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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320화 (320/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320화

위령제가 끝난 가르디안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바빠졌다.

사람들은 모두 각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동토의 저주가 벌어진 32년.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은 그전부터 세상과의 투쟁을 겪어 온 자들이었다.

도끼, 창, 칼, 활, 방패 등등.

집집마다 무거우면서도 뜨거운, 그러면서도 단호한 의지가 깃들었다.

대장간에서 쉼 없이 룬석이 타오르며 고열을 내뿜었다. 망치로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밤새 울려 퍼졌다. 녹이 벗겨지며 무기들이 광택을 되찾기 시작했다.

굴뚝을 통해 뜨거운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마법진 너머까지 올라갔다.

열기는 냉기와 뒤섞여 새하얀 김을 만들어 냈다. 가르디안은 새하얀 김으로 뒤덮였다.

“결국, 싸우게 되는 거군.”

“후회해요?”

“조금은.”

첨탑의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레안은 유현의 물음에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를 수는 없지. 선택은 이미 내렸으니까. 이게 옳은지 틀렸는지는 몰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싸움을 피하는 것 보다는 덜 후회한다는 확신은 들군.”

“그보다 저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죠?”

유현은 첨탑의 높은 곳에 처음으로 올라왔다. 이런 건축물이 있으면 으레 올라가는 길이 있는 법이지만, 보통 이런 곳은 곤둘보르 같은 소중한 전력이 아니면 오기 힘든 곳인 것은 틀림없었다.

레안은 그런 곳에 유현을 초대한 것이다.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보여 주고 싶었다? 대체 뭘?”

“숨겨진 진실을.”

레안은 그렇게 말하며 아래로 내려가자고 권했다.

끝없는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 레안은 설명을 이었다.

“원래라면 나 혼자만 알고,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려고 했다.”

“첨탑 아래에 뭐가 있군요?”

“그래. 마법진을 구현시키는 제단, 그것이 이 첨탑 아래에 존재하지.”

“제단이라면 위대한 다섯 자매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훗날 차기 성령 후보자를 고르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곳이라고 했었죠? 그런데 그곳이 아직도 남아 있었어요?”

“그래. 남아 있다. 처음부터 사라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숨겼지.”

“대체 왜죠?”

“다른 사람이 알아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전 괜찮다는 거고요?”

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남들에게 숨겼던 진실을 유현에게 알려 주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도 의심했지만, 유현이 숨겨진 길을 찾고 동토의 저주가 게오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알려 준 이후로부터.

아니, 그 이후에 자신을 일깨워 준 그 이후부터.

레안은 희망이라는 것을 믿어 보기로 했다.

지하로 향하던 계단은 이윽고 끝을 고했다. 안쪽에 이어진 것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동굴이었다.

“이렇게나 따뜻한데, 얼음이 녹지 않다니.”

“원래는 꽉 막힌 빙산이었어. 그나마 이 온기가 길을 뚫은 거지.”

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안쪽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이 강해진다 싶더니, 이윽고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의 중심에는 제단이 있었고, 그 제단의 주위로 4개의 석상이 서 있었다.

하지만, 멀쩡한 석상은 오직 하나 뿐. 나머지 3개의 석상은 이미 무너져서 흔적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저건 뭐죠?”

“위대한 다섯 자매. 아니, 이제는 네 자매라고 해야 하나.”

“네?”

그들은 전부 죽어서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현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석상을 살폈다.

높이는 약 12m정도.

드레스 형태의 갑옷을 입은 채로, 두 손으로 두꺼운 대검의 손잡이를 쥔 채 바닥에 꽂아 넣은 자세의 석상이었다.

얼굴은 면사로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석상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성스러웠다.

그 기운이 제단의 중심에 모여 있었다.

“저건, 검?”

제단의 중심에 둥둥 떠 있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어떠한 장식도 없는, 수수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검이었지만. 저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통로를 만들며 가르디안 마법진에 힘을 실어 주는 것도, 저 석상이 아닌 제단 위에 떠 있는 검이었다.

“저건 뭐죠?”

“열쇠검. 마지막 후보자가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지.”

“자격이라면, 차기 성령의 그것?”

“맞다. 저 검이야 말로 게오른이 차기 성령 후보를 위해 남겨 놓은 자신의 힘이니까.”

“저게, 게오른의 힘이라고요?”

꽤나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지금 저 북쪽의 끝에 있는 게오른이 완전한 힘을 지닌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확실히 성령이 그런 모습으로 영락했는데, 본신의 힘을 그대로 지녔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저 검이 게오른이 남겨 놓은 힘의 일부라면, 레안이 싸우고자 다짐한 것이 이해가 갔다.

“저 검만 챙기면 되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어.”

레안은 마지막 남은 석상을 가리켰다.

“저 열쇠 검은 다섯 자매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만질 수조차 없어.”

“다섯 자매라니, 그러면 저 석상이?”

“다섯 자매의 막내. 피올드다.”

레안은 과거에 그녀와 마주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누구보다도 나약했던 나를 싫어하고 혐오했던 자이기도 하지.”

“다섯 자매는 전부 죽었다고 했는데, 왜 저기에 막내가 남아 있는 거죠?”

“다섯 자매는 전부 죽지는 않았다. 정확히, 케이라 그녀를 제외하고 나머지 넷이 살아서 돌아왔지.”

레안은 32년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네 명의 후보자와 다섯 자매가 동토의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고, 그들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이후.

어느 날 4개의 힘이 레안을 향해 날아왔다.

레안은 그것이 다섯 자매인 걸 알아보고, 기뻐하며 물었다.

‘위대한 자매들이시여.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동토의 저주는? 해결하신 겁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레안의 기대를 철저히 깨부쉈다.

[아니. 우리는 실패했다.]

[동토의 저주는 막을 수 없었어.]

[거대한 힘. 우리로서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지.]

[우리도 겨우 도망친 거야.]

한마디씩 이어지는 자매들의 말에, 레안은 그제야 다섯 자매 중 하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케이라. 케이라는요? 그녀는 대체…….’

[큰언니는 없다.]

[큰언니는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거다.]

[그래. 어떻게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지.]

‘사람들을, 살리다뇨?’

[레안. 반푼이 후보자여.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지금 당장은 살아 있지만, 이대로 가면 우리 또한 육신이 붕괴해서 죽고 말 것이다.]

나머지 네 자매는 결국 결단을 취했다.

이대로 가서 죽을 바에야,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남겨 놓기로.

그녀들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제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각기 정해진 자리에 서서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았다.

‘자매들이시여! 대체 뭘 하시려는 겁니까!’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

[큰언니가 바라던 일.]

[세상을 지키는 일.]

자매들의 크기가 점점 거대해지더니, 이윽고 그녀들의 신체가 서서히 돌로 변하기 시작했다.

[열쇠검에 남은 힘을 이용해서라도, 마지막 인류를 존속시켜야 한다.]

[레안. 네놈에게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후보자로서 한 명으로, 이 하나만큼은 꼭 이행해라.]

[이 힘을 이용해 생존자들을 꾸려라. 그리고 훗날 새로 태어날지 모르는 영웅의 재림을 기다려라.]

[이 간단한 거라도, 제대로 하길 비마.]

네 자매는 그렇게 말하며 제단에 힘을 가했다. 동시에 막내 피올드가 품에서 안고 있던 검이 둥실 떠오르며 제단의 중심에 우뚝 섰다.

열쇠검의 힘과 자신들의 남은 힘을 모두 쏟아부으며 네 자매는 그렇게 굳어서 석상이 됐다.

동시에 제단 주변의 땅이 크게 요동치더니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저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레안은 그 광경을 황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레안은 그녀들의 뜻을 따라 가르디안을 이루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나? 어떻게 내가 제단의 힘을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케이라의 제자인 곤둘보르의 힘을 빌렸다 해도, 이 커다란 도시를 100년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진을 만들 수는 없었을 텐데.”

그 모든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이 힘은, 결국 싸움에서 패배해서 돌아온 나머지 네 자매가 자신들을 희생해서 만들어 낸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이들의 큰언니 케이라는 레안이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머지 넷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안은 반푼이에 싸움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다.

차라리 레안에게 모든 힘을 맡길 바에야, 혹시 모를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그때의 내게 힘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나는 제대로 싸울 수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내 손으로 모든 일을 망쳤을지도 모르지.”

레안은 그래서 지하에 있는 제단을 숨겼다.

위대한 자매들이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 이 마법진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동시에 레안 자신도 그녀들의 의견에 막연히 공감했으니까.

자신이 아닌, 언젠가 이 가르디안에 위대한 영웅이 태어나게 된다면.

그 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지.”

프리첸? 라히얀? 분명 위대한 전사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영웅이 아니었다.

레안이 반푼이라 하더라도, 차기 성령의 후보로 뽑혔던 남자다. 그런 레안의 안목이 틀렸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32년이 흐르는 사이.

석상으로 굳은 자매들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스러졌다.

가장 먼저 둘째 라디아가.

그다음 셋째 플로레가.

그다음 넷째 다루윈이.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막내 피올드뿐이었다.

“이제 안다. 훗날 태어나게 될 영웅은 애초에 없었다는 걸. 너의 말대로, 케이라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대하며 남긴 안배는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그러면, 저 열쇠검을 뽑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 나는 아직도 위대한 자매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까.”

위대한 자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열쇠 검을 쥘 수 없다.

타락한 성령, 게오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열쇠 검의 힘이 필요한데,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부탁을 하면 들어줄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피올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거다. 애초에 나는 그녀가 깨어 있는지도 모르겠어.”

피올드가 굳어서 만들어진 석상은 아직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언젠가 자신의 언니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전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은?”

“소유권을 넘기지 못한 채 전부 사라지면, 이젠 누구도 얻을 수 없게 돼. 기회 자체가 소멸하게 되는 거지.”

“……그러면 큰일이잖아요.”

“맞아. 그러니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 그녀에게 부탁을 하려고 찾아온 거였어. 열쇠검을 쥘 수 있게 해 달라고. 내게 기회를 달라고.”

레안은 피올드의 석상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이곳에 찾아오고 방금 전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지만, 그녀의 의지는 반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군.”

“깨어 있기는 한 걸까요?”

“모르겠어. 깨어 있는데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힘이 쇠락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건지.”

“저를 여기에 데려온 이유도, 열쇠검 때문이군요.”

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케이라의 의체를 한 유현이라면, 피올드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더라도 열쇠검을 쥘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금까지 케이라의 모습을 한 텔러들은 모두 제멋대로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이 제단의 진실을 끝까지 숨겼지만.

유현이라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네요.”

유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단의 위로 올라갔다.

열쇠검은 그렇게 높이 떠 있지 않아서,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 거리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검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더 강해졌다. 정순하고 따뜻하다. 유현은 이거야말로 별의 힘이라고 불릴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유현이 용기를 내서 검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만지지 마라.]

얼음으로 이루어진 공동을 울리는 소리에 유현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 목소리는 오직 유현에게만 들리는 것이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시간이 멈춰 있었다.

심상세계.

피올드가 유현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이다.

“피올드?”

[큰언니의 모습으로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껍데기만 뒤집어 쓴 필멸자여.]

“……열쇠검이 필요해요. 당신의 힘을 빌려주세요.”

유현의 말에 피올드가 소리 내서 웃었다.

[열쇠검을? 누가 쓰려고? 네가? 아니면, 저 조잡한 반푼이?]

“누가 쓰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물론. 자격이 없는 자가 만지면 몸이 터질 테니까. 내가 허락한다면 잠시간은 소지할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지.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는 자격이 없어. 겉모습만 큰언니의 것을 따라해 봤자,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닮을 수 없으니까.]

“그러면 레안 뿐이군요.”

[저 반푼이에게 검을 주라고? 그거야 말로 웃기는 소리지. 레안은 후보자에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야.]

“32년 전 일이죠.”

[내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를까 봐? 건방진 필멸자야. 나는 비록 이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나의 눈과 귀는 바깥까지 다 닿고 있단다. 내가 지난 32년 동안, 레안을 무시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피올드는 말했다.

자신이 32년 동안 혹시라도 몰라서 레안을 지켜봤지만, 그는 여전히 겁쟁이에 반푼이였다고.

그래도 이전과 다르게 검을 휘두르고 서리 거인을 쓰러뜨리게 됐지만, 이 남자의 마음에는 아직도 나약함이 남아 있었다.

[미련에 사로잡힌 자는 열쇠검을 다룰 수 없다. 겉으로는 냉정함을 포장하고 검을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미혹을 완전히 떨쳐 내는 것은 별개. 이런 자의 마음은 언젠가 무너지고 만다. 그런 자에게,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는 열쇠검을 넘기라고?]

“레안은 당신들이 시킨 대로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 그리고 아직 이 도시의 생명은 68년이나 남아 있지. 우리가 안배한 시간은 아직 반도 흐르지 않았다.]

“케이라가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을 텐데요?”

[닥쳐라. 큰언니는 분명 우리 자매들이 모두 존경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레안의 가능성을 점치는 언니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 남자가 지난 32년 동안 걸어온 행보를 보며 더욱 확실하게 변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그리고 생존자들은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어요.”

[모두가 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생존자들의 숫자는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명맥은 이어지겠지.]

“지금 하지 않으면 전부 죽는다고요!”

일체의 타협을 하지 않는 피올드의 말에 유현이 분노를 터뜨렸다.

“자격이니 미혹이니 뭐니! 결국, 당신은 레안이 이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핑계를 대고 있을 뿐이잖아!”

[핑계라고? 이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우리가 사소한 감정을 앞세운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그게 아니면 뭐죠? 이쪽이 역으로 물어보죠. 남은 68년의 시간 동안, 자격을 지닌 자가 태어날 거라는 확신은?”

[…….]

“역시. 대답하지 못하는군요. 그렇죠. 그러기 힘들 테니까.”

[애초에 레안이 저 검을 쥔다고 해서 힘을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소유권을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레안은 검에 담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거다. 오히려 거기에 휘둘리거나, 폭주하겠지.]

“마치, 레안이 꼭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군요. 그의 가능성은 믿지도 않고요.”

[가능성이 있었으면 왜 지금까지 꽃피지 못했지? 필멸자야. 내가 그를 지켜봐 온 기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동토의 저주가 발생하고 32년. 그리고 그전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더 길다. 묻자. 가능성이 있는 자라면 처음부터 그럴 기미가 보여야 하는데, 레안이 그랬나?]

피올드가 확신하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레안이 달라질 거라고? 그는 싸우기로 결심했다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는 몰라도, 피올드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레안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미혹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이 내치고 싶다고 해서 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믿으면 안 됐던 거야. 큰언니는 레안을 믿었지만, 분명 레안이 무슨 짓을 해서 큰언니를 꼬드긴 거겠지.]

“당신이 뭘 안다고 멋대로……!”

[모른다. 모르기에 알려 해도, 저자는 알려 주지도 않았지. 당장 길어도 몇 주만 함께했던 네가 잘 알까, 녀석을 수십 년이 넘게 지켜본 내가 훨씬 더 잘 알까.]

유현은 이를 악물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다르기에 대화가 끝없이 평행선을 달렸다.

피올드의 믿음은 너무나도 확고해서, 유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피올드에게 있어서 레안이 싸우겠다고 하는 것은, 수십 년간 범죄만 저질러 온 전과자가 개과천선했다고 믿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래도 한 번은 믿어 줬겠지만, 위대한 다섯 자매로서 막내인 그녀는 타인의 마음에 남아 있는 미혹의 잔재를 느낄 수 있었다.

“……레안을 믿어 달라고 하지 않아요. 레안을 믿었던 케이라를 믿어 달라고 한 거지.”

유현은 처연하게 웃었다.

“그런데 당신은, 위대한 다섯 자매 중 하나라고 하면서도 같은 자매인 그녀도 믿지 못하는군요.”

[…….]

피올드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피올드와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었다.

유현이 그런 의지를 강하게 먹는 순간, 피올드의 심상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현은 열쇠검을 만지려던 손을 다시 뒤로 물렀다.

“왜 그러지?”

“저는 만질 수 없어요. 겉모습만 따라 한 거라 자격이 없거든요.”

“대체, 누가……?”

“피올드가 그러더라고요. 저를 심상세계로 억지로 불러와서, 그렇게 말했죠.”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니.”

“이제 어쩌죠? 열쇠검의 힘이 없다면…….”

“아니.”

레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싸워야지. 열쇠검이 없어도, 우리만의 힘으로.”

“괜찮을까요?”

“언제까지고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

레안이 그렇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띠링.

이전까지 익숙했지만, 지금 와서는 듣기 힘든 소리.

그것은 제네시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때 나는 소리였다.

[해당 세계의 핵심적인 이야기에 파고드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시스템 재부팅.]

[로딩 완료.]

[제네시스 네트워크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제네시스 네트워크가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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