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321화 (321/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1화

‘제네시스 네트워크와 연결이 됐다고?’

기대하지 않던 순간에 날아온 희소식이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유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 세계의 이야기에 아주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리라.

제네시스 네트워크가 연결됐다는 것은 이야기마저 얼어붙었다고 알려진 이 세계가 다시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쩌면 끊어졌던 통신도 복구됐을지도 모르는 일.

유현은 곧바로 제네시스 네트워크 창을 만졌지만, 창은 켜지기만 했을 뿐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연결만 됐을 뿐이지 아직 제대로 다룰 수는 없는 건가.’

아쉽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인 변화였다.

지금까지 닫혀 있던 통로가 열렸다는 건 나중에는 입구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향후 가르드인들이 어떤 이야기를 보여 주느냐에 따라, 이 세계의 시화는 본격적으로 다른 세상에 알려질 거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게오른과 싸우러 가는 이 싸움에서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모를 일.

그것을 앞두고 있는 이상, 시화를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냐는 것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겠지.’

이미 여기까지 왔다. 단순히 파편을 회수하고, 데미알로스를 비롯한 펜타그램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지내면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고, 그들과 웃으면서 떠들면서 유현은 적지 않게 정이 들었다.

링우그, 레안, 곤둘보르, 벨라 아주머니, 그 외 탐색꾼들까지.

그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일 있을 싸움에 집중하자며.

유현은 작동하지 않는 제네시스 네트워크 창을 다시 닫았다.

* * *

유현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지구.

셀린은 백화 매니지먼트 사옥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들을 직면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짜증나는 일은 꼽자면 본사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일부 텔러들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선배님의 서재 권한을 넘기라니. 그야말로 제멋대로인 녀석들이야.’

그들은 유현의 서재 권한을 탐내며 셀린에게 그 권한의 일부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놨다. 서재 권한을 사려고 하는 텔러도 있고, 일부는 자신에게 그걸 넘기면 자신의 부서에 들어오게 도와주겠다고 은근하게 꼬드기기도 했다.

셀린은 그 모든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건 애초에 자신의 물건이 아니고, 주인이 있으니 그분이 돌아오면 그때 와서 이야기를 하라는 뒷말을 덧붙이며.

거절당한 텔러들은 어차피 죽을 녀석인데 뭘 그리 따지냐고 불같이 화를 냈지만, 셀린은 단호했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유현이 언젠가, 평소처럼 웃으면서 다시 돌아올 그 날을.

‘다른 사람들도, 믿고 있으니까.’

백화 매니지먼트 사람들도 모두 유현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조차 얼어붙은 유배지로 떠났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유현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유현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되는 위험을 기적처럼 넘어왔으니까.

그 남자라면, 다른 것도 아니라 강유현이라면.

보란 듯이 성공하고 돌아와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모를 일이야.’

성공을 하는 것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정말로 막말로 10년, 혹은 100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었다. 빠르게 돌아오지 못하면, 유현은 지금까지 쌓아 온 것들을 잃고 만다.

셀린이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그녀가 사용하는 제네시스 네트워크 창이 시끄럽게 울렸다.

‘뭐지?’

서재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서재가 아니었다. 소유권을 양도받아서 잠시 동안 대신 맡기로 한 유현의 서재.

그곳에 무언가가 연결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셀린은 화들짝 놀라며 유현의 서재를 확인했다. 유현이 없는 이상 해당 서재의 소유권은 그녀에게 있었고, 그녀가 서재를 열지 않는 이상 서재가 개방 될 일은 없었다.

설사, 회장님이 오신다 하더라도 이 서재는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열렸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선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셀린은 황급히 백화 매니지먼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러분! 서재가 연결이 됐습니다!”

“네? 셀린 씨, 그게 무슨 소리죠?”

“제 서재…… 아니, 선배님이 남기신 서재가 미약하지만 반응했습니다. 선배님입니다! 아직 살아 계셨어요!”

“뭐라고?”

“자, 잠깐만요!”

유현이 사라지고 나서 그의 소식을 듣지도 못한 것이 어언 몇 주나 지났다.

그런데, 유현이 살아 있다고 하니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셀린에게 모였다.

모두 모였다는 걸 깨달은 셀린은 곧바로 화면을 띄웠다.

치지직 거리던 화면이 점차 안정되더니 무언가가 나타났다.

“제 예상이 맞다면, 분명 선배님의 서재로 전달되는 이 영상은 선배님이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는 시화일 겁니다.”

모두가 숨을 삼키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자리에 모인 모두가 보게 된 것은…….

“유현…… 씨?”

“본인, 맞나?”

아무리 봐도 유현이라고 할 수 없는, 흑발의 여인이었다.

* * *

‘뭐지? 누가 자꾸 나를 보는 거 같은데?’

유현은 제네시스 네트워크가 연결된 이후로 어디선가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제네시스 네트워크는 켜지기만 했을 뿐 여전히 먹통이었고, 누군가 보고 있다는 걸 느껴도 알 방도가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피올드에게서 열쇠검을 받을 수 없게 된 이상, 이제 정말로 순수하게 생존자들의 힘만으로 게오른과 싸워야 했다.

그나마 희소식이라 한다면 게오른 또한 만전은 아니라는 것.

본래 자신의 후계자를 위해서 열쇠검에 힘을 담아 남겨 놓은 만큼, 지금 있는 게오른이 본래 신이라 불리던 때보다는 약화됐다고 봐도 좋았다.

‘유일한 변수라면 게오른의 가슴 중앙에 박힌 코덱스의 파편인데.’

그것이 과연 부족한 그의 힘을 채워 줬을지 관건이었다.

걱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게오른은 지금의 상태로도 동토의 저주를 부르고, 위대한 다섯 자매를 쓰러뜨렸으며, 서리 거인들을 만들어 냈다.

힘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성령은 성령.

그런 자에게 맞서는 것 자체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위였다.

‘희망적인 관측은, 게오른이 다섯 자매와 그녀들을 따르던 후보자들과 싸우면서 많이 약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이쪽의 숫자가 아주 많다는 것.’

이번에 전투에 참여하기로 한 사람들의 숫자만 2천 명.

다 늙은 노인과 아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싸우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야.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도 없어.’

피올드의 고집 때문에 열쇠검을 얻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미래를 보거나 가능성을 끌고 오거나. 그마저도 안 된다는 것이 이렇게나 답답하고 불안한 거였구나.’

하지만 어쩌면, 자신은 너무 파편의 힘에 의존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준비는 됐나?”

레안이 유현의 곁으로 다가오며 그렇게 물었다. 유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정면에는, 각자 무기와 갑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가르드인이 왜 싸움의 민족인지 알려 주듯이, 평소에 힘없이 지내던 사람조차도 무기를 쥐는 순간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기도가 확 달라졌다.

이 기세만 놓고 보면 당장 게오른이 눈앞에 있어도 산 채로 회를 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보통 싸우기 전에 연설을 하면서 모두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레안은 이쪽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만큼은 그러지 않으마. 하고 싶은 말은, 돌아와서 할 테니까.”

그 말에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그래! 역시 돌아와서 듣는 게 좋겠지!”

“이거, 레안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듣고 싶어서라도 꼭 살아서 와야 겠구만!”

“호호. 오랜만에 싸우려니, 이거 또 가슴이 두근두근하네요.”

죽음을 앞두고도,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전장으로 향하게 되는 건데도.

모두가 웃음을 자아냈다.

공포를 밀어내기 위해 억지로 웃는 것이 아닌, 진심이 담겨 있는 홍소였다.

“그래. 그러면 가자.”

레안의 말에 모두가 병장기를 챙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2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가르디안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사람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싸움이 두려워서, 혹은 너무 약해서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은 가르디안에 남았다.

헨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떠나가려던 링우그는 우연히 이쪽을 주시하는 헨더와 눈이 마주쳤다.

“아.”

링우그가 헨더에게 뭐라고 전하기도 전에, 헨더는 링우그를 쏘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링우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헨더에겐 닿지 않을 것이다.

그래, 사과는 돌아와서 해도 늦지는 않겠지.

링우그는 헨더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못다 한 사과를 하고, 손을 내밀고, 다시 옛날처럼 지내자고 전할 거다.

떠나가는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

그 누구도 이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누군가는 남겨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또 누군가는 죽은 사람의 복수를 위해, 또 누군가는 단지 이 저주스러운 현실을 끝내기 위해.

이유는 달라도 그들의 뜻은 같았으니까.

휘오오오오!

바깥에는 눈보라가 강하게 몰아쳤다. 하지만 오래전 보았던 그 끔찍한 추위와 비교하면 오늘은 상대적으로 날씨가 좋은 측에 속했다.

바깥으로 나와서 전열을 재정비한 사람들은 레안의 뒤를 따라 거대한 얼음 절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새하얀 눈밭 위를, 짙은 갈색과 검은빛 가죽갑옷을 입은 사람들의 대열이 질주했다.

“끄응. 다 늙어서 여기까지 나와야 하다니.”

곤둘보르는 혹여 눈이 옷 틈새에 스며드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 옷매무새를 여미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곤둘보르님까지 도와주시니 한시름 놓입니다.”

“흥. 아무리 그래도 나 정도나 되는 마법사가 안쪽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어차피 이대로 안쪽에 남아 있어 봤자 금방 늙어 죽을 테고.”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곤둘보르 또한 가르디안의 시민으로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각오를 했다.

그는 지난 32년의 세월 동안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모든 아이템을 풀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소중한 재료들이었지만, 어차피 이대로 놔두면 다 사라질 거라서 크게 마음을 먹고 지출을 감내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핑 도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여깁니다.”

레안이 얼음 절벽의 입구에 섰다.

탐색꾼이 아닌 일반 시민들은 그 장엄한 절벽의 위용에 압도됐다.

저 거대한 벽 너머에 적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원흉이 있음을 깨닫자 그들의 의욕은 기름을 끼얹은 것마냥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라히얀이 32년 전부터 숨겨 놓은 길을 통해 2천 명의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얼어붙은 벽 안쪽에 갇혀 있는 동포들의 시체를 보고 침음성을 흘렸지만, 누구도 자리에 멈춰 서지 않았다.

그렇게 출구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휴식을 취했다. 눈보라를 뚫고 이곳까지 오는 것만 해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으니까.

레안은 작전을 위해 각 부대를 지휘하게 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저 앞에 안돌림 호수가 있고, 그 너머에 얼음 안개를 지나가면 게오른이 있다. 지도로 치면 이쯤이지. 그러니 여기서 모든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에 한꺼번에 움직여야 한다.”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군요.”

“그래. 기적적으로 여기까지 오면서 서리 거인들을 마주하지 않았지만, 아마 녀석들은 게오른의 근처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서리 거인에 대한 대책은 준비됐겠지?”

“예. 물론입니다. 룬석도 충분히 챙겨왔고요.”

“곤둘보르님도 부탁합니다.”

“그래.”

레안은 능숙하게 각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고 지휘를 내렸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이다. 여기서 실패는 용납하지 않았기에 레안은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알기에 잔뜩 긴장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제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땅.

그들은 지금 그곳에 서 있었다.

“모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3시간 뒤에 움직이겠다.”

간이막사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각자 부대로 흩어졌다. 유현은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수상한 움직임을 잡아냈다.

‘프리첸 황제?’

원래라면 자신의 추종자들, 멸망한 제국의 기사들과 함께 있어야 할 프리첸이 혼자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뭐지? 기사단원들을 두고 어디로 가는 거야?’

유현은 이걸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프리첸이 눈보라 너머로 사라지려고 해서 일단은 그의 뒤를 쫓았다.

이미 거리가 상당히 멀어지고 있어서 레안에게 보고를 하기엔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프리첸을 놓치면,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유현은 조용히 프리첸의 뒤를 쫓았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의 모습이 사라질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프리첸이 향한 곳은 게오른이 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저기는, 멸망한 제국의 수도가 있는 곳이잖아?’

안돌림 호수의 동쪽에는 이제는 멸망한 제국의 수도가 있다. 그리고 프리첸은 그 제국의 마지막 적통이었다.

‘나한테 벽 너머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었지. 그것 때문인가?’

유현의 의문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프리첸을 쫓아 계속 움직이자, 어느덧 눈보라 너머로 거대한 성의 자태가 드러났다.

한때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을 거라고 생각되는 거대한 황성은 동토의 저주로 인해 꽁꽁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프리첸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황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거침없는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제국의 수도, 그 중에서 최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황실.

그 안쪽에 프리첸이 찾으려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