게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만약에 서리 거인의 숫자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으면 프리첸이라 하더라도 위험하겠지만, 저 거만한 황제가 고작 그걸 감안하면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전부 자신의 마음이며, 자신이 걷는 곳이 곧 길이다.

프리첸의 모든 행동에는 자신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먹물처럼 짙게 묻어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향하는 거지?’

프리첸이 처음에 커다란 알현실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혹시라도 황실의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무구를 챙기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프리첸은 알현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그가 황궁의 옆, 작고 허름한 건물로 향했을 때 유현의 의문은 극에 달했다.

유현은 프리첸을 따라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은 안쪽까지 전부 다 얼어붙어 있었다.

천장에는 고드름이 가득했고, 단단한 서리가 벽과 가구 위를 뒤덮었다. 푸르스름한 냉기가 여전히 안쪽에서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이곳은 하인들과 시녀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프리첸이 향한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방문 앞이었다.

잠시 문을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은 프리첸은 손에 힘을 줬다. 얼어붙은 경첩이 부서지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프리첸은 문을 적당히 옆에 놔두고 안으로 향했다.

유현이 이걸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들어와.”

“…….”

들켰나.

유현은 괜히 찔려서 조용히 프리첸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도 느낀 거지만, 방은 좁았다.

한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자그마한 침대와 최소한의 가구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꽁꽁 얼어 있었다.

“아까부터 나를 계속 따라왔지?”

“……알고 있었으면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뭐, 나라고 당당하게 나설 처지는 아니니까. 부하들도 놔두고 혼자 이곳으로 온 것을 자랑할 수는 없잖아? 너도 궁금했던 거지?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곳까지 왔는지.”

유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첸은 한쪽 벽에 있는 자그마한 서랍에 다가갔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이 서랍의 가장 위를 잡아당기자 서랍 표면의 서리가 유리처럼 깨졌다.

서랍 안에 담긴 것은 살얼음이 낀 선물함이었다. 프리첸은 그 선물함을 꺼내들었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그건……?”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

선물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펜던트 목걸이였다.

아무리 봐도 아티팩트 따위가 아니었다. 저 목걸이에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목걸이가 이곳에 온 이유라고?

유현이 의문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자 프리첸이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웃기지?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라고 불리는 녀석이 혼자 움직이면서까지 챙겨야 할 물건인가 싶기도 하고.”

“아뇨, 그건…….”

“굳이 부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

목걸이를 바라보는 그렇게 말하는 프리첸의 표정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어딘가 애처로우면서도, 또 기쁨을 참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두 눈을 타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복잡한 얼굴.

“나 따위에게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올 수밖에 없었어. 꼭, 확인해야 했으니까.”

“누구죠? 그 선물을 한 사람은.”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

프리첸은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의 펜던트를 열었다. 안쪽에는 한 사람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림은 오랜 세월에도 완전히 무뎌지지 않고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레베카. 내가 황태자였던 시절에 나를 모셨던 전속 시녀다.”

프리첸은 펜던트의 뚜껑을 닫고는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던 여인이기도 했지. 결혼을, 약속했거든.”

“…….”

“큭큭. 여전히 당황스럽다는 눈빛이군. 챙길 것도 다 챙겼으니 돌아가자. 이야기는, 가면서 하자고.”

프리첸은 유현과 함께 황실을 벗어나면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프리첸은 황제의 피를 이었지만, 승계 서열이 거의 최하위를 밑돌았다.

사실상 황제가 될 수 없는 몸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프리첸은 성격이 알아 주는 개차반이라 이름보다도 망나니 황태자로 더 많이 불렸다.

프리첸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 또한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가셨다.

프리첸은 사실상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다시피 방치됐다.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라지 못한 프리첸은 필연적으로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프리첸은 제멋대로 굴었다. 망나니여도 황가의 혈통이니 누구도 프리첸을 따끔하게 가르치려고 들지 않았기에 그의 만행은 멈추지 않았다.

프리첸의 전속 시녀들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프리첸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떠날 거면 차라리 빨리 떠나는 게 프리첸도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첸에게 새로운 시녀가 생겼다.

레베카. 그녀는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레베카는 다른 시녀들과 달랐다. 황실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올라온 것 같은 수수함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프리첸을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의 당돌함이었다.

다른 시녀들은 프리첸이 화를 내거나 조금이라도 발작하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달랐다.

그녀는 오히려 프리첸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를 훈계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행동이 받아들여졌던 프리첸에겐 색다른 충격이었다. 프리첸이 아무리 서열이 낮다 하더라도 그는 황족이다. 그런 황족에게, 레베카는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황실을 모독하는 짓인 걸 알면서도 그녀는 올곧은 눈빛으로 프리첸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했다.

‘너는 내가 두렵지도 않느냐?’

‘저는 프리첸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어째서? 내가 지금 당장 명령만 내리면 네 목이 날아갈 수 있다.’

‘그것은 프리첸님의 힘이 아니라 황실의 힘입니다.’

‘나는 황실의 핏줄이다!’

‘하지만, 황실 그 자체는 아니시죠. 결국, 프리첸님 또한 누군가의 힘을 빌려 위세를 업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황실의 핏줄을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그에 걸맞은 황족으로서의 자태부터 기르셔야 합니다.’

충격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 전속 시녀라는 것도 놀라웠다.

프리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레베카의 올곧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내가 뭘 어찌해야 하느냐? 아무도 좋아해 주지 않는 내가, 뭘 어찌해야 하느냐?’

‘자신을 갈고 닦으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닌, 프리첸님 스스로가 증명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해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레베카의 말은 직설적이지만, 프리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듯 울렸다.

그날 이후 프리첸은 바뀌었다.

조금만 수틀려도 짜증을 내던 그는 인내심을 길렀다. 저주스러울 정도로 나약한 육체를 벗어던지기 위해 훈련을 시작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귀찮고 힘든 과정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이전처럼 속 편하게 싶었다. 그럴 때마다 레베카는 프리첸을 격려해 주고, 응원해 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구 하나 그를 진지하게 걱정해 준 적이 없었다.

아버지인 황제는 자신에게 관심도 없고, 어머니는 옛적부터 돌아가셨다. 형제자매라 할 수 있는 자들은 프리첸을 무시하거나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딱 한 명.

레베카는 달랐다.

흔들림 없이 올곧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봐준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프리첸은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본인도 이런 나약한 자신으로 평생 남고 싶지 않다는 집념의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프리첸은 변했다. 말랐던 몸에 살과 근육이 붙었고, 그의 체구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프리첸은 자신의 검술에 두각을 드러냈다. 황실의 기사들과 대련을 하며 그들을 꺾고, 제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인내심을 키우고 자신의 속마음을 감출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을 부릴 줄 알게 됐다.

프리첸은 어느덧 황실 기사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자신만의 기사단을 꾸렸다.

‘축하합니다. 프리첸 황태자님. 아니면 이제 회색 늑대 기사단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레베카. 전부 네 덕분이다.’

‘프리첸님이 노력하신 덕분이죠.’

‘네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레베카. 부탁한다.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줘.’

프리첸은 그렇게 말하며 레베카에게 청혼했다.

모드도 낭만도 없는 직설적인 말이었지만, 그만큼 진심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황제가 될 수도 없고, 될 생각도 없었다. 레베카가 미천한 시녀라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레베카가 혹시라도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잔뜩 긴장한 프리첸은 표정관리도 하지 못한 채 레베카의 대답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레베카는 그런 프리첸의 모습에 살포시 웃었다.

‘좋아요.’

‘와아아아!!’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프리첸은 그대로 레베카를 껴안고 좋아서 소리 질렀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오직 레베카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어찌돼도 좋았다.

프리첸에게는 레베카가 이 세상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아니던 자신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 누구도 아닌 자신을 믿어 주고 응원해 준 그녀.

프리첸은 남은 평생을 다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약속했던 결혼식이 다가오기 며칠 전.

동토의 저주가 발생했다.

“정말로, 엿 같은 일이었지.”

그녀와 앞으로 함께할 일만 생각하던 프리첸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프리첸은 아직도 그때를 기억한다.

북쪽의 하늘 너머에서 몰려오던 검은 먹구름과 뼛속까지 얼려 버리는 냉기를.

그것도 하필 남쪽에 있는 몬스터들을 토벌하기 위해 기사단을 이끌고 갔다가 돌아오는 날 그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프리첸은 황궁이 삽시간에 얼어붙는 광경을 보며 아연해졌다.

‘레베카!’

‘프리첸님! 안 됩니다! 가면 위험합니다!’

‘이거 놔라! 레베카가! 안에 레베카가 있다!’

프리첸은 황궁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회색 늑대 기사단원들은 그런 프리첸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프리첸은 그들의 우상이자, 그들이 따르기로 한 자였다.

그런 프리첸이 저 얼음의 지옥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을 잠자코 볼 수 없었다.

당장에도 실시간으로 황궁에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이, 냉기에 집어삼켜지며 선 채로 얼어붙고 있었으니까.

저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절대로 다가가면 안 됐다.

‘아.’

부하들에게 강제로 끌려 나가면서도 프리첸의 시선은 황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때, 열린 입구를 통해 누군가가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다. 레베카가 숨을 헐떡이면서, 사람 하나를 등에 업고서 뛰고 있었다.

‘레베카.’

너는.

이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거냐.

하지만 그녀의 뒤에서 쫓아오는 냉기는, 고작 시녀인 그녀가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뒤에서 다가오는 저주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멀리 떨어진 그녀가 프리첸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의 일치였으리라.

‘아.’

레베카는 먼발치에서 부하들에게 끌려가는 프리첸의 모습을, 울먹이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리첸을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프리첸은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동시에 동토의 저주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프리첸은 울부짖으며 레베카를 구하기 위해 발악하다 뒤통수에 강렬한 충격을 느끼며 기절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곁에는 회색 늑대 기사단뿐이었다.

제국은 무너지고 황궁을 얼어붙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래로 피난을 떠났다.

그곳에 레베카는 없었다.

“이 목걸이는, 레베카가 내게 결혼 예물로 준 거야. 자기 같은 하찮은 시녀는 황족인 내게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안 주는 것보다는 낫다나.”

프리첸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졌다.

분명히 오랜 세월이 흘렀을 텐데도 목걸이에서는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정말 그녀다운 이유지. 이 목걸이가 뭐라고, 나는 그렇게 32년 동안 바깥을 나돌았는지.”

황실에 숨겨진 보물이니 비밀스러운 마법 무기니.

과거 황실의 명예를 부흥시키니 뭐니.

그런 건 처음부터, 프리첸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은 버렸지만, 그래도 그녀의 흔적만큼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이것을 찾으려 했을 뿐이야.”

지난 32년.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거친 북부의 땅을 누비고 거대한 얼음 절벽을 주변을 맴돌았던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였다.

“프리첸. 당신은…… 고작 그 목걸이를 찾기 위해서…….”

남들이 뭐라고 의심하고 손가락질해도.

허울뿐인 황제니, 되먹지 못한 자니, 레안의 뜻에 반대하는 제국의 잔재니.

그런 말을 들어오면서도 그 기간을 버텨 온 이유가.

“고작? 아니, 아니야.”

프리첸은 고개를 저으며 아련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게 내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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